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

무주의 역대 황제
당 5대 예종초대 성신황제 무조(복위) 당 4대 중종
시호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
무조(武曌)
생몰년도624년 2월 17일 ~ 705년 12월 16일(81세)
출생지당 이주(利州)
사망지당 장안(長安) 상양궁(上陽宮) 선거전(仙居殿)
재위기간당의 황후654년 10월 13일 ~ 683년 12월 27일(29년 15일)
당의 황태후683년 12월 27일 ~ 690년 10월 16일(6년 293일)
여황제690년 10월 16일 ~ 705년 2월 22일(14년 129일)
당의 태상황705년 2월 22일 ~ 705년 12월 16일(9개월 23일)
즉위식690년 10월 18일
장례식706년 5월

1 개요

무후행종도(武后行從圖), 장훤(張萱), 당나라

則天武后. 중국 당나라 초기의 인물. 당고종의 2번째 황후이자, 당중종, 당예종의 어머니. 그리고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이자[1] 중국 최고의 여걸.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최고의 여걸 중 하나다. 이 정도의 권력을 손에 쥔 여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야말로 살아서는 최고의 권력자요, 죽어서는 역사의 전설이 된 사람. 시호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

이 평가에 대해선 대체로 별다른 이견이 없다. 누가 뭐래도 여자로 태어나서 나라를 치맛자락으로 주무른 여자들은 있었지만, 자기가 황제로 즉위한 사람은 무측천이 유일하다. 게다가 여자가 황제로 즉위했는데도 노쇠할 때까지 아무도 들고 일어나지 못했으며, 신하들의 거사가 성공한 다음에도 그들의 뜻을 따라 유일의 여자 태상황제로서 천수를 다한 것을 보면 그녀의 무서움을 더 잘 알 수 있다.

중국 역대 황제들 중 최고령(68세)으로 제위에 오른 황제이기도 하다. 30살에 황후가 되어 80살에 죽을 때까지 권력을 계속 가지고 있었으니, 그녀의 생애 80년과 치세 50년이 당의 전성기의 살아있는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이름은 무조(武照). 영어로 쓸 경우 무측천(Wu Zetian)으로 쓴다. 황제로 즉위 후 照와 발음이 같은 曌로 개명한다.[2] 제명은 측천금륜대성신황제,(則天金輪大聖神皇帝) 약칭 성신황제(聖神皇帝)이다.

그러나 후세의 사가들은 졸렬하게도 유교적인 관점에서 여자인 성신황제의 기록이 공식적으로 사서의 한 켠에 황제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탐탁해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의도적으로 공식 제명보다는 무측천(武則天), 측천무후, 측천여제 등의 명칭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 생애

2.1 초기

당고조 이연을 도운 개국공신이던 태원군공 무사확(武士彠)의 차녀로 태어나서 637년 당태종후궁으로 입궁하게 된다. 당시 후궁으로서 받은 지위는 정5품에 해당하는 재인(才人)이며, 태종에게서 별명을 받아 이후 본명보다는 거의 '무미랑(武媚娘 무씨 성의 예쁜이)'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당시 성격을 잘 드러내는 일화가 있는데, 당태종이 당시 궁궐에 새로 들여온 말이 하도 사나워서 아무도 길들이질 못해서 곤란해 하고 있을 때 무후가 나서서 자신이 저 말을 길들여보겠다고 하였다. 태종이 방법을 묻자

1) 쇠 채찍으로 때려서 기를 죽인다.
2) 쇠 채찍이 안 되면 쇠몽둥이로 때려서 길들인다.
3) 정 안 되면 단도로 목을 찌른다.

섬뜩

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태종은 이에 감탄했다고. 흠좀무. 하지만 무후는 똑똑하고 재치는 있으나 너무 성격이 활발한 탓에 태종이 총애하지는 않아 그가 죽을 때까지 처녀였다고 한다.[3] 무서운 아이!!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렇다. 새로 들어온 말이 사나운 것을 보고 당태종이 대장군인 울지경덕에게 말을 타보라고 했는데, 실패하고 몇 번씩 말에서 떨어지자 사람들이 박장대소했다. 이 자리에 무후가 나서서 쇠 채찍, 쇠몽둥이, 단도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에 당태종이 "그러다간 말이 죽을 텐데 아무리 사나운 말이라도 죽이는 것은 지나치지 않으냐??"라고 하자, 무후는 "폐하의 장수들은 모두 폐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충신들입니다. 말이 멋대로 날뛰면서 대장군을 다치게 했는데 어찌 말 한 마리를 아끼겠습니까??"고 대답한다. 이는 당태종이 울지경덕을 가볍게 웃음거리로 만든 것을 은근히 비판한 것으로, 당태종은 크게 감탄하며 무후를 존중하게 되었지만 총애하게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당태종이 사망한 이후에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서 출가해서 비구니로 지내게 되었지만, 태종의 9남인 고종의 명으로 정2품 소의(昭儀)로 복귀되어 651년 다시 환궁했다.

