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 셔먼호 사건

1 개요

미국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1]가 1866년 8월 27일[2], 평안도 용강현 주영포(珠英浦) 앞바다에 도착한 뒤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가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9월 5일[3] 당시 평안 감사 박규수 휘하의 조선군 부대에 의해 소각된 사건.

이 사건이 불러오게 될 신미양요와 5년의 시간차가 있어 많은 이들을 헷갈리게 한다. 한국근현대사 선택자들이 초반에 마주치게 되는 1라운드 보스(…).

영문 위키 피디아를 비롯한 많은 웹에서 "Keupsa Gate"를 조선의 허락 없이 넘어서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식으로 기술하나, 막상 Keupsa Gate가 어딘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다. 발음과 지명으로 유추해보면 대동강 하구에 위치한 황해북도 황주군 철도리 급수문 (急水門)에 해당되는 듯.

규장각 자료에 따르면 확실한 듯. (전문 : 황주철도진지도 黃州鐵島鎭地圖,철도는 재령강과 대동강의 합수 지점에 위치한 河中島로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황주군 철도리에 해당한다. 철도진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있은 후, 대동강 유역을 방어하기 위해 강 서쪽의 東津鎭과 짝으로 그 해 11월에 설치된 첨사진이다. 지도에도 강폭이 좁아 물살이 빨라지는 급수문이 표시되어 있고 남쪽에서 흘러오는 재령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가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급수문 앞쪽으로 성벽을 쌓았으며 뒤쪽의 後津으로 해서 황주로 통한다. 지도의 방위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산지는 회화식으로 그려져 입체감이 잘 드러난다. 대동강과 재령강에는 마치 풍경화처럼 돛단배도 그려져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철도진의 간략한 연혁이 적혀 있다. 이에 의하면, 철도진에 원래 목장이 있었으나, 水草가 적어 성종 15년에 안악의 楮島와 풍천의 椒島로 목장을 옮기자 토지가 비옥해지고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다. 당시 이곳의 軍總에는 총1,134명의 군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철도진이 애초 이양선의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나 후에는 이곳을 지나는 장삿배로부터 비싼 세금을 거두는 등 민폐가 되기도 했다. )

한국학자료포털 고지명 - 급수문

2 사건의 전말

USS_Princess_Royal.jpg
(영어 Wikipedia, new world encyclopedia[4]의 자료)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셔먼호'로 의심되는 함선 중 하나인 USS Princess Royal(1863)
USS Princess Royal(1863)의 제원[5]
종류스쿠너(schooner)
건조국/제작사스코틀랜드/Ted & McGregor, Glasgow
미국이 나포한 시기1863년 1월 29일
재취역1863년 2월 4일
획득1863년 3월 18일
매각1865년 8월 17일
전장61.0m
배수량828톤
무장9인치(230mm) Dahlgren 활강포 x 4문
30-pounder(13.6kg) Parrott rifle x 2문
24-pounder(10.8kg) 곡사포 x 4문
추진 종류증기 엔진/스크류 추진
한국어 위키백과에서 추정하는 제너럴 셔먼호의 제원
건조국/제작사스코틀랜드/Ted & McGregor, Glasgow, Scotland
미국이 나포한 시기1863년 1월 29일
재취역1863년 2월 4일
획득1863년 3월 18일
매각1865년 8월 17일
전장38.81m
배수량614톤
무장8인치 Sg x 4문
32 pdrs x 16문
승무원150 명
추진 종류요트(Sail) + 외륜(Side-wheel steamer)[6]
기타프린세스 로열호와 제너럴 셔먼호의 포획시기/경매시기/판매시기/침몰지역이 미국문서와 다르다는 주장이 있음.[7]

