張獻忠
(1606~1647)
1 개요
중국 명 말기의 민란 지도자로 이자성의 세력과 쌍벽을 이뤘다. 1644년 쓰촨(사천)을 근거지로 대서(大西)국을 세워 황제가 되었지만 1646년 청의 군대에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청군이 이자성을 격파하고 근거지인 사천을 압박해오자 사천 지방에서 그야말로 중국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 살인극을 벌여 중국 역사상 가장 엽기적인 살인마로 기록된다. 이때의 학살이 워낙 심하여 고대 촉나라의 후손들은 거의 멸종하고 지금 남아있는 사천인들은 촉나라의 후손이 아니고 뒤에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간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이다.
남아있는 기록이 모두 청나라의 입장에 쓰여있기 때문에 청군이 학살한 일을 장헌충에게 뒤집어씌웠다는 주장이 근래에 나오고 있지만 아직 학계의 통설은 장헌충의 학살이 맞다는 것이다. 장헌충이 누명을 썼다는 주장은 구체적 사료나 증거가 없는 상황에 따른 추측인 반면 장헌충이 했다는 사료는 너무나 많다. 옛날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수가 적기는 해도 사천 지방에는 장헌충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남아서 증언하고 있었다. 이걸 부정하기에는 반대측 주장의 근거가 너무나 빈약하다.
그에 대해 예전에 묘사된 것을 보면 살인은 밥벅고 대변누는 것과 같은 일상이며 전쟁이나 당쟁, 혹은 불가피한 정치적인 살인이 아닌 오로지 살인을 즐기기 위한 살인마로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였다.
1.1 고금에 찾아보기 어려운 엽기적 살인마
장헌충은 역사의 평가 속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희대의 살인마로 기록되어 있는데 야사가 아니라 정사를 비롯한 서책들에 버젓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명나라 역사를 기록한 <명사 장헌충 전>, 심순위의 <촉난서략>, 구약직의 <촉란>, 팽군사의 <촉벽>, 양산송의 <고야호천록> 등은 한결같이 그의 변태적인 살인행태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호광전사천(湖廣塡四川)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사천에 사람이 없어서 호남, 호북, 광동, 광서 사람들을 이주시켜 사천 땅을 채웠다"라는 말이다. 한 마디로 장헌충이 사천 사람의 씨를 말려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이주시켰다는 이야기이다.
이 역사책의 기록을 보면 과연 모골이 송연해질 만 하다.
- 초살 - 대서국의 황제가 된 장헌충은 이자성이 청나라에 의해 쫓겨나자 이제 가망이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사천 지역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자 했다. 그는 병사들을 사방으로 보내 보이는대로 죽이게 하고 수족 2백개를 가져오면 파총(하위장교)를 제수했다. 어떤 병사는 단 하루만에 수백명을 죽여 단숨에 병졸에서 도독(대장)이 된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6만명을 넘는다. 선비,승려,도사,의사 30만명을 죽였다.
- 2. 천살 - 대서국의 관리는 처음에 9백명이던 것이 장헌충이 죽을 때 25명 밖에 남지 않았다. 조회를 할 때 사나운 개를 풀어 개가 냄새를 맡은 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끌어내 죽였다.
- 3. 사천 지역에 과거를 실시해 모인 유생들을 문에다 4척(1미터24센티)의 줄을 걸쳐 그 줄에 걸리는 자는 모조리 죽이니 멋모르고 과거장에 온 어린 아이 2명을 빼고 모두 죽였다. 한번은 과거에 장원을 한 사람과 술자리를 했는데 뛰어난 용모와 기상, 학식을 보고 반한 나머지 '그대같은 사람들은 우리하고 어떻게 다른지 보고 싶다'며 배를 갈라 들여다 보았다.
- 4. 취수환연 - 친구를 너무도 좋아한 장헌충은 친구가 찾아오면 밤새 술을 마시며 놀고는 다음날 금은보화를 잔뜩 주어 보냈다. 그리고 미리 부하를 매복시켜 친구를 죽이고 목만 보관하였는데 나중에 전쟁터에서 친구들의 목을 죽 늘어놓고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술을 마셨다.
