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태자

章懷太子 李賢
(654 ~ 684)

당나라의 인물. 장회태자는 사후에 붙여진 시호로 이름은 이현.

태어나서 노왕에 봉해졌다가 657년 2월 12일에 주왕이 되었으며, 660년에는 패왕이 되었다가 671년에 옹왕이 되었고 이름을 이덕(李德)으로 고쳤다.

673년에는 다시 이현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675년 6월 5일에 황태자가 되었다. 장회태자는 학문을 즐겨 후한서주를 지었다.[1] 측천무후의 언니 한국부인의 소생이라 장회태자는 스스로 의심하고 두려워했다.

측천무후가 총애하는 명송엄이 태자는 승계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영왕(이현, 당중종)의 모습과 흡사하고 이윤(당예종)의 상이 제일 귀하다고 했으며, 측천무후는 북문학사에게 소양정범, 효자전을 편찬해 장회태자에게 이를 하사하면서 자주 편지를 써서 나무라자 장회태자는 스스로 편안하지 않았다.

그런데 명승엄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측천무후가 이를 의심했으며, 장회태자는 색을 좋아해 노비인 조도생과 친해 금, 비단을 많이 내려줬다. 위승경이 편지를 올려 간했지만 듣지 않았으며, 측천무후가 사람을 시켜 그 일을 고발하게 했다.

결국 장회태자는 폐위되어 서인이 되어 장안으로 옮겨져 유폐되었으며, 681년 11월 8일에 파주로 옮겨졌다가 684년 3월에 측천무후가 보낸 구신적으로 인해 별실에 유폐되고 그에게 자살하도록 압박을 받자 자살했다.

파주에 유배되었을 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황대과사(黃臺瓜辭, 황대의 오이)라는 노래를 지은 적이 있는데, 이 노래가 측천무후를 분노하게 해서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가사가 이렇다.

황대 밑에 오이를 심었더니(種瓜黃台下)

오이가 익어 열매가 축 늘어졌네(瓜熟子離離)
한 개 따갈 때는 오이도 좋았지만(一摘使瓜好)
두 개 따갈 때는 오이도 드물어지고(再摘令瓜稀)
세 개 따갈 때는 아직 희망이 있었는데(三摘尚自可)
네 개 따가고 나니 넝쿨만 남았네(摘绝抱蔓歸)

  1. 이 장회태자 주석은 2014년에 민음사에서 후한서 본기를 번역하면서 모두 빠짐없이 번역됐다. 번역자는 민음사 대표 장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