사건의 시작은 19세기 중반, 열강들의 아시아에 대한 개항때문이었다. 이익을 얻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아시아의 문을 개방시키는데 혈안을 세웠고 그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문도 열리게 되었다. 텐진에 머물던 프레스턴은 영국의 메도스 상사와 계약을 맺고 조선으로 출항했다. 그리고 만경대 한사정(閑似亭)에까지 올라와 깽판을 쳤다. 처음에는 제너럴 셔먼 호에 먹을 게 떨어졌다고 도움을 요청하자 조선측에서 소고기채소까지 거저 나눠주기까지 했으나 이들은 그거 받아 쳐먹고도 일절 안 가고 멋대로 들어와 측량을 하는 짓을 저질렀다. 이에 조선군이 출동하였으나 배에서 포격을 감행하여 여러 군졸 및 구경하던 백성들을 살상하게 했다.

조선군도 포격을 했지만 사정거리가 짧아서 일절 아무런 포격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규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어서 물러가라며 중군 이현익을 보냈으나 되려 그를 잡아가두고 통상을 요구했다. 실록에 따르면 중군이 납치된 것을 본 병사들과 백성들이 완전히 빡돌아서 배를 포위하고 화승총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자 제너럴 셔먼 호의 선원들은 쫄아서 퇴역 장수(장교)인 박춘권이 배를 타고 접근해오자 그에게 중군을 풀어주었다.

이때 배에 탄 영국 웨일즈 출신 개신교 목사 토머스가 이 배에 통역으로 탑승했다. 그는 1865년 9월에 세관을 사임하고 1차 조선 선교여행을 했다. 그러나 조선 당국에 적발되어서 추방당하고 1866년 프랑스에서는 병인박해 당시 프랑스 신부들의 학살에 항의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떠나는 프랑스 해군 원정함대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상하이로 떠났다. 낭패한 토마스는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 호에 통역으로 탑승하여 다시 조선으로 떠났다. 토머스 목사는 프레스턴을 막으려 했으나 막지 못하고 결국 프레스턴은 이현익을 납치한다. 그러나 박춘권이 평양 군민들에 쫄은 선원들이 풀어준 이현익을 구출하고, 평양감사 박규수는 밤중에 기름을 뿌린 목선들을 가득히 보내서 화공을 펼치니 배는 버티지 못하고 불태워졌다.

토마스 목사를 비롯하여 배에 타고 있던 선장과 다른 상선사관은 서양인이 5명뿐이었고 나머지 선원 19명은 동양인 중국인과 말레이시아 선원이었는데 몇 명이 가까스로 뭍으로 헤엄쳐 올라왔다. 개화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박규수는 이들을 죽이지 않고 잡아서 협상에 쓰고자 했으나 백성들이 내놓으라고 하는 분노가 너무 엄청나서 견딜 수 없었고 결국 청나라 선원 이팔용 및 통역을 맡던 기독교 목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목사(1840~1866)를 비롯하여 말레이시아 및 미국인 선원들은 다구리당해 끔살당했다. 조정에선 5명의 서양인은 그렇다쳐도, 중국인 선원까지 다 쳐죽인것 때문에 청나라가 문책할까 봐 두려워서 역시 죽이는건 바라지 않았다.

한편 1871년 6월 11일 신미양요미합중국 해군이 초지진을 점령한 첫날 조선인 천주교도를 태운 배가 작약도에 머물고 있던 사령관 로저스 제독의 기함 USS 콜로라도 함에 접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인 신부 3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혹시나 미 해군 함선에 승선했을 지 알아보기 위해 왔다고 진술하였다. 미군이 제너럴 셔먼 호의 진상을 묻자 선원들이 조선 측의 정중한 환대와 교역을 약속받고 상륙하였으나 환대를 받고 취해 쓰러진 뒤 살해되었다고 구라를 쳤다. 미국측은 조선 정부의 공식 답변보다 이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다.

3 상세

제너럴 셔먼 호 전투가 조선군이 일개 상선을 잡기도 버겁다는 것을 드러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제너럴 셔먼 호의 포격으로 죽은 7인은 애당초 군인이 아니었으며 구경하고 있는데 기습적으로 포를 쏴대서 죽은 것이었다. 정작 셔먼 호를 불태워 버리는 군사작전에서 죽은 조선군은 없었다. 하지만 무장 상선으로서 이 배에 정착된 포는 조선군이 가진 포보다 우수했었다.