2.2 황후가 되다

이 무렵 당고종의 부인인 황후 왕씨[4]와 후궁인 숙비 소씨의 사이에서 암투가 있었는데, 왕황후는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해서 당시 당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무소의를 이용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왕황후와 소숙비를 모두 제거하고 655년 새로운 황후로서 즉위하게 된다.

또한, 황후가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문이 한미한 것을 탓하며 이를 반대했던 장손무기저수량 등의 쟁쟁한 원로대신들을 정치공작을 통해 모조리 죽이거나 귀양 보내며 그 정치적 두각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장손무기와 저수량 등은 선제였던 당태종을 따라 국난을 수차례 해결하고 황제 못지않은 권력을 쥐었던 무서운 인물들이다. 게다가 나약한 당고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그 위세가 가히 황실을 쥐고 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한 자들과 정치적인 대결을 벌여 제거해버린 일은 측천무후의 무서운 정치적 역량을 드러내는 예이다. 하지만 황후가 된 직후인 측천무후에게 정치적 실권이 컸다고 보기는 어렵다. 장손무기 등의 숙청은 측천무후를 황후로 삼고자 하였던 당고종의 뜻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담으로 소숙비는 죽기 전에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고양이로 태어나겠다. 그래서 로 다시 태어난 너를 물어 죽여주마!!"라고 무후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때 아무 이유 없이 쥐로 환생할 거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하는 일부 역사가들은, 무후의 생년을 쥐띠 해에 맞춰 628년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그 때문인지 측천무후가 살아있을 때는 고양이를 황실에서 키우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귀신이 되어 복수하겠다!!"라는 말에 죽인 다음 시체의 사지를 잘라 술독에 담갔다. 일설로는 산 채로 사지를 잘라 술독에 담갔다고도 한다. 그 후에 "술 취한 귀신이 과연 날 찾아올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덧붙여 당고종이 왕황후를 쫓아내고 무후를 황후로 삼은 결정적인 이유는 무후의 딸이 황후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라는데, 과연 왕황후가 정말로 무후의 딸을 죽였는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후가 황후를 몰아내기 위해 모함했다는 쪽으로 중론이 쏠려 있다. 무후의 딸은 단순히 유아돌연사했을 뿐이고, 그 시기가 하필 왕황후의 방문 시기와 맞아떨어져 황후가 누명을 썼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무후가 직접 아이를 죽였다는 주장도 있다.(…)

3 천하를 손에 쥐다

정치적으로 정력적인 편이 아니었다는 당고종은 무후에게 정치적으로 많이 의존했다고 한다. 당고종의 신임을 얻어 정치적인 힘도 얻게 된 무후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대신 장손무기, 저수량, 우지녕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 공신 가운데 살아남은 건 이세적 정도. 그러나 이세적 또한 사후에 손자인 이경업이 측천무후에 대항하여 모반을 꾸미던 것이 진압되어, 그 시신도 무덤에서 끌려나와 산산이 분쇄되어 바람에 날려 버리는 형벌을 받았다.

656년 측천무후는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李忠, 643~664)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 이홍을 황태자로 앉히나, 그 역시 곧 죽었다. 십팔사략에서는 소 숙비의 두 딸이 유폐되어 시집을 못 간 것을 자기가 주선하여 보내겠다고 하자, 그것이 측전무후의 심기를 건드려 무후가 독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홍의 사후, 당고종과 무후는 크게 슬퍼하며 이홍을 의종(義宗) 효경황제(孝敬皇帝)로 추존했다. 아들이 부모를 추존하는 일은 흔하지만 부모가 아들을 추존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보기 드문 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황태자가 된 뒤 과로사 했다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그러자 자신의 차남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 십팔사략에 기록에 따르면 당고종과 한국부인(무후의 언니)의 불륜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한다. 그 때문이었을까, 680년에 어머니의 숙청에 불만을 품자 폐위되고 3남 이현(李顯)을 황태자로 세웠다. 이것이 바로 훗날의 당중종이다.

이 와중에 672년 당고종이 병으로 인해 정사를 보지 못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대신 정치를 했으며, 675년엔 아예 수렴청정을 선언한다.

당고종이 죽은 후 황태자 이현이 당중종으로 제위에 오르나 중종의 아내 위황후와 그녀의 친정아버지 위현정이 정권을 장악하려고 하자 중종을 여릉왕으로 강등시켜 내쫓고[5] 무후의 4남인 상왕 이단, 즉 당예종을 즉위시켰다. 이후 계속해서 일어난 반대파들의 저항과 반란을 진압하고 무후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684년의 이세적의 손자인 이경업(서경업)의 난이다.[6]

그리하여 690년, 무후는 예종을 물리치고[7] 드디어 제위에 올라 국호를 (周)로 고치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긴다. 그래서 이 시대를 무주시대, 즉위를 무주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8]

드디어 여성 황제의 시대가 출연한 것이다.

3.1 공포정치 속의 태평성대

무후는 반대파를 매우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당시 사회가 어떤 사회였냐면, 사궤(四軌)라는 투서함과 불량배, 건달들을 중심으로 한 비밀경찰 혹리들을 바탕으로, 상대의 비리를 먼저 고발하는 사람이 빠르게 승진하는 밀고정치 사회였다.

