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三國遺事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공식명칭한글삼국유사
한자三國遺事
영어
분류번호국보 306호
소재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103호 동, 서울대 규장각
분류기록유산 / 문서류/ 문서류/ 문서류
시설5권 2책
지정연도2003년 4월 14일
제작시기고려, 1281년~1283년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번역본.

1 개요

유사가 적혀 있어도 절대로 類似歷史(유사역사)가 아니다. 저자에게 실례다.
고려 후기의 승려 보각국사 일연삼국시대의 내용을 담아 1281년~1283년 경[1]에 저술한 책. 역사, 설화, 불교 관련 기록 등을 다양하게 수록하여 삼국사기와 더불어 중요한 한국 고대사의 양대 사료다. 초판 목판본은 전하지 않으나 현재 14세기 말 인쇄된 목판본이 국보 30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512년 경주에서 인쇄된 판본도 남아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성격으로 나온 책으로는 제왕운기도 있지만 이쪽은 역사시의 성격이 강해 보통 사서 하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교하면, 삼국사기는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2]술이부작(述而不作)[3]의 원칙 아래 쓰여진 책이다. 물론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과 여러 학자들은 삼국의 시조들의 신이한 기록들을 "중국 제왕들에게 신비주의적인 탄생 비화들이 있었다면, 한반도의 왕조들도 그러할 것이다."라는 명분을 들어 자주성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목적 아래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 들어 유학자들은 "삼국사기의 저자들 중 저술의 총관을 맡았던 김부식은 공자께서 금한 괴력난신을 기록으로 남겼으니, 그는 비유교적이다!!"라며 춘추필법의 전통에 따라 비판했다.

반면 일연은 장자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스스로 불자였던 자신의 메세지를 설화에 담아내었는데, 한국 신화와 관련된 내용이 제법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일연은 그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설화들을 차용하여 자신의 메세지를 품을 매개체로 사용한 것 같다. 그러나 방대한 정보를 여러 학자들이 힘을 합하여 정리하여 지어낸 삼국사기와는 달리 일연 개인의 경험과 학문에 근거하여 편찬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비하자면 내용이 적고, 불교 설화가 내용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래서 보통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서술이 겹치는 사건이 있으면 보통 삼국사기가 정사고 삼국유사는 야사 정도로 추정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라는 이름도 이전의 사서[4]에서 빠진 내용들을 수록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역으로 말하면,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역사를 현실적인 시각으로 본 것이 아니라 불교적 세계관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서의 이미지에 그대로 대입하긴 곤란하다.(춘추필법과 비슷한 셈) 하지만 그 사실성이나 합리주의가 말 그대로 사실대로가 아니라 삼국사기의 대표적 찬자인 김부식 외 당시 사람들 기준은 유교적 합리성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원문을 알 수 없게 된 것도 있다. 이 기준에서 생각하면 차라리 손을 대지 않은 쪽이 낫다.[5] 또한 이 설화들도 당대의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되려 삼국유사 없이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고대 사료 부족이라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사학계를 지탱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둥이다.[6]

2 의의

국문학 연구에 있어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국의 일리아드. 방대한 양의 구비문학 자료들이 문자로 전하고 있다.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보고 들은 것을 주로 썼기 때문에 오류가 있는 부분도 조금씩 발견되고 직접 가보기 힘들었던 북방 지역의 설화 부분이 빈약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나 오히려 직접 금석문과 고적 등을 참고해 방대한 내용을 실을 수 있었다. 위의 문제점들도 국가 주도가 아닌 민간의 주도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보면 납득이 갈 만한 수준이다. 다만 삼국유사 자체는 국가 공인이 맞다. 편찬 작업을 일연을 비롯한 민간인들이 했을 뿐이다.

내용으로는 역사적 기록과 함께 건국 신화와 불교 관련 설화 등의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현재까지 남아있는 책 중에는 단군 신화를 수록하고 있는 최초의 책이다. 다만, 단군 신화 수록 부분 처음에 '고기(古記)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일연이 단군고기(혹은 단군본기)라는 책을 참고했으리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고기라는 책이 있었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고... 확실하지 않다. 어쨌건 남아있는 책 중에서는 최초 맞다. 환빠들은 아직 단군고기/단군본기가 남아있다고 주장하지만... 환빠는 언제 사라질까

인용된 서적이 꽤 많이 있는데, 가락국기라는 것도 있다. 이 덕분에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가야의 왕가를 체계적으로 전하고 있는 기록이나, 가야 연구하는 사람들은 삼국유사에 가락국기 내용이 더 이상 인용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 할 정도로 다른 기록이 부족한 상황이라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후백제의 역사에 대해서는 이제가기라는 책을 인용하는데 견훤과 관련된 가문의 가내 기록으로 추측된다.

이 책에는 또한 구지가 등의 한역 고대 가요와 신라향가 14수도 기록되어 있어 국문학사에서도 의의가 크다. 참고로 현재 남아있는 향가에서 삼국유사에 수록된 향가를 빼면 균여(고려 초의 고승)의 보현시원가 11수 밖에 남지 않는다. 그나마 보현시원가는 고려 초에 지어진 것이라 삼국시대와 다소 거리가 있고, 주제도 화엄경의 이론을 염불하듯이 부를 수 있게 노래로 한 것이라 문학적으로는 평이 낮다.

