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성

대순의 역대 황제
건국초대 영창제 이자성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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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없음
시호없음
연호영창(永昌)
호칭틈왕(闖王)
이(李)
자성(自成)
생몰기간1606년 9월 22일 ~ 1645년 5월 17일
재위기간1644년 3월 13일 ~ 1645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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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自成
1606년 9월 22일 ~ 1645년 5월 17일

중국의 농민반란 슈퍼스타.
주원장에 이어 제국을 멸한 농민출신의 황제.

1 개요

중국 나라 말기에 활약한 반란군 수장. 별명은 틈왕(闖王). 중국에서는 그의 성을 합쳐 이틈왕(李闖王)이라고 부른다. 틈이란 문 사이로 말이 뛰쳐나온다는 뜻으로 거칠고 용맹하다는 의미다.

장헌충과 함께 명말 민란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자성의 난으로 대순국을 세워 중원과 하북을 함락시키고 명나라를 멸망시켰지만 청나라와 청에 투항한 오삼계의 반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어찌된 일인지 중국 역사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반란수령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인 마오쩌둥조차도 이자성을 존경했고, 소설가 야오쉐인으로 하여금 대하소설 '이자성'을 집필하게 했을 정도다.

이자성의 인기는 탐관오리들을 벌하는 의적과 검증되지 않은 군주 신화가 결합된 것이다. 한국에서 홍길동 + 광해군 = 농민황제 이자성이라고 해석하면 왜 인기가 있는지 대충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1]

2 생애

2.1 가난한 청년, 틈왕이 되다

섬서 출신으로 중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집안이 몰락하고 명나라 조정에서 운영하는 역관[2]으로 들어가 역부로 일했다. 하지만, 명나라는 재정난 때문에 역관을 대거 폐쇄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집단 해고로 인해 명나라는 반란에 휩싸인다. 먹고 살 길이 없어진 역부들이 생계를 위해 약탈을 일삼았고, 그 중에 이자성도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자성은 처음부터 반란군이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실업자가 되자 군대에 들어가지만, 당시 쇠약해진 명의 재정으로는 청과 대치하고 있는 국경을 지원하기도 힘들었으므로, 후방에 있던 이자성의 부대에는 봉급은 둘째고 식량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명나라 내부에서는 병사들이 탈영하거나 소요사태를 일으키며 상당수가 반란군이 된다.

군인으로서도 먹고 살 수 없게 되자, 이자성도 반란군의 한무리였던 틈왕 고영상의 휘하에 들어갔는데, 나중에는 고영상이 죽자 그 세력을 이어 받아서 지도자가 된다. 틈왕이라고 불린 것도 고영상의 세력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2.2 실업자가 천하를 뒤엎다

이자성은 관군에게 몇 번 패했으나, 때마침 명나라에는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수백만에 달하는 굶주린 난민들이 각지를 떠돌던 상황이었고, 이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세력을 계속 불려 나갔다.

하지만 그의 군세를 단순히 실업자(...)집단이라고 볼수는 없었는데, 이자성 군은 엄격한 군율로 이름이 높았다. 때문에 거의 도적 떼와 다름없던 다른 반란군과 확실히 차별되어서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명나라가 만주에서 일어난 청나라와의 전쟁에 전력하는 사이, 이자성은 힘을 길러 낙양을 비롯한 화북 지방을 점령해 나갔고, 마침내 1644년 1월 서안[3]에서 왕으로 즉위하고 대순(大順)이라는 정권을 세우기에 이른다.

이자성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같은 해 3월 17일 북경을 함락시키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자살하여 명은 사실상 멸망했다.농민반란으로 흥하고 농민반란으로 망했다 그러나, 북경에 들어가자 병사들의 기강이 풀어져 닥치는 대로 약탈을 일삼는다. 덕분에 이자성의 기반이었던 민심을 잃어버리게 된다.

2.3 허무한 몰락

얼마 후, 청군을 막는 최전방 요새인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장수 오삼계는 청의 실력자 도르곤에게 항복하여 청군과 함께 이자성을 공격하려 내려왔다. 이 때, 오삼계가 거느리고 있던 부대는 명나라에서 최고의 정예 병력이었다.

결국 일편석에서 벌어진 오삼계와 청나라 연합군과의 회전에서 대순군은 참패했고, 이후 이자성은 북경으로 돌아와 성 안에 남아 있는 황금을 모두 긁어 모아서 도망쳤다. 도망치기 전에 칭제를 해서 황제가 되었지만, 이미 패하고 있는데 의미는(...)

이자성이 달아나자, 그를 따르던 부하들도 뿔뿔이 흩어졌고, 이자성은 구궁산(九宮山)에서 최후를 맞는다.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농민들에게 피살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645년 6월, 그의 나이 40세였다.순나라라서 순하게 망했다더라

그러나 그의 시체는 끝까지 발견되지 않아 무사히 탈출해 승려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2.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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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교외의 이자성 동상

국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중국에서는 영웅으로 숭배되는 인물.