- 5. 장헌충은 술에 취해있으면 온순하지만 술에서 깨면 하루라도 눈앞에 피가 흐르는 것을 보지 않으면 기분이 언짢아 졌다. 하루는 '이제 더 이상 죽일 사람이 없단 말인가'라고 절규하고 부인,애첩들,자식까지 모조리 죽였다.
- 6. 군대를 귀찮게 여겨 5백명만 남기고 다 죽이고자 하여 밀고를 하게 해서 조그마한 잘못만 있으면 모조리 죽였다. 이렇게 위군 75만, 영병 23만명이 죽었다.
- 7. 하루는 여자의 전족을 잘라 산을 만들어 놓고 가장 총애하는 후궁을 데리고 갔는데 산의 꼭대기를 장식할 예쁜 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는 데리고간 후궁의 발을 잘라 제일 위에 올려놓았다.
- 8. 하루는 성도성 주민을 다 죽이겠다고 생각하고는 적이 처들어왔다고 혼란상황을 조성해 성문을 빠져나가는 사람을 죽이니 40만명이 죽었다. 성도에는 20호만 있었고 밥짓는 연기가 올라가지 않았다.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대낮에도 시내를 돌아다녔다.
- 9. 청군이 쳐들어오자 방어전을 해야 하지만 이미 아까 언급한 막장상황때문에 군대와 장비,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청군은 공성전을 위해 명나라에서 제조한 막대한 수의 화포를 장비한 상태였으므로 장기간 농성도 어려웠다. 그러자 대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포탄을 빗나가게 할 저주를 한답시고 성 내 여자들을 죽인 후 시체를 발가벗겨서 성벽에 단체로 걸어놓기 였다. 당연히 이런 행위는 전혀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시체썩는 냄새로 인해 방어군이 성벽에 오래 머무를 수 없으므로 오히려 성 함락이 빨라졌다.
이 외에도 장헌충이 사람을 죽이고 글을 지어 새겼다는 비석, 일명 '칠살비'에 대한 설화도 있는데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天生萬物以養人 (하늘은 사람을 먹여살리기 위해 만물을 창조하는데)
人無一德以報天 (사람은 하늘에 보답하기 위해 조금의 선행도 쌓지를 않는구나)
殺殺殺殺殺殺殺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살살 좀 하지 그랬어
1.2 이 모든 것은 누명?
그러나 20세기가 들어 청나라가 망하면서 한족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사천의 대학살은 장헌충의 짓이 아니고 청나라 군대가 한 일이며 이 학살이 정치적 부담이 될 것을 염려한 청나라 조정이 모든 책임을 장헌충에게 돌렸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야기 중국사를 쓴 역사 소설가 진순신 같은 인물이 있다.
우선 역사서에 기록된 글들이 너무나 황당하고 수치도 당시 실정과 맞지 않을 뿐더러 (일부에서는 6억을 죽였다고 되어 있기도 하다) 더더군다나 농민 반란세력을 폄훼하기 위한 청조정, 농민 반란군에 가족을 잃은 학자,관리들의 기록이라는 것이 주요한 이유이다.
1. 장헌충의 모토는 바로 '탐관은 죽일 뿐, 순민(順民)은 건드리지 않는다.' 였다고 한다. 장헌충은 황족,귀족,호족 세력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았던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는 중경,상양,성도를 함락하면서 양왕 주익명, 촉왕 주지주를 비롯한 황족들은 모두 죽였다. 그리고 성도를 점령한 후에는 사천의 호족들을 소집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여버렸다고 한다. 호족에게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등 어려웠던 과거의 원혼이 살아있었으리라.
2. 하지만 그는 백성들에게는 매우 관대했다. 대서국을 세운 뒤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세와 부역을 면제했다. 특히 3년 동안 전량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사천을 근거로 힘을 키우기 위해 주력했다. 관청이나 지방호족들이 빼앗은 땅은 모두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장헌충이 죽자 사천의 주민들은 장헌충의 소상을 세운다. 청나라 조정이 이를 무너뜨리자 주민들은 계속해서 다시 세웠다. 21개 주현이 스스로 장헌충에게 귀순했다.