백성들은 몰라도 조정 신하들 입장에서는 마녀사냥이 열리는 수준(…)이라 조정에 출근할 때면 가족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무사히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양 크게 기뻐했다고 할 정도였다고. 오늘도 무사히 하지만 지나친 고발로 인해 자신의 인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무후는 정적들이 거의 제거되었다고 생각하자마자 그동안 수족처럼 부리던 내준신과 색원례 등의 혹리들을 차례로 없애 이들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던 백성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그야말로 토사구팽. 미래의 강철의 대원수보다도 진보된 숙청능력

외척가문인 무씨들은 그야말로 세도를 누렸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전한 여후이래 최초였을 정도. 측천무후는 조카무승사에게 제위를 넘기려고 했으나 조카가 당신 제사를 안 지내줄 텐데? 믿을 건 아들 뿐이라는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고 한다. 무후가 다스린 시기는 당태종에 버금가며 이후 현종 때 맞이한 당나라의 전성기를 불러오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거제도가 정착되고 당나라의 도자기가 그 특징을 확립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다. 적인걸, 장간지 같은 뛰어난 재상들이 등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일처다부제가 실시되었다.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었다.

3.2 몰락과 마지막, 그리고 역사의 전설로 남다

하지만 699년 이후 측근들로부터 폐단이 발생했으며, 705년 병으로 눕자 주위에서 물러나라는 압박을 받아 당시 황태자로 있었던 아들 이현(중종)에게 양위했다. 이로 인해 당나라는 다시 부활했다.

놀라운 것은 황제자리가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타는 것과 동일시될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황제자리에 오른 사람은 퇴위할 경우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데다가 대숙청도 보너스로 딸려오는 것에 비해, 신하들의 거사가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을 부활시키고 태상황제로 물러나면 더 이상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선에서 끝난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무후가 이미 병이 깊어서 오래 살지 못한 것을 알았던 것인지 아니면 무후가 생각보다 나라를 잘 다스려서인지는 몰라도. 며느리 위황후였으면 You are dead 확정

사실 이는 측천무후가 당중종과 당예종의 모후이자 당현종의 친조모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나라의 입장에서 측천무후는 당을 멸망시킨 역적이기도 하지만, 당 부활 이후 황제들은 예종의 직계로 다 측천무후의 후손이다(...) 전 황제이자 모후를 죽이는 것은 아무래도 이후 들어선 신 정권이 패륜이라는 부담을 쓸 수도 있었던 데다가 이후 황제들이 역적의 자손이라는 정통성 시비까지도 벌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측천무후의 처단에 신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권좌에서 물러났다는 충격이 컸는지 그 해 말 무후는 황후로서 장례를 치르고,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등의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고 한다. 만력제의 대선배 일설에는 '나는 이 나라의 황제다.'라는 말을 남겼다고도 한다.

원래는 당나라를 멸망시킨 역적이나 요녀로 볼 수 있으나, 두 아들의 자손들이 모두 당나라의 황위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태묘에 모셔져 제사를 받을 수 있었다.

4 평가

4.1 내치의 경우

사실 측천무후 역시 몇몇 여성 지도자들처럼 사망한 후 반대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긍정적인 면은 거의 감추고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켰다는 평이 많다. 그럼에도 특히 측천무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상이 매우 강하다. 가장 큰 이유는 잔인한 숙청과 공포정치 때문이다.

그러나 관롱집단의 위력을 강조하는 이들에 따르면 무후의 잔인함은 자신의 성격보다도 당시 시대 상황이 측천무후의 성향과 맞물린 선택이었다는 주장도 상당하다.

4.1.1 관롱집단의 위험성

관롱세력의 위협을 강조하는 이들에 따르면, 애초에 남북조시대부터 이어져온 거대세족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고, 당은 모양새만 한족 국가인 사실상의 호한 연합 정권[9]으로서 들어온 것이다. 애초에 당 왕조의 전신이었던 가 허망하게 무너진 결정적 이유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을 위시로 한 거대세족(관롱집단)들의 반발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세족을 숙청하는 일은 당 왕조의 흥망이 걸린 중대사였다.

정관의 치라고 추앙받는 당태종의 시기에도 장손무기 등을 위시로 한 세족들의 힘은 여전히 강력했다. 이들을 속칭 무천군 군벌이라고 부르는데, 명신으로 칭송받는 위징조차 그런 세력들과 인척을 맺으며 신경을 쓸 정도였다.

당태종 말년부터 당의 정치체계가 문란해지기 시작했으며, 당태종의 정관의 치에도 불구하고 중원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생산력 또한 수문제 양견 시절의 번영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면이 있었다. 게다가 당고종 이치 또한 강인한 성격이 못 되어, 측천무후에게 숙청과 부패의 척결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숙청이 피비린내 난다고 하지만 제왕에게 요구되는 점에는 비정함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걸 상기하자면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 시점에 강인한 성격의 측천무후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4.1.2 고종의 무후 기용 설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의 당고종의 역할에 대해서 재평가를 하는 이들도 많다. 실제로 당고종이 체력적으로 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런 세력도 없는 측천무후가 당고종의 협력관계 내지는 동조 없이 무천군 군벌을 등에 업은 황후를 몰아내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는 것.

