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중종

당의 역대 황제
3대 고종 성황제 이치4대 중종 화황제 이현5대 예종 정황제 이단
무주 1대 측천무후(복위) 4대 중종 화황제 이현임시황제 상제 이중무
묘호중종(中宗)
시호대화대성대소효황제(大和大聖大昭孝皇帝)
연호사성(嗣聖, 684년 1월 ~ 684년 2월)
신룡(神龍, 705년 ~ 707년 9월)
경룡(景龍, 707년 9월 ~ 710년 6월)
이(李)
현(顯)
생몰기간656년 11월 26일 ~ 710년 7월 3일
재위기간684년 1월 3일 ~ 684년 2월 26일
705년 2월 23일 ~ 710년 7월 3일
  • 생몰년 : 656년(현경顯慶 원년) 11월 26일 ~ 710년: (경룡景龍 4년) 7월 3일 (54세)
  • 재위기간 (5년 184일)
    • 당의 황제(1차) : 684년 1월 3일 ~ 684년 2월 26일 (54일)
    • 당의 황제(2차) : 705년 2월 23일 ~ 710년 7월 3일 (5년 130일)

중국 당나라의 제 4대 황제. 본명은 이철(李哲).후에 이현(李顯)으로 고쳤다. 당고종의 7번째(혹은 9번째) 아들. 측천무후의 3번째 아들. 묘호는 중종. 시호는 대화대성대소효황제(大和大聖大昭孝皇帝)로, 줄여서 화황제(和皇帝).

어머니 무후가 윗 형 2명을 죽이거나 폐위시켜 버려서 운 좋게 황제가 된 케이스. 하지만 그의 인생도 결코 순탄치 않았으니.. 일생동안 2번 황태자가 되었고, 2번 황제가 되고, 2번 모두 편하게 황제자리를 마치지 못한 가공할 기록의 소유자였다.누군가가 떠오른다면 기분탓이다 걔는 황제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으니까 기분탓 맞다.

따져보자면 할아버지(당태종)는 유명한 황제, 아버지(당고종)도 황제, 어머니(측천무후), 남동생(당예종 이단)도 황제라는 압박적인 가계도를 갖고 있다. 본인이 사망한 뒤엔 아들(당상제 이중무), 조카(당현종 이융기)도 황제로 즉위했고. 더군다나 아내인 위황후와 딸 안락공주, 여동생 태평공주도 황제가 되려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1 어머니와의 관계

중종은 천성이 순하여 어머니 말을 잘 따랐다고 한다. 바로말해 마마보이. 683년 12월 당고종이 사망하자 앞에서 말한대로 태자에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2달(정확히는 36일 혹은 54일) 만에 쫓겨나게 되니, 그것은 아내 위황후의 부탁을 받고 장인인 위현정을 시중으로 발탁하려하자 그 날로 폐위되어 왕으로 강등 되었던 것이다.[1]

이후 방주로 귀양을 가고, 곧 어머니 무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중종 복위"를 내세우는 반란이 빗발쳤다. 그는 이제 어머니에게 독살될까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면서 차츰 자신의 아내 위황후한테 의지하게 된다. "제2의 어머니"가 생긴 셈이다.

698년, 다시 무후에 의해 도로 태자로 책봉된다. 중종은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라고 두려워하여 스턴 되었다.[2] 이런 그를 부축하여 낙양까지 오게 한 것도 위씨. 이것은 무후가 갑자기 모성애나 미안한 감정이 들어서 그런건 결코 아니고, 사실 무승사나 무삼사 같은 친족을 태자로 책봉하려다가 신하들의 반대에 의해 타협점으로 중종을 고른 것이었다.

여하간 705년, 무후가 쇠약해지면서 재상 장간지의 반정으로 양위를 받고 다시 제위에 오른다. 자, 이제 드디어 왕권을 세울 기회(라고 쓰고 마음대로 할 기회라고 읽는 것)가 온 것이다.

그러나...

2 아내와의 관계

이번에는 그의 어머니를 닮고자 하는 "제2의 어머니"가 문제였다. 위황후가 제2의 어머니를 넘어서 제2의 측천무후가 되려고 한 것이다. 이래서 선례가 무서운 것이다.

위황후는 무측천의 조카인 무삼사와 정치적으로 손을 잡은 정도가 아니라 그의 애인이 되었다. 한마디로 대놓고 간통했다. 그러나 딸인 안락공주는 무삼사의 아들인 무숭훈과 결혼시킨다. 무삼사는 자주 위씨, 중종과 함께 담소를 즐겼는데 용상 위에서 위씨와 서로 손을 만지며 도박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도 중종은 같이 즐기면서 헤헤거리며 보고만 있었다.(...) [3]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삼사가 죽은 이후에는 정식으로 애인을 두었고, 중종도 이를 용인했다. 이번에도 무후가 남자 첩들을 고종 사후에 거느렸던 것을 선례로 삼았던 듯하다. 그래도 무후는 당고종이 죽은 후에 다른 남자를 애인으로 삼았다는데...