하지만 이는 만주족의 국가인 청나라에 반감을 가진 한족 민족주의, 청나라 관점의 프로파간다에 영향을 받은 명나라에 대한 비하 의식, 마지막으로 중국 공산당마오쩌뚱게릴라 빨치산 선호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황건적의 난을 황건기의로 높여 부르고, 태평천국이 중국 근현대의 그 많은 사건중에 유독 연구가 활발하며, 실질적인 군사적 업적은 없는 모문룡이 재평가 받는것도 다 사회주의 국가라 농민반란에 맹목적으로 우호적인 중국의 성향과 마오쩌둥의 개인적인 취향 탓이 크다.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져

이자성은 여러 측면에서 평가해 볼 때, 중국 역사상 흔히 일어났던 민중 반란과 비교해서 특출난 점은 보이지 않는다. 사회 주류에서 밀려난 재야 출신의 지식인이지만, 역사적으로 반란의 주도자 대부분은 홍수전, 황소, 장각처럼 지배계급 출신에 근접한 기반, 지식, 세력을 갖고 있었던 비주류 집단이었던 거에 비하면 평범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반란자'들 가운데서는 식견이 떨어지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세금을 없애겠다'는 턱없는 헛된 공약만 내걸었다가 결국 약탈에 빠졌다는 점에서, "어떤 국가를 세우고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에 대한 국가 비전이 거의 없었던 준비되지 못한 지도자였다. 더욱이 잔존 명나라 최강의 정예군을 지휘하며 산해관에 주둔했던 오삼계를 끌어들이지 못한 실책이나, 결정적으로 이자성은 강대하게 발흥하는 만주족청나라라는 거대한 적을 앞두고 숭정제만 물리치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국제 정세에 대한 식견이 전혀 없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지도자였다. 약 천여년 전에도 상황은 다르지만 비슷한 유형의 군주가 있긴 있었다. 이쪽은 영원히 역적이 되었지만(...)

한마디로 이자성의 통치능력은 반란군실업자두목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명나라 붕괴를 틈타 쳐들어온 청나라의 공격으로 이자성은 신제국을 확고히 하기도 전에 몰락한다.

물론, 이자성의 난은 명나라의 개막장 통치에 원인이 있으므로, 이 사람을 한족의 배신자라고 욕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오히려 이자성은 한족 민족주의 최후의 보루로서 인기가 있는 인물이다. 덤으로, 부패한 조정을 뒤엎은 것도 인기요인이며, 이 점은 조선의 이괄과도 비슷하다.[4]

이자성의 인기는 부패한 나라를 무너뜨린 의적이라는 점, 검증되지 않은 군주들에게 쏟아지는 보상심리가 결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명나라도 청나라도 아닌 폼나는 한족 반란군이라는 점이 그의 인기 요인인 것이다. 정작 이자성은 탕구트족인 이계천이 자기 시조라고 주장했지만 어쨌든, 이자성에 관한 자료는 명청 교체기의 혼란 탓에 기록이 제대로 남지 못하여 신화화되고 윤색된 측면이 강하다는 것도 부정하긴 어렵다.

2.5 기타

조선의 역사에도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줬는데, 이자성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키우던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기 때문. 이 시기에 이자성과 지방의 각종 도적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임진왜란때 처럼 조선에 원군을 보내지 못했으며[5], 결국 강화도가 함락당하고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히자 인조는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으며 청나라에게 항복하고 만다.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지 않고 명나라가 계속 청나라에 집중할수 있었다면 청나라는 섣불리 조선 침략에 10만대군의 몰빵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러했다가 명나라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뒤통수를 치면 본국이 위험할테니. 사실 정묘호란도 이 때문에 청나라가 3만명이라는 적은 군대로 잠시 쳐들어갔다가 급히 돌아왔었던 것이고, 이자성이 없었다면 청이 침략했어도 정묘호란당시 정도의 규모의 군대밖에 보내지 못했을 것이고, 적어도 삼전도의 굴욕까지는 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넷에서 출판된 <중국 도적 황제의 역사>에서 이자성을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한국 영화 신세계(영화)에서 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정재가 연기를 했다.)가 나온다. 이름도 같고 내용도 비슷하다.

무협작가 김용의 소설 설산비호녹정기에서도 그 이름이 나온다. 설산비호에서는 이야기의 근간이 그와 관련되어 있고, 녹정기에서는 오삼계와 반목한 이유가 이자성이 진원원을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나온다.
  1. 특히, 광해군이 인기를 끄는 요인과 비슷하다. 광해군은 지도자로서의 업적이 수준 이하였지만, 전쟁터에서 쌓은 평판, 군사 참모스러운 통치전략만 보고 민중에서 인기를 끌었다. 이런 인물들은 정치 혹은 국가정책의 실패자라는 점조차 민중 사이에서 매력으로 작용하는 편이다.
  2. 오늘날의 우체국과 운송 배달 업체와 비슷하다.
  3. 의 수도인 장안
  4. 둘 다 군사를 일으켜 조정을 뒤엎으나 얼마 못가서 몰락하는데, 이괄이나 이자성은 이후의 왕권에 패배한 자들(각각 한족, 조선군)의 대표로서 일종의 보상심리가 집중되는 인물들이다.
  5. 그나마 명맥상 산둥반도에서 강화도의 수비를 도울 약간의 수병을 보내려고 했는데 이 마저 풍랑 때문에 중단됐다고 한다. 결국 조선은 강화도의 수비를 김경징에게 홀로 맡겨야 했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