흥선대원군은 가라앉은 제너럴 셔먼호를 건저내서 증기기관을 복제하려고 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0개월 만에 복원하기는 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근세조선정감>의 기록에서는 아주 느리게 움직여서 사실상 실패했다고 하나, 이 책은 야담을 모은 야사집이다. 정식 국가기록인 승정원일기는 시범운행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화포 시범 사격도 성공했다고 나온다. 또한 2척을 더 만들어 총 3척을 강화도에 배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서 만들어진 책 <해국도지>와 <화륜선도설>[8]을 통해 화륜선과 와트 증기 기관의 설계도를 확보한 상태였고, 대원군 시절 만들어진 운현궁 소포/중포와 <훈국신조기계도설>, <훈국신조군기도설>에 나오는 조선의 수뢰포, 쌍포양륜거, 철모[9], 마반포거, 마반거 등도 이 책에 실린 서양의 최신 무기들과 과학기술, 그리고 여기에 영향을 받은 청나라의 무기들에 대한 내용을 참조한 것이다.

일단 배가 처음에 느렸던 주된 이유로는 기관실에 땔감으로 넣은 것이 석탄이 아닌 이었고 숙련된 선원이 없었던 점이 컸다, 그리고 증기선은 예열을 하고 나서나 제대로 속도가 나오는데 예열도 안하고 땔감 넣자마자 움직이려고 해서 그렇게 느리게 간 것이었다고 하는 말이 있다.

그 뒤에 통상수교거부 정책이 한창임에도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고 전해진다. 어쨌거나 증기선 시범 운행은 대원군의 개망신으로 귀결될뻔하다가 막판에 동력이 확보되면서 성공했고, 이런 증기선을 세척 건조하여 강화도에 배치했다.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불명...[10]어쨌거나 증기기관을 복제하다니 조선의 공돌이들은 세계 제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일!![11]

가끔씩 제너럴 셔먼호가 남북전쟁에 사용된 미 해군 군함 USS Princess Royal 함이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미 해군의 공식문서에 따르면 프린세스 로열 함의 민간 판매 시점이 애초에 이 사건이 일어난지 2년뒤인 1868년이었고, 침몰한것도 평양이 아닌 1874년 1월 10일 노스 캐롤라이나 Cape Fear에서 침몰하였다.

4 영향

흥선 대원군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서양에 대한 배척을 나타내더니 같은 해에 일어난 병인양요를 계기로 양이정책(攘夷政策)인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 한층 강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5 후세의 평가

남한에서는 그다지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건이지만, 북한에서는 이 때 제너럴 셔먼 호 격침(?)에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통솔했다고 주장하면서 김일성 일족이 과거부터 조선을 지키는데 앞장섰다고 역사왜곡 선전을 하고 있다. 이 영향을 받아 운동권에서는 반미의 역사적 명분의 하나로 써먹고 있다. 당연히 말도 안되는 개소리고 실제로 이 사건의 총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당시 평안감사이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와 철산부사 백낙연이었고, 이 사건의 행동대장 역할을 맡은 사람은 퇴역 장교 출신의 박춘권이었다. 당연히 조선 측 기록 그 어디에도 김응우의 이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제너럴 셔먼 호 사건 당시 김응우는 22세의 햇병아리 묘지기였을 뿐이지만 박규수는 이미 60을 바라보는 노성한 고위 관료였다. 상식적으로 누가 이 사건을 주도했을지 설명이 필요한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관한 사료는 비교적 많으나 남아 있는 것들은 조선측의 기록이다. 반면 제너럴 셔먼호측의 입장을 담은 기록은 전혀 없다. 생존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양측의 충돌 경위를 따지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이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가를 가름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제너럴 셔먼 호 생존자가 있다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주장했을 가능성도 크지만.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이 침략근거로 삼는 종교 선교에 대한 박해[12]를 무조건 선전포고라며 기록한 걸 봐도 다를 게 없기에. [13]