3 딸과의 관계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7녀인 안락공주 이과아는 방주로 귀양가는 도중에 길에서 낳은 아이였다. 이렇기 때문에 중종과 위황후의 사랑이 매우 각별했으며, 오냐오냐해서 키웠다.[4]

덕분에 나중엔 아버지를 돕겠다며 황태녀의 자리를 요구했다. 중종은 거절했으나[5] 이 때부터 안락공주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증오로 바뀐다. 이건 무슨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710년. 즉위 4년차를 맞은 중종에게 떡이 하나 배달된다. 그 다음은 안봐도 비디오. 중종은 독살되고 아들 이중무가 즉위한다. 물론 위황후안락공주의 꼭두각시로, 이들 모녀가 손을 잡고 중종을 죽였다.

한마디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세 여자인 어머니, 아내, 딸이 모두 그의 편이 아니었다는 것. 중종은 그 사이에서 효자, 현부(賢父), 양부(良夫) 노릇만 했다. 얼마나 어질었는지(아니, 얼이 빠졌는지) "아내를 무서워하는 것도 좋은 일. 밖에는 배담이 있고, 안으로는 이씨 늙은이가 있구나"라는 노래를 기생이 불러도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위황후는 그 기생에게 상을 내렸다.(...)

4 그의 정치

그럼에도 그는 이런 단란한 가족을 상당히 좋아했는지, 정치에도 "가족같은 분위기"를 중시했다. 대표적인 예로, 그는 토번에게 뇌물 수수 혐의를 받은 재상을 고발한 어사를 재상과 결의 형제 맺게하여 "그리고 모두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식으로 해결을 보았다. 이건 뭐(...).

그는 아내와 딸, 그외 친족이나 외척이 자기 세력 인물의 벼슬을 요청할 때마다 재꺽재꺽 들어준 덕분에 말년에는 조정에 앉을 자리도 없을 정도로 관리가 많게 되었다. 또한 마구(격구)를 좋아하여 경기보는 것을 즐겼고, 궁내에 모의시장을 만들었다.

궁내의 모의시장, 관리의 지나친 선발, 황제 등극 이전의 궁핍했던 생활을 등극 이후 한풀이 했다는 점에서 후한의 영제와 비슷한 필이다. 이런 데도 당이 멸망하지 않은 것이 참 신기할 정도..[6]

중종은 중풍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다. 독살설은 후에 위황후, 안락공주 등을 처단하고 즉위한 당현종이 이들을 매도하기 위해 내세운 근거라는 것이다. 위황후&안락공주 모녀가 중종과 사이가 나빴다는 말이 없으니 딱히 중종을 죽일 현실적 이유가 없었고, 실제로 사서 어디에도 "죽였다"라는 말 이외에 근거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뭔가 있다는 이야기인데... 믿거나 말거나.

5 가족관계

황후 : 화사황후 조씨 - 고조의 딸인 상락공주(常樂公主)의 딸로서 중종에게는 종고모뻘이다. 중종이 영왕 시절에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상락공주가 측천무후의 미움을 받게 되자 조씨는 이에 연루되어 폐위되고 이후 죽임을 당했다. 이후 중종이 죽고 위후마저 폐위되자 중종의 위패가 홀로 태묘에 모셔지는 것이 민망하다 하여 그녀가 황후로 추봉되어 태묘에 부묘되었다.

계후 : 폐황후 위씨 - 위현정과 박릉최씨 사이의 딸이다.

  1. "내가 천하를 전부 위현정에게 준다 해도 큰일 날 것이 없다"라고 말했으니 폐위될 만도 한가?
  2. 이전부터 무후가 이따금 보낸 위로 사신이 오면 항상 그랬다고 한다.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
  3. 사실 공식적으로 통정했다는 기록은 없다. 추측만이 있을 뿐. 그러나 여러번 사통한 적이 있다고 거리에 삐라가 뿌려지기도 했고 실제로 위황후랑 무삼사는 매우 친밀했다.
  4. 언젠가 황제 소유의 호수를 달라고 해서 거절하자 자기 재산으로 그 호수를 더 능가하는 호수를 팠을 정도였다.
  5. 사실은 다음 날 재상한테 문의했더니 "그럼 부마에게는 뭐 시키려구요? 태녀부(太女夫)?"라는 답변을 듣고는 "재상이 안 된다고 하더라" 식으로 얼버무려버린다. 훗날 재상이 타겟이 되어 죽는 것은 물론이다.
  6. 이건 그만큼 어머니 무후가 정치를 잘했다는 말도 된다. 거기다 중종이 재위기간이 길지도 않았고, 나중에 무법자 아내와 딸은 조카와 여동생에게 숙청당한데다, 비슷한 성격의 남동생 당예종도 얼마 안가 아들이자 중종의 조카인 현종에게 위를 물려줬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