때문에 숙종장희빈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측천무후가 고종을 쥐고 흔든 것이 아니라 고종 입장에서 무천군 군벌 정리를 위해서 측천무후를 기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무천군 군벌 축출은 측천무후의 입궐과 거의 동시에 이뤄지기 시작하는데, 이때는 측천무후가 자기 앞가림하기 바빴던 시절이다.

그리고 당고종이 살아 있는 동안 측천무후는 절대 주도적으로 나선 적이 없는 것도 분명하다. 다만 당고종의 경우는 워낙 체력이 약해서 수시로 쓰러졌기 때문에 사실상 고종과 측천무후의 협치에 가까웠는데, 사실 이것도 수나라 문제가 보여준 장면이었다. 수와 당 초기처럼 북방계통의 직접적 영향력 아래 있을 때나 종종 보이는 모습이다.

이후 당고종이 상자의를 통해 무후를 폐위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상자의가 잘리고 무후가 당고종을 협박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도 당고종이 무후의 목줄을 부여잡은 것이지 어디까지나 제1권력은 당고종에게 있었다. 더욱이 당고종이 그 당시 골골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왕권의 진공상태를 고려한 조치일 수도 있는 것. 무후는 이후 당고종에게 한동안 허리를 굽혔다.

게다가 당고종 시기에도 측천무후의 포지션은 어디까지나 현명한 황후이자 보조자에 불과했던 탓에 고종의 첩들을 자신이 화가 난다고 죽일만한 세력이 아니었으며, 결정적으로 죽였다는 첩들 외에도 고종에게는 여러 첩들이 존재했다. 근데 일단 죽였다는 게 문제 아닌가. [10]
고종 사후에야 여러 남첩들을 들였으나 그들이 정국을 쥐고 흔들만한 권력을 소유했다는 증거는 그다지 없다.

4.1.3 숙청의 불가피성

이런 입장에서 보면 측천무후는 로마 제국티베리우스, 청나라옹정제처럼 특권계층의 권리와 힘을 숙청을 통해 제어하며 국가의 재정건전성을 끌어올리고, 동맥경화 현상을 보이는 기존의 주류세력을 대신하여 신진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수수하고 그 시대에 인정받기 힘들며 그 시대 주류층과 권신들에게 군주에 대한 인기를 크게 상실하게 만드는 일이지만 국가를 위해서라면 누군가는 반드시 해주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11][12]

당의 사실상의 창건자가 당태종이고, 고종시절부터 무후가 권력을 잡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후는 실질적인 당의 3대 황제가 된다. 그리고 대략 3번째 군주 때까지의 내정수립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는 걸 생각하면[13] 측천무후의 숙청을 통한 공포정치는 시대의 필수적인 요구라고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측천무후가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는 말도 사실과 다르다. 무후의 권력은 고종 사후 신하들에게 여러 번 도전을 받아야 할 정도로 절대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황후라는 위치를 최대한 부각시켜야 권력유지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측천무후에게는 정치적 배경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고종과의 연계가 되지 않으면 그나마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훗날에야 절대 권력에 걸맞은 권력을 쥐게 되나 그 시기가 700년 즈음으로 무후통치기의 말년 중의 말년에 해당되는 시기. 또한 혹리들도 고종이 죽은 683년부터 즉위하는 690년까지만 활동했을 뿐, 즉위 직후에 대부분 숙청했으니 측천황제의 시대가 "공포정치"라는 것은 좀 거리가 있다.

게다가 측천무후를 까는 또 한 가지의 요소인 "음탕한 년" 혹은 "요녀"로써의 이미지도 과장된 것이 많다. 특히 측천무후가 죽였다고 하는 사람이 공식기록상에서는 살해된 후에도 버젓이 활동하는 기록이 남아있는 등 여러 사료를 교차비교해보면 말이 안 되는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

4.1.4 과거제도와 비관롱집단 양성

과거제도의 완성이자 왕권의 강화책인 전시를 역사상 최초로 시행한 것도 측천무후이다. 측천무후는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 방식인 과거제도의 전시 시도와 더불어, 인재등용을 위한 여러 가지 파격적인 제도를 제시하여 시행하였는데. 첫째, 스스로를 추천하는 자거(自擧) 제도를 처음으로 열었다. 이 제도가 시행됨으로써 천하의 인재들이 출신을 불문하고 모두 능력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추천했고, 합격하면 바로 채용되었다. 둘째 무거(武擧) 제도를 시행하여 유능한 무관을 선발했다. 셋째 시관(試官) 제도를 시행하여, 관리의 소질을 보증할 수 있도록 했다. 넷째, 측천은 사회 최하층까지 사람을 보내 인재를 선발했다. 하층에서도 당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가 여럿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제과(制科)를 개설하여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재를 선발했다. 여섯째, 관원들이 유능한 인물을 추천하는 것을 장려했다.