당초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조선측의 입장은 다른 이양선의 경우와 같이 부드럽게 대접하여 돌려 보내려는 것이었다. 그들의 요구에 따라 조선측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쌀, 고기, 계란, 채소, 땔감 등을 대주었다. 그렇다면 왜 조선측이 방침을 바꾸어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제너럴 셔먼호측에서 중군 이현익을 납치했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기록에서 일치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기록이 패강록이다. 이 책은 이현익의 아들 이흥근이 쓴 것이다. 이에 따르면 문정에 나선 진사 안상흡이 만약의 경우 제너럴 셔먼호를 퇴치할 방안을 적은 문서를 든 채 배를 타고 이현익에 앞서 접근했다가 제너럴 셔먼호에서 띄운 소청선에게 그 문서를 빼앗긴다. 그리고 제너럴 셔먼호측에서 그 문서를 통해 조선측에서 선원들을 회유해 상륙시킨 뒤 몰살하려는 계획을 알아내고 이현익이 탄 배를 나포했다는 것이다.

5.1 현재 다른 해석과 개신교계의 입장과 비판

영국 웨일즈 출신 토머스 목사가 미국 프레스턴의 상선을 타게 된 것은 측량이나 통상과는 별 관련 없이 선교 목적이 맞다. 토머스 목사는 1866년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처음 조선땅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활동중인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으로 1865년 9월 13일 조선 서해안에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지하교회화 되어었던 가톨릭 신도들의 도움으로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선교활동 몇 달 하다가 서울로 잠입하려다가 태풍을 만나 좌초되어 목숨만 건져서 1866년 1월 북경으로 다시 복귀했다. 1866년 4월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서 자신의 선교가 조선땅에서 뿌리를 내려 평양에서 자신이 전파한 한문성경이 퍼지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조선 재입국을 시도하다 마침 프랑스배를 타려다가 무산되고 꿩 대신 닭으로 찾은 게 제너럴 셔먼호였다. 따라서 토머스 목사는 배를 얻어 타고 온 것이지 자청해서 무장상선을 선동하여 끌고(?) 침략하러 온 것은 아니다.

그리고 150명 정원의 무장상선(?)도 실상과 다른 게 제너럴 셔먼호에 탄 인원은 토머스 목사와 영국인 호가드를 비롯해 서양인은 5명이고(덴마크인 선장 1명, 영국인 토머스 목사 포함 2명 미국인 2명), 나머지 14명의 선원은 중국인과 말레이시아 선원 이었다. 무장선박으로 한 나라를 협박하러(?) 오면서 목사 포함 5명의 인원을 가지고 침략 목적으로 온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바다도 아니고 좌초되기 쉬운 강을 거슬러 오는 모험을 하면서 고작 그 인원으로 조선을 굴복시킬 의도가 있었다는 건 누가 보더라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무장상선이란 용어 때문에 군함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 시기 이전 전근대 시절 원양으로 나가는 선박은 상선이고 수송선이고 연락선이고 간에 무장을 하는 게 기본이었다. 원해에는 서양선박끼리 만나도 무법천지이기 때문.
그리고 조선의 피해 규모도 과장 되었다. 조선군민의 피해는 7명 사망으로 나온다. 제너럴 셔먼호 승선 인원이 20여 명에 불과하고 150여 명 무장상선 드립부터 어쨌든 의도가 있는 왜곡...

다만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의 목적을 가지고 온 것은 맞다. 통상 목적의 이양선은 이 시기 이전인 순조, 헌종, 철종시대부터 여러 차례 보고 되었기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처음은 아니었다. 목사가 포교를 위해 배를 빌려타고 온 목적은 무시하고 150명 무장상선 침략의 앞잡이 역할로만 서술하는 것도 편향적인 시각이다.

