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 셔먼호 사건(한제국 건국사)

이 항목은 대체역사소설 한제국 건국사에 나온 내용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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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한제국 건국사에 등장하는 민국인들이 처음으로 공을 세운 사건. 또한 훗날 신미양요[1]가 일어나게 된 원인이 된다.
1866년 7월 8일부터 7월 15일(음력) 까지 벌어진 사건.

2 발생 원인

원래 역사에서는 영국인 목사 토마스가 셔먼 호 선주 프레스턴을 꼬드긴 것이 시작이나 소설에서는 선주 프레스턴이 중국 내 미국 회사와 계약을 맺고 조선과 통상을 하려는 중에 발생하게 된다.[2]

3 작중 전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함. 시간 표기에서 년도는 양력. 월일은 음력임.

3.1 셔먼호의 등장과 대동강 정박

  • 1866년 7월 8일. 황해도 황주 송산리에 셔먼호 출몰. 황주목사 정대식이 처음으로 문정함. 이 때 이들은 통상을 요구하며 물자를 내어달라 함. 황주목사는 이들을 막을 무력이 없으므로 문정 후 이들에 대한 특별한 제재를 가하지 않고 조정에 보고를 올림.
  • 7월 9일. 용강현령이 셔먼호 측과 회담을 하였는데 여기서 셔먼호 측이 처음으로 통상에 응하지 않을시 일전을 불사한다는 협박을 가함.
  • 7월 12일. 평양 대동강에 출몰.

3.2 셔먼호측과 조선 간의 회담 및 교전

  • 7월 12일. 평양부 서윤 신태정과 평양감영 중군 이현익이 셔먼호 측과 대화시도. 셔먼호 측의 통상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물자보급에는 동의. 셔먼측은 물자보급 후 강을 거슬러 올라감. 서울에서는 권철상 등 5명의 장교들이 평양으로 출발.
  • 7월 13일. 권철상 일행이 평양에 도착. 중군 이현익과 셔먼호에서 협상. 별 성과 없이 끝남.
  • 7월 13일 밤. 순화강 근처로 내려온 셔먼호에서 소형함이 나와 조선군이 보이는 곳에서 성냥을 그었다. 그걸 총격시작으로 오판한 조선군이 소형함에 일제 사격을 가했고 셔먼호가 대포로 응사하면서 쌍방 교전 발생.
이 교전으로 셔먼호쪽 말레이시아 선원이 부상. 조선군은 12명의 사상자[3]가 발생함.
  • 7월 14일. 권철상 일행[4]이 셔먼호측과 2차 협상. 고성과 막말이 오가다가 결국 배 안에서 총격전 발생[5]. 중군 이현익이 부상을 입고 잡혔고 민국인 장교들은 김현수 중위가 부상[6] 을 입은 것 말고는 무사히 도망침[7].
이후 평양부 서윤 신태정이 다시 협상에 들어가려 했으나 청나라인 통역과 서로 고성만 주고 받은 채 협상은 시작도 못하고 끝났다. 이로써 평양감사 박규수는 셔먼호에 대한 무력응징을 결정.
  • 7월 14일 밤. 중군 이현익이 잡힌 것에 책임감을 느낀 권철상 일행이 前 군관 출신 박춘권과 함께 셔먼호에 잠입. 다행히 셔먼호 선원들이 술에 취해 잠이든 상태라 들키지는 않았다[8]. 선창에 내려가는 중간에 목사 토마스를 붙잡아 이현익의 행방을 알게 되었고 이현익을 무사히 구출한 일행은 셔먼호를 빠져나감.

3.3 셔먼호의 최후

  • 7월 15일 아침. 인질이 사라진 걸 알게 된 셔먼호는 대동강을 빠져 나가려 했으나 철산부사 백낙청의 휘하 포수들과 평양감영 군사들에게 공격을 받아 양각도 인근 모래톱에 좌초. 배를 빠져나온 토마스 목사는 주민들에게 맞아죽고 다른 선원들은 불에 타 죽었다.

4 사건의 영향

조선에 머물게 된 민국인들의 입지가 강화되기 시작한 계기였으며 훗날 미국[9][10]은 이 사건을 들어 다른 서양국가들과 함께 조선에 전쟁을 걸어오게 된다.
  1. 작중의 다른 이름으로는 징벌전쟁
  2. 이러한 묘사는 작가 윤민혁의 착오에서 기인한다. 윤민혁은 토마스 목사에 대해 우호적으로 서술한 국내 자료만을 접하고 토마스 목사를 선량한 인물로 설정한 것. 이 점은 윤민혁 본인도 이후에 인정하였다.
  3. 7명 사망. 5명 중상
  4. 중군 이현익. 민국인 장교 권철상, 우형식, 오진우, 김현수, 양일헌
  5. 셔먼호 측은 애초에 권철상일행을 선장실에서 인질로 잡으려 했는데 권철상측이 위압적인 자세로 선원들을 밀어내고 나옴. 갑판에서 선주가 최후의 발악으로 선원들에게 발포명령을 내림.
  6. 총격에 한쪽 귀가 날아가고 다리에 총상을 입음. 한쪽귀에 입은 부상은 후에 소설에서 가끔씩 언급됨.
  7. 실제로 중군 이현익이 포로가 되었다
  8. 이 장면에서 웃긴 게, 인질이 어디있을까 하니, 일행 중의 한 명이 '선창에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권철상이 '어떻게 아냐?'고 묻자 하는 말이... '드라마에 그리 나왔습니다.'(...)
  9. 미국측이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된 시기는 1868년
  10. 권철상대위의 밀명을 받은 후배 양일헌 중위가 프랑스 측에 슬쩍 흘린기도 했고, 조선 조정에서 은근히 청국상인들에게 이 사실을 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