이때 뽑혀서 측천무후의 친위집단이 된 것이 북문학사(北門學士). 북문학사의 유래는 원래 관리가 궁궐에 입궐할 때,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하는 궁궐 남문으로 입궐하여 정사를 논하는 것이 원래 예법이었는데, 북문을 통해 몰래 측천무후의 정치적 브레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칭하는 단어가 바로 북문학사였다. 더불어 훗날 "개원의 치"로 칭송받는 당현종의 치세를 이룩하게 한 기본적인 시스템과 요숭, 송경 등의 인재풀은 사실상 측천무후가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왕위계승에서 태평공주가 아닌 당현종을 지지한 게 바로 이 신진 비관롱집단이었다. 이런 면에서 측천무후는 최소한 용인과 정치력 자체는 발군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전시는 중종의 복벽으로 폐지되는 바람에 전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북송대에야 이루어졌다.

선임황제를 폄하하여 자신의 능력을 드높이려는 후임황제의 욕망,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이 권력을 잡았다는 점과 이후 다시 권력을 회복한 관롱집단이 사서의 편찬을 주도했기에, 그녀의 평가는 나쁠 수밖에 없다는 가정도 많다. 왠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이야기 같지만

이 때문에 예전까지는 여후, 서태후와 더불어서 중국 역사상의 3대 악녀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측천무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최근에는 무후 대신 가남풍이 들어가기도 한다.

4.2 비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후의 긴 치세는 여러 문제점을 남겼다. 우선 새로 뽑힌 신진집단이 무후의 개인숭배를 위해 사용되었으며, 부병제를 비롯한 당나라의 여러 병폐가 치유된 것도 역시 아니었다. 후계를 튼튼히 할 수 없었다는 여제의 태생적인 한계 탓에 측천무후 사후 나라는 다시 한 번 계승문제로 혼란에 시달려야했다.

게다가 측천무후의 가장 큰 실패는 외치에서 있었다. 당의 외치정책인 기미지배체제의 붕괴가 일어난 것이었다.

4.2.1 외치의 경우

측천무후는 비교적 성공적인 내치에 불구하고, 외치에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정확히는 최대강역을 이룩한 고종 사후부터가 문제였다.[14]

무후의 시대는 가르친링토번에게 크게 시달리고, 북방민족과 수없이 투닥 거렸지만 대체적으로 영향권과 영토가 크게 축소되는 양상을 보였다. 682년에는 돌궐 제2제국이 골돌록가한(일테리시칸)에 의해 부활했으며, 691년에는 묵철가한이 즉위해 쿠차](사주)와 돈황(안서도호부)를 위협했다. 특히 696년 거란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40만 대군을 파견했음에도 이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고, 돌궐의 지원을 받아 겨우 진압했다.

또 거란의 반란을 틈타 나라 세우겠다며 이주하던 대조영을 추격하지만 대패, 발해의 건국을 허용해야 했고, 거기다 698년 돌궐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바람에 거란이 재 독립하고 이로 인해 요동 및 요서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도 했다. 45만 대군으로 돌궐을 재 정벌을 기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단순히 황제 재위시의 실정만 따져 봐도 가르친링에게 연속으로 대패함으로써 토번이 당나라와 대등한 힘을 갖는 결과를 만들었고, 돌궐의 카파간 카간(묵철가한)이 세력을 키우는 것을 방치했으며, 심지어 당시 국가의 기틀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대조영에게까지 패함으로써 기껏 이전의 황제들이 수많은 병력과 물자를 쏟아내어 멸망시킨 고구려의 후신 국가인 발해를 부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당은 가르친링에게 두 번의 대패를 겪음으로써 첫 패배 때 10만, 두번째 패배 당시에는 40만이 넘는 병력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 결과로 당나라의 군사력은 크게 악화되었다. 이때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냐면 이후 돌궐이 하북 지방을 짓밟고 한때 황하를 넘어 산둥지방까지 약탈할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보이는데 당나라는 이때 전혀 손을 쓰지 못한다.

이렇듯 그녀의 치세에 있어서 당나라는 북방, 요동, 티베트 지방에 있어서 위협 세력들이 커지는 것을 전혀 막지 못했으며, 이는 당나라 주도의 이민족 지배를 상징했던 기미지배체제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결과적으로 당태종~당고종 대에 이어 쌓아온 외치 부문의 업적들을 죄다 말아먹어버린 것이다. 즉 내정에 있어서는 괜찮은 군주였을지 모르나 외정과 군사적인 업적에 있어서는 무능한 인물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

5 가족과 후일담

당고종과의 사이에 어렸을 때 돌연사한 공주, 이홍, 이현, 당중종, 당예종, 태평공주의 4남 2녀의 자식이 있으며, 손자/손녀로는 예종의 아들인 당현종과 중종의 딸인 안락공주 등이 있다.