당시 주둔 조선군을 통솔하던 박규수(1807~1876)는 개화파의 효시로 유명한 인물이며 토머스 목사 및 생존자들을 죽이지 않으려던 사람이었다. 개화파였기 때문에 죽이려고 하지 않은게 사실이다. 그리고 서양인을 5인을 제외한 중국인 선원이 10여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민중들이 중국인 선원까지 죽여버리자 조정에서도 난색을 표명했다. 청에서 항의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랬나? 했다. 청에서는 양인들에게 매수당한 청인들이라 대충 넘어간 듯?

이 사건에 대해서 일각에선 한국 개신교계가 무리하게 포장한다고 비판받는다. 한국 기독교 계에서 이때 죽은 토머스 목사를 순교자라고 기리고 토머스 교회까지 세웠다.(물론 평양에 있었던 교회이기 때문에 지금은 폐쇄.) 6.25 전쟁 당시 평양 내에 2층 이상의 건물이 남아나지 않을 만큼 도시가 황폐화되면서 이 교회도 함께 한 줌의 재가 되...었나 싶었는데, 2009년에 평양과학기술대학을 지으면서 우연히 그 터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선교사의 기록을 들어 토머스의 사망을 평양감영 감옥에서 형리에게 한문성경을 전해주었고 그가 개종하여 훗날 평양에 마펫(Samuel A. Moffet) 선교사를 찾아와서 실은 토머스 목사가 죽기전에 이것을 나한테 줬다며 들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14]

그리고 보수측에선 반미라하고 대체로 미국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에서 조차도 토머스 목사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구타 살해 당한게 아니라 훗날 평양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오문한의 진술을 근거로 하여 토머스가 강에서 내려 군졸들에게 성경을 나눠주려고 하자 군졸들은 말을 못 알아들어 어리둥절했고 군졸 박춘권이 칼로 죽였다고 진술했고 박춘권은 나중에 죄책감을 느껴서 훗날 이를 선교사에게 고백하고 전도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한국의 공식 문서보다 평양에서의 개신교도 인터뷰와 선교사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사서와 기록에 따라 사실 여부를 판단해야지 개신교에서 일부러 역사를 왜곡 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그리고 토머스가 영국 런던선교회의 명을 씹고 막무가내로 제너럴 셔먼호를 꼬셔서(?) 쳐들어 왔다는 조작 수준의 이전 문서의 안티 개신교 성향의 블로거 정체불명 출처의 정보도 사실과 다르다. 1865년 첫 조선 선교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으로 가능한 것이고 두번째 입국도 북경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지원이 있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북경 책임자인 윌리암슨은 1855년 런던선교회를 사임하고 1863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중국 주재 책임자가 되었으며 조선 선교 시도에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토마스 목사의 상관도 아니며 일개 지원자였던 게 토머스 목사의 교파는 스코틀랜드 장로회가 아닌 웨일즈 출신 회중교회다...

개신교측 근거에 대해선 앞서 기록의 여부에 대해선 상술했고 순교 여부에 대해선 대해 한국 개신교에서도 논란이 없는 건 아니다. 선교 목적으로 입국을 시도한 건 맞는데, 포교중에 죽었다고 보기 어렵기에 무슨 순교냐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현재 연구로는 한국 땅에 최초로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는 토머스 목사가 아닌, 30여 년 전의 독일 루터교회 목사 칼 귀츨라프 이다.

개신교계에는 토머스 목사에 대한 뒷이야기도 떠돌고 있다. 예시 혹시 있을지 모를 사실관계 문제에 대해 확인바람.

6 신미양요와의 갭이 5년이나 되는 이유

병인양요는 병인박해 직후 프랑스의 보복으로 일어났지만, 신미양요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뒤에 5년이 지나서야 일어나기 때문에 흥선대원군 섭정기의 대외정책을 공부할 때 상당히 헷갈리는 부분으로 작용한다.

