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운기

《帝王韻紀》

1614236.jpg

1 개요

고려시기의 역사책이자 역사시.[1][2] 1287년(충렬왕 13)에 이승휴가 지었다.

2 구성과 내용

전 2권(상권·하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판본이 보물 418호, 895호, 109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여말선초 시기에 인출된 것으로 보여진다. 기록상 1360년, 1413년 중간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저자는 고려 후기의 관료이자 문인 이승휴(국역 고려사 열전 링크)다.

상권은 삼황오제부터 원의 흥기까지 중국사를 다루고 있다. 하권은 한국사에 관한 것으로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와 이조군왕세계연대(李朝君王世系年代)의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삼한과 삼국은 모두 고조선의 단군이 시조라는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이승휴 본인이 관료로서 중국에 사신으로 오가면서 요하 지역의 큰 무덤이 부여 부마의 무덤이라는 현지인의 증언을 기록하고 당나라의 대학자 가탐의 저술을 인용하여[3] 부여와 고조선의 연계성을 기록하는 등 한반도 북부~요령 일대의 역사를 기록한 데에 있어서는 현지조사를 하지 못해 내용이 다소 부실한 삼국유사보다 나은 부분이 있다.

3 편찬시기와 동기

1287년 편찬 당시 이승휴는 1280년 충렬왕에게 실정과 부원세력들의 폐단들 10여가지를 상소했으나 파직되어 은둔했는데, 제왕운기는 이승휴가 어려운 시기에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고려 말의 난세에서 유교적 이념과 국가질서회복을 역사에서 제시하려던 것이다.

그 외에 이승휴가 원나라를 2차례 사신으로 파견된 적이 있기 때문에 원 제국에 의해 고려의 정체성이 훼손되지 않을까하는 위기의식도 느꼈다고 할 수있다.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일연삼국유사와 동기가 유사하다.

4 출간과 대중의 인지도

제왕운기는 1287년 처음 출간되었으며, 이후 1360년(공민왕 9년)과 1413년(조선 태종 13년) 재발간되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1977년 아세아문화사에서 한 번, 1991년 을유문화사에서 한 번 출간되었지만 이 판본들은 재고가 거의 없어 도서관이 아니면 구하기 힘들고, 한자가 많아 읽기도 힘들다. 그나마 시중에 재고가 남고 한글로 읽기가 편한 것은 1999년 역락에서 출판한 번역본이 있지만, 상편 부분의 한자 몇몇이 군데군데 괴상한 특수문자 오타가 있다. 또 도서관 측에서는 제왕운기를 역사가 아닌 문학으로 분류해 두고 있다.

인지도의 경우,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비해 안습하다.(...) 삼국사기의 경우 엄연히 정사고, 삼국유사의 경우 조선조에도 허황되어 믿기 어렵다면서도 많은 사서에서 인용되고 현대에 와서도 두 책은 번역본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제왕운기는 국문학상의 가치는 높은 데 비해 그다지 인지도가 없고 앞에서 다루었듯이 번역본도 드물다. 문서가 형성된 시점만 봐도 앞의 두 책은 리그베다 위키 시절부터 있었지만 제왕운기는(...)
  1. 국어국문학자료사전에는 역사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는 역사책, 역사시로 분류하고 있다. 여기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분류를 따름.
  2. 이 때문에 도서관에 따라서 제왕운기를 삼국유사삼국사기와 달리 역사 분야가 아니라 국문학 분야 서가에 비치하기도 한다.
  3. 안타깝게도 가탐 본인의 저술 원본은 당시에도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현재 실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