중종과 예종을 보자면 어째 고종과 측천무후의 아들들은 어머니 측천무후에게 눌려 있었던 탓에 이후에도 기를 잘 펴지 못한 건가 싶을 정도로 황제답게 혼자 정권을 쥐고 있던 시간이 길지 않은 편이다(…). 측천무후의 장남인 이홍의 경우 일설에 의하면 어머니의 뜻을 자주 거스르다가 독살 당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차남 이현의 경우 역시 어머니에게 밉보였다가 쫓겨났다.

삼남 중종은 예전부터 유약했다고 하며, 복위한 뒤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정사를 처리하는데 아내 위황후에게 의지했다. 이런 아들들에 비해 중종의 딸이자 측천무후의 손녀인 안락공주나, 무후의 막내딸 태평공주는 권력욕이 강했다고 한다. 안락공주는 어머니 위황후와 손을 잡고 자기 친아버지인 중종을 만두로 독살했을 정도.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태평공주는 성격이나 재능 면에서 측천무후와 닮은 점이 많아서 측천무후가 특별히 아꼈다고 한다. 그러나 태평공주가 중종보다 자기가 황제에 어울린다며 황태녀 자리를 요구하자 "네가 뛰어나다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러나 또 여자가 황제가 되려면 신료들을 또다시 대숙청해야 할 텐데, 나도 그렇게 황위에 올랐지만 그건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 그럼에도 세도는 남아있어 사남 예종이 복위한 건 여동생 태평공주와 후에 당현종이 된 아들 이융기 덕이 크며, 그가 재위한 동안은 거의 태평공주가 정국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15] 무후의 판단은 적중하여 태평공주는 결국 나중에 황제로 즉위한 조카 이융기와 암투를 벌이다 져서 자신은 물론이고 일파까지 대숙청당했다.

이후 현종은 할머니의 치세를 바탕으로 개원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열었지만, 웃기게도 현종 말년부터 당나라는 서서히 망조가 들기 시작하는데... 자세한 설명은 당현종 항목을 참조.

6 그 외에

측천문자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는데, 완전 다른 문자를 만들어낸 게 아니고 그냥 한자의 제작 원리에 따라 만든 글자, 즉 한자 몇 개 더 만든 셈이다. 이들 문자는 기존 한자보다 획수가 더럽게 많고 복잡한 경우가 많아서 측천물후 시기가 끝난 뒤로 사멸해 갔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을 참조.

스스로를 노자의 후손을 자처하고 도교를 숭상한 당나라와 달리 측천무후는 불교를 숭상했다. 이에 한몫을 거든 건 그의 내연남인 풍소보로, 미륵신앙을 이용해 측천무후를 떠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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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로 낙양 근처에 있는 용문석굴의 대불은 측천무후의 얼굴을 본따 만들어졌다고 한다. 확실히 위압감이 느껴진다.

유달리 문자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여 명칭을 갈아치우는 것을 상당히 즐겼다. 3성 6부를 근간으로 하는 당의 관제는 그대로 두고 이름만 바꾸는가 하면 정적들의 성씨를 나쁜 뜻의 글자로 고치기도 했다. 보통 황제들의 시호는 한 글자 또는 두 글자가 일반적이었으나 무후가 집권하면서 고조와 태종, 고종의 시호를 대폭 늘리는 바람에 시호 인플레(…)가 벌어져 당나라부터는 부득이 묘호연호로 황제를 통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15년도 채 되지 않는 재위기간 동안 연호를 14차례나 바꾸어 역사가들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측천무후는 미각이 뛰어났다고 한다. 재위 시절 중, 민가에서 엄청나게 큰 가 나와서 그녀에게 진상했을 때, 측천무후는 황실 요리사에게 무를 이용한 요리를 만들라고 명했다. 요리사는 무를 채 썰어 녹두가루를 묻혀 볶은 후, 오징어, 새우, 살코기를 넣어 측천무후에게 바쳤다. 이 요리를 그녀가 '가연채'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식습관과 연관이 깊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비타민무기질이 많이 들어있는 식품을 많이 섭취했으며, 으로 만든 음식을 즐겨 먹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측천무후와 관련된 일화 중, 용수나무에 관한 일화가 있다. 측천무후가 어느 날 가마를 타고 산책을 나갔을 때, 비가 갑자기 엄청나게 쏟아져서 시종들이 모두 무척이나 당황했다고 한다. 그 때 측천무후는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거대한 용수나무를 보고 비를 피했다고 한다. 그 때 그녀는 무언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듯, 용수나무 앞에 향을 피우고 "어느 날 뿌리가 마르고 손님이 주인이 되리라"라고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진짜 이씨 왕조 대신 무후가 황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측천무후는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후 모든 사찰에 용수나무를 심고 받들라 명했다고 한다.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는 큰 재미를 못 보다보니, 재미있게도 최초의 판다 외교를 시도한 인물로서 알려져 있다. 측천무후는 2마리의 판다를 일본에 선물로 보낸다. 요동(발해), 동(대신라), 서(토번), 돌궐(북)까지 당나라의 군사 영역이 크게 축소되다 보니, 동부의 신라와 발해를 견제함과 동시에 외치의 안정을 취하려고 했던 것이다.[16]