이 사건과 신미양요 간의 시간적 간격이 큰 이유는, 애시당초 제너럴 셔먼호 사건 자체가 미국 정부의 지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민간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독자적으로 벌인 일이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제국주의 침략자 무장상선 이라며??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 조선은 이미 병인박해로 인해 프랑스가 조선에 처들어 올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미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외교적으로 영 좋지 않은 시점을 택할 이유가 없다(..). 엄밀히 말해 모험 상선에 불과했던 제너럴 셔먼호가 극단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병인양요 직전이라 조선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는 것.

게다가 애시당초 셔먼호가 정부 소속이거나 지시를 받았더라면, 아무런 외교적 군사적 대책도 없이 조선인들 상대로 행패나 부리고, 도주경로 확보도 없이 무턱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마침내 몰살을 자초하는 병크짓을 할 이유도 없었다(..).

어쨌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미 정부는 직접 탐문 조사에 나서게 된다. 이듬해인 1867년에는 와추세트호, 그 다음해인 1868년에는 셰난도어호가 조선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 두 번의 방문의 목적은 정보 수집이 주안점이었기 때문에 모두 별다른 충돌없이 끝났다. 그래서 국사 시간에 안 배우고 시험도 안 나온다. 잘됐네 신미양요가 일어날 때까지 전혀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난 것이 아니다.
한편, 셰난도어호가 방문했을 때 조선정부는 미국에 공식 회답을 보내 제너럴 셔먼 호의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시켜 준다.

따라서 미국이 이 사건의 전말을 확인하는데만 3년이 걸린 셈.[15]

그리고 미 정부도 조선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논의하고, 이를 다시 동아시아 지역 책임자(베이징 공사)에게 전하고, 베이징 공사는 정보를 수집하고, 군사를 정비하고....이런 식으로 따져 보면, 5년이라는 시간적 공백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게다가 미국 본토 역시 집안일 뒤처리로 바빴다는 점. 신미양요 2년 전인 1869년에서야 미 대륙 횡단 철도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이전까지는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이 덜 했다는 점, 무엇보다도 조선의 개항은 대외 정책의 큰 틀, 특히 대 러시아 정책과 관련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일이라는 점 등 여러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신미양요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꽤 지나서야 발발하게 되었다. 한국근현대사 과목에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 - 병인양요 - 오페르트 도굴사건 - 신미양요 순서 맞추기가 단골 출제 문제인데, 왜 이런 순서로 사건이 진행되었는지, 위에서 언급된 이유를 참조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즉,
1. 느닷없이(1) 병인박해 발생(1866년1월)
2. 느닷없이(2) 제너럴 셔먼호 사건 발생(1866년7월)
3. 예정대로(1) 병인양요 발생(1866년9월)
4. 느닷없이(3) 오페르트 도굴사건 발생(1868년)
5. 예정대로(2) 신미양요 발생(1871년)
6. 예정대로(3) 척화비 각처에 세움(1871~3년)
이라는 것. 거 순서대로 합시다

7 미디어

1990년에 방영한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대원군>에서도 등장했는데 미국인들이 멋대로 올라와 땅을 측정하고 사진을 찍어가는 것에 지나가던 평양 백성들이 보고 군졸들에게 신고한다. 군졸들이 잡으러 몰려오자 데꿀멍하여 보트로 달아나고 셔먼 호가 포격하여 군졸과 구경하던 백성들이 살상당한다. 이를 본 박규수가 "이,양놈들이...내 차마 죽이지 않고 잘 구슬리던지 쓸모있게 하려고 했더니만..." 혀를 차고 공격을 벌이게 하여 화공으로 배를 침몰시키는 것만 나왔다. 그리고 박규수는 한숨쉬며 '양놈들이 결코 이걸로 끝나지 않을텐데' 라며 불안해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장면이 나온다.