3. 장헌충은 인재를 중시했다. 2년간의 짧은 시간 동안 과거를 계속해서 실시했고, 학당을 건립해 자주 시찰했다. 과거 합격자들은 주현의 책임자나 보좌진으로 썼다. 명나라 관리라 해도 탐관은 죽이되 순관이나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물은 중용했다.
4. 장헌충이 죽자 그의 군대는 사천 주민들의 비호를 받으며 16년 동안이나 청나라와 싸웠다. 역사책대로 거의 백만가까운 군대를 죽였다거나 사천 주민들을 도륙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 추가 자료 : #
또한 위의 '칠살비'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비석이 실제로 사천지방에서 출토되었는데 문제의 세번째 줄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鬼神明明 自思自量 (산타 할아버지신령은 다 알고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보고 반성 좀 해라)
하지만 위의 주장들은 절대 학계의 주류 의견이 아니다. 위의 주장을 내놓는 사람들은 대개 한족 민족주의 성향의 아마추어 역사가나 네티즌, 소설가 등이고 전문 역사학자들은 위의 주장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일단 위의 주장들은 전부 상황에 근거한 추측일 뿐 구체적 사료나 증거는 하나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기껏 내놓았다는 게 위의 칠살비 비석 하나 뿐이다.
당시 청나라 정권에 의해 진실이 전부 가려지고 사실이 조작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인 것이 당시 청나라가 학살을 벌였던 양주(揚州)나 가정(嘉定) 같은 곳에서도 살아남은 생존자에 의해 당시의 일을 기록한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나 가정도성기략(嘉定屠城紀略) 같은 책이 은밀히 나돌기도 했고 이 책들은 청나라 정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어 그 지독했던 청나라의 문자옥을 거치면서도 아직도 남아 있는데 비해 당시 사천의 대학살을 청군의 행위라고 적은 기록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전부 장헌충의 살륙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살아남은 사천 사람들이 모조리 청나라 정부의 위협 때문에 거짓말을 했고 그 수많은 기록을 남긴 당대 사람들이 전부 바보라서 이들의 거짓말에 속아넘어 갔다는 건 가소로운 이야기일 뿐이다. 당시에는 반청 지식인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청에 대한 가짜 정보나 루머까지 마구 양산하던 시절인데 사천의 생존자들로부터 실제 학살자가 청나라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기록에 남기지 않았을리가 없다. 하지만 그런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1.3 영향
학살을 장헌충이 주도했건, 청군의 학살이 일어났건, 사천성이 입은 인적 피해는 막심했다. 사천성의 인구는 거의 궤멸당하다 시피 하였는데 실제 당시 기록에는 이전에는 사람들로 바글거리던 비옥한 사천 지방에서 수백 리를 가도 인적을 찾을 수 없고 밥짓는 연기를 볼 수 없으며 사람살던 고을이 텅비어 개 짖는 소리나 닭 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심한 경우 사천의 인구가 1~2% 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나라는 황무지가 된 사천에 사천과 가까운 호북성이나 북경의 백성들을 대량으로 이주시켰다.(대신 북경에는 청나라의 팔기군과 그 자제가 입주하였다.) 이 때문에 사천 방언은 관화와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이때 이주한 사람들은 역사상의 다른 강제 이주와 달리 상당히 상황이 괜찮은 편이었는데 장헌충 집단이 사람만 죽였을 뿐 심한 파괴행위를 하지는 않아서 집이나 가재도구, 조금 황폐해지긴 했지만 잘 정비된 농지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다른 강제 이주 같은 초기 고생이 굉장히 적었다고 한다. 그냥 그해 먹을 식량과 종자만 가져가서 주인이 죽고 없는 빈집에 들어가 남아있는 농기구로 공짜로 분배된 농지에 농사만 지으면 된다고 할 수준이었다.
일설에는 이 무렵의 학살로 고대 사천인은 멸족했다는 주장까지 있는데 멸족까지는 아니라도 현대 사천인들에게 고대 사천인의 피가 상당히 옅은 건 사실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