7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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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대만 드라마 <일대여황>에서의 측천무후. 오오 황제 포스

이러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그녀기에 무후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정말 많았다. 영화로는 1939년에 나온 무측천(武則天)이라는 영화, 드라마로는 1985년 대만 CTV에서 만든 일대여황(一代女皇)[17]이란 드라마가 있는데 거기에 나온 무후 역의 배우의 포스가 한마디로 쩐다. 14세부터 83세까지의 측천무후를 혼자서 아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참고로 그 배우의 당시 나이는 39세였다. 더 충공깽은 이 배우가 2016년 현재 나이인 70세임에도 동안이라는 것이다. 배우의 이름은 반영자. 잘 이해를 못하겠으면 웹하드에 "측천무후"나 "태평공주"로 검색해보라. 이 드라마는 1990년대 중반 SBS에서 더빙하여 방송해주기도 하였다. 후속작으로 일대공주(一代公主)로 태평공주의 일생을 다루는데 여기서 반영자는 측천무후와 태평공주 둘 다 소화하는 1인 2역의 절정을 보여준다.

사족을 달자면 측천무후는 우리나라에서 드라마 장희빈만큼이나 여러 번 재탕된 소재이다. 그러나 드라마 일대여황의 주연 반영자의 넘사벽 연기와 포스는 전무후무하다는 평. 비교샷[18] 역대 측천무후로 역대 측천무후 드라마 방영횟수가 벌써 장희빈을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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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의 캐릭터는 신경 쓰지 말자 여기로 가면 측천무후 옷입히기를 할 수 있다.

그 이유로는 황제 이전의 소녀 적 심성 용모와 정치권력의 정점에 선 이후의 갭의 차이가 엘프요정(예시)에서 여왕보스 수준인데 둘 다 훌륭히 잘 소화했다는 점, 화장보정을 감안하더라도 39세의 나이에 천진한 14세부터(!)사진 83세까지 연기했으며, 85년 당시의 분장 술을 감안하더라도 연기력으로 역할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커버했다는 점 등이 있다. 불로장생이라는 설이 있다 증거? 이 쯤 되면 종족이 의심스럽다 게다가 당시 성형기술을 생각해도 천연미인 동안이었다는 점이 신기에 가깝다.

문명 5에서 전작의 진시황마오쩌둥을 밀치고 중국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오오 무측천 오오. 정작 중국에선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발더빙으로 까이고 있긴 하지만...

서양권에서는 중국계 여류 소설가인 샨사가 쓴 소설 <여황 측천무후>가 히트를 치면서 명성이 특히 커졌다.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측천무후는 그야말로 먼치킨. 그 포스가 가히 당태종도 말아먹을 기세다. 흠좀무 한국 소설로는 경향신문에서 연재했던 유현종의 '낙양성의 봄' 이 있다. 같은 작가의 '패왕별희'와 마찬가지로 이쪽도 찐한 베드신이 자주 나와서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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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돋네요! 은근히 초상화와 닮았다?

대조영에서도 등장한다. 배우는 양금석. 절절매는 당의 신하들 지못미. 흑치상지 등을 숙청하고, 기분이 나쁘면 홀로 술을 마신다든지, 대조영을 살려준다든지 여러 호탕한 기색을 보이지만, 돌궐묵철과 동모산의 대조영이 세력을 떨치자 뒤로 갈수록 안습에 안습을 거듭... 이건 그냥 실제 시대가 그런데다 주인공이 아닌 탓이다 회차가 거듭될수록 나중에는 그냥 패기 넘치는 암군이 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측천무후의 외교적 성과는 진짜 안 좋았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고증이 된 걸지도 모르겠지만.(...) 황후시절 고종과 함께 황제가 된 후.[19]