1996년 방영된 KBS 찬란한 여명에서 등장했는데, 장사하러 왔다고 밝히지만 박규수가 "우린 통상 안함"...이라며 튕겼다. 그러자 선원들이 보트 타고 육지에 와서 농부를 쏴죽이고 동네 처녀를 강간하다가 박규수가 이끌고 온 포졸들과 대치하는데, 셔먼호에서 포격을 가해 평양군민들을 살상했다. 이에 관군도 포격으로 대응하다가 야간에 불화살을 쏴서 배를 침몰시켰다. 선주는 헤엄쳐서 빠져나왔지만, 강변에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에게 다구리를 당해 끔살당했고, 한 발 늦게 당도한 박규수는 그래도 죽여서는 안 되었다는 투로 한숨을 쉬었다.

2002년 KBS에서 방영한 태양인 이제마에서도 잠깐 등장했다. 제너럴 셔먼호가 뜬금없이 대동강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강변에 구경하러 몰려들었는데 갑자기 무차별 포격으로 민간인을 마구 학살하는 천하의 개쌍놈들로 묘사되었다. 이후 야간에 야습으로 배를 통째로 불태워버리는 것으로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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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제로 배의 이름의 유래가 된 건 남북전쟁 당시 미합중국 육군(연방 육군)의 명장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이다.
  2.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18일
  3.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27일
  4. http://www.newworldencyclopedia.org/entry/General_Sherman_incident
  5. USS Princess Royal (1863)
  6. 과거엔 요트로만 적혀있었으나 영어 위키피디아에선 외륜범선으로 기록하기에 외륜추진도 최근 추가했다.
  7. 제너럴셔먼호 사건
  8. <해국도지>의 요약 필사본격인 책이다.
  9. 방탄모가 아니라 철로 된 대포 주조틀이다.
  10.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폐선 되었을 확률이 가장 크다. 당시 조선에는 근대함선에 익숙한 선원도 없었고, 증기선은 연료 때문에 운용에 많은 돈이 들어간다. 폐선되어 후대 기록에 따라 대포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11.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당시 조선에도 존재했던 청의 서적인 <해국도지>안에 와트식 증기기관의 설계도와 설명이 들어있어 맨땅에 해딩하는 식으로 복제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책에 들어있는 철모(대포 주조용 철제 거푸집)나 수뢰포, 사망포거 등은 조선에서도 생산/개량되어 만들어졌다.
  12. 동남아 및 아프리카 수많은 나라에서 선교사를 보내 묻지마 선교를 하여 현지인들과 갈등을 빚고 현지인들에게 구타당하거나 추방당하면 얼씨구나 이걸 명분삼아 쳐들어갔다. 병인양요도 바로 병인박해를 빌미로 벌인 짓으로 똑같다.
  13. 이점은 동시대에 박해를 겪었던 천주교의 처지와 대비된다. 병인박해 때의 천주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수집한 기록은 조선 조정 측의 '추안급 국안'이나 '승정원 일기' 혹은 '일성록' 등과 크로스 체킹(Cross-checking)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개신교회에선 당시 신앙 공동체가 전무하여 토마스 목사의 행적을 수집할 수 없었고, 무려 사건이 발생한지 40~50년이 지난 다음에야, 사건을 목도한 사람의 흐릿한 기억에 의해서만 토마스 목사의 행적이 글로써 남겨지게 되었다. 타임머신이 발명되지 않은 이상 토마스 목사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방도는 전무하다.
  14. S. A. Moffet, "Early Days in Pyong Yang," KMF 21-3 (1925.3)
  15. 얼마나 정보가 없었느냐하면, 제네럴 셔먼호가 무장상선인데 동아시아인 조선 군대에게 아작났다라는 것을 근거로 조선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해버렸다. 여기에 신미양요 초반부에 대원군이 병인양요 등을 거치면서 준비한 최대의 방어병력이 보여준 포격을 보면서, 미군은 그에 더해서 최대한의 함포사격을 하고 다시 공격을 했는데, 결과는(...) 신미양요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