또한 비슷한 시기를 다룬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극중 후반에 나오는데다 비중도 별로 없다. 그냥 별거 없는 악녀다. 애초에 둘 모두 반영자에 비하면 포스가 너무 딸린다. 사실 한국 사극의 조연 측천무후는 중국 문화권의 주연 측천무후와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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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새로 측천무후를 주인공으로 한 판빙빙 주연의 무미랑전기를 중국 후난tv에서 방영을 시작했다. 포스나 아름다움은 뒤쳐지지 않고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만 측천무후의 일대기 보다는 궁중암투와 로맨스에 중점을 두어서 사람 보기에 따라서 스토리가 진부할 수도 있다.
  1. 북위 효명제의 태후가 황제를 독살하고 갓난아이인 딸 원고랑을 남자라고 속여서 황제로 즉위시켰다가 딱 하루만에 폐위된 황제가 있고 이 분과 비슷한 듯 당고종 때 농민반란을 일으킨 진석진이라는 여자가 스스로 문가황제(文佳皇帝)라고 칭제한 적이 있으나 측천무후에게 영감을 주었을지도 둘 다 정통 황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2016년 중화민국 총통에 오른 차이잉원을 거론하는 사람도 있는데, 중화민국 총통은 어디까지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공화국의 선출직 공무원일뿐 황제가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박대통령은 한국 역사상 4번째 여왕인가?
  2. 한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 측천무후가 직접 만든 한자이다.
  3. 처녀 드립은 당태종의 아들 당고종이 측천무후를 후처로 들였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무마해보려고 드립을 친 것일 가능성이 높다.
  4. 당고조의 누이인 동안공주의 손녀다.
  5. 사실 중종도 할 말은 없는 것이, 위황후의 친정아버지 위현정을 시중으로 삼으려다가 신하들이 반대하자 홧김에 "내가 천자인데 천자 자리를 준다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라고 성질을 부렸다. 이 실언 하나 때문에 폐위되는 빌미를 제공한 셈.
  6. 국성이라서 반란 이후 도로 성씨를 빼앗겼다.
  7. 공식적으로는 조정 신료들과 백성들이 무후의 즉위를 하루가 멀다 하고 주청하자 예종도 이에 동조해 스스로 제위를 어머니에게 넘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겠지..애당초 예종이 건강이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당현종에게 빨리 선위한 것은 여동생 태평공주 위주로 돌아가는 정국을 타파하기 위함이었다.
  8. 측천무후는 주왕이 정무를 보던 명당(明堂)역시 자신이 다시 만들어 세우는 등 주나라와의 연관성을 강조하였다.
  9. 그나마도 비중은 호 쪽, 즉 선비족이 더 높았다.
  10. 무후가 죽였다는 첩 혹은 고종의 여인들은 폐황후 왕씨, 소숙비, 한국부인 무씨, 위국부인 하란씨로 왕씨, 소숙비는 무후가 황후로 책립되는 과정의 정쟁에서 제거되었고 한국부인, 위국부인은 무후의 언니, 조카로 고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이것이 통정관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도리어 고종의 자식을 낳은 유씨, 정씨, 양씨 등은 살해 당하지 않았다.
  11. 흥미롭게도 이런 군주들이 등장하면 그 뒤에 반동으로 "너그럽고, 인자한" 군주가 등극하게 된다. 당현종이라든지 이라든지 그리고 이런 군주의 시대에 태평성대와 이후의 몰락이 오가게 되는데 당현종은 자기대에 치세와 난세가 공존하는 매우 특이한 사례.
  12. 사실 당현종도 측천무후 손자 아니랄까봐 자신의 반대파였던 큰어머니 위황후와 사촌인 안락공주를 위시한 위씨 일족, 할머니의 무씨 일족, 고모인 태평공주와 그녀의 세력을 싹 숙청한 전례가 있어 마냥 너그럽고 인자한 타입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13. 가장 유명한 예시라면 역시 조선왕조의 3대 군주 태종 이방원의 숙청과 사병철폐 등의 왕권강화조치를 들 수 있다. 이다음이 세종대왕.
  14. 대체로 고종시기 백제, 고구려 멸망도 무후의 공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백제 멸망의 경우 무후가 완전히 전면에 나서기 전이었다. 도리어 무후는 고구려 원정에서 황제의 친정울 반대하며 반전 여론 혹은 고종의 대외정책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는 입장을 취했다. 게다가 고종이 군사적해결을 선호한 반면 무후는 외교적인 해결을 선호했다고 한다.
  15. 예종이 건강이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이융기에게 빨리 선위한 것도 이런 정국을 뒤집어엎기 위함이었다.
  16. 당나라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방향이라고 할 만한 북쪽에는 돌궐, 서쪽에는 토번, 동북-동해에 이르는 영역에는 발해-대신라가 들어서는 상황이었다. 레알 사면초가 이들이 제각기 한꺼번에 당나라를 견제하기 시작한다면, 연이은 참패로 군사역량이 꺾인 당나라로서는 그 큰 땅덩어리가 도리어 악재로 작용하여 사방의 국경 지대가 공중분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괜히 그 자존심 높은 중국의 황제가 일본에게 다급한 화친 의사를 보낸 것이 아니다.
  17. 국내에서는 뉴비디오프로덕션에서 측천무후란 명칭으로 VHS 출시되었으며 SBS에서 칠협오의의 후속으로 방영했다.
  18. 사족으로 이 비교 샷에 나왔던 여배우는 지존홍안(至尊紅顔)이란 드라마에 나왔던 가정문.(賈靜雯) 이쪽도 연기력은 괜찮았지만 포스 면에서는 반영자 쪽에 비하면 많이 딸린 편.
  19. 사족으로, <대조영>에서 측천무후 역을 맡았던 양금석은 천추태후에서 측천무후와 거의 비슷한 성격의 소태후 역으로 낙점되었는데 이 작품은 2008년 10월 초 첫 방송 예정이었다. 하지만, 양금석은 당시 출연 중이었던 KBS 1TV 일일극 너는 내 운명의 연장방영으로 캐스팅 제의를 포기했으며 <천추태후>는 2009년 1월 초로 첫 방송일이 바뀌었고 양금석 자리에는 심혜진이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