또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 전설, 민담 등 백성들의 관점을 통하여 당시 지배층이나 사회변화에 대한 피지배층의 시각과 민심을 알수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3 기타

이 책이 몽골과의 전쟁 이후에 저술된 책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비해 자주적인 내용을 많이 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사학계에서는 오히려 원 간섭기에 쓰여진 사서인지라 사대적인 내용은 삼국사기보다 훨씬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 않다고 본다. 신채호 또한 삼국사기의 아류[7]라고 비판했다.[8][9]

고려에 와서는 작자를 알 수 없는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삼국사(三國史) 등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가 있었다. 지금 전하는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뿐이다. 전하고 전하지 않은 원인을 생각하건데 김부식, 일연 양인의 저작이 단지 우수해서 이것만 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고려 초엽부터 평양에 수도를 두고 북쪽의 옛 강토를 회복하자는 화랑의 무사가 일파가 되고, 사대를 국시로 삼아 압록강 이내에서 편안하게 지내자는 유교도가 다른 일파가 되어 대치한 지가 수백년이 흘렀다. 불자인 묘청이 화랑의 사상에다가 음양가의 미신을 보태어 평양에 거병하여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학자인 김부식에게 패망하였다. 이에 김부식이 사대주의에 근본을 두고 삼국사기를 지었다. 따라서 동북의 양 부여를 빼어버림으로써 조선 문화가 태어난 뿌리를 먼지 땅에 묻고 발해를 버림으로써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을 초개에 던졌다. 이두문과 한자번역의 구별에 어두어 한 사람이 수명이 되고 한 땅이 수개의 땅으로 변하는 등 전후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경우가 많아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불행히 그 뒤 미기에 고려가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때 홀필렬의 위풍이 전국을 진경하여 황경과 제경 등의 명사가 철폐되고 해동천자의 팔관악부가 금지되었으며 유래 문헌에 만일 독립자존에 관한 부분이 있으면 이를 금지하여 유일하게 사대사상을 고취하는 삼국사기와 그 아류인 삼국유사만이 전할 수 밖에 없었다. - 신채호. <조선상고사> <총론> 가운데

또한 저자가 승려다 보니 불교에 편향적이고 도교유교를 낮게 보는 내용이 많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가 망한 이유를 "수나라 장군의 환생인 연개소문이 불교를 배척하고 도교를 들여왔기 때문"[10]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일연 본인도 관련 기록들에 서로 상충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기록해 놓고 있기는 하지만... 또한 삼국사기의 연개소문 열전은 당서의 연개소문 관련 대목을 그대로 복사 + 붙여넣기를 한 덕분에 당고조의 이름인 이연을 피휘하느라 천개소문이라고 적은 것을 그대로 가져와 버렸고, 덕분에 연개소문이 천개소문으로 통용되기도 하는 비극이 있었다. 이 양대 사서가 쌍으로 삽질한 덕분에 연개소문이나 관련된 인물들의 기록은 대단히 부정확하고 애매해졌다.

또한 같은 흥법편에서 아도화상의 전기를 소개하는 내용 중에 승려 담시의 전기를 소개하면서 "북위의 최호와 구겸지가 도교를 숭상하고 폐불정책을 밀어붙이다 병에 걸리고 북위의 왕 태무제(탁발도)가 불교를 받아들이고 둘을 처형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정작 최호가 죽은 이유는 중화사상(화이론)에 입각해 북위 왕실의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신천사도의 창시자인 구겸지는 최호와 손잡고 북위 왕실에 도교를 널리 퍼뜨린 건 맞지만 불교를 싫어하던 최호가 폐불정책을 밀어붙이자 최호를 꾸짖으며 불교를 옹호한 사람이다.(출처 : 구보 노리타다 저, '도교의 신과 신선이야기') 그리고 태무제 역시 삼국유사의 기록과 달리 죽을 때까지 불교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북위에서 불교가 다시 흥성한 것은 태무제의 뒤를 이은 남안은왕 탁발여 시기로, 그가 호불 성향의 군주였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는 중국 불교가 국가권력과 야합하는 경향을 더욱 가속하여 결과적으로는 중국 불교가 권력과의 야합으로 부패하는 것을 부추켜 긍정적인 발전에 악영향을 미쳤다.

더군다나 삼국유사의 내용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설화들도 불교와 고승들과 관해 불교를 옹호하는 신이담으로 국한되어 있으며, 일연 본인이 직접 답사하지 못한 북방계 설화나 구전되던 무가들은 기록되지 않았다. 저자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

참고로 이 책에도 단군 조선을 '고조선(古朝鮮)'이라고 칭하고 있다. 대강 '오래 전의 조선' 정도로 해석된다. 일각에서는 이 책이 일제강점기에 조작되었다는 설을 주장하는 이가 있으나 전혀 근거가 없다. 이들은 삼국유사 중 환인(桓因)이라는 글자가 환국(桓国, 國의 간체자)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14세기 말에 인쇄된 판본이 발견되면서 1512년 정덕본은 오자가 없는 것으로 판명났다. 애초에 '환인'의 주석에는 '謂帝釋也(제석을 이른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4 형식

<삼국유사>는 모두 5권으로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역사서가 아니기 때문에 바로 대입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기전체의 변형에 가까운 양식을 띠고 있다.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에 비해 체재가 정연하지 않으나, 왕력은 표, 기이는 본기, 흥법 이하의 편목은 열전에 대응된다. 탑상은 기전체의 지에 대응된다고 볼 수도 있다.

  • 제1권:
왕력(王曆) 제1(신라·고구려·백제·가락 및 후삼국의 연대표)
기이(紀異) 제1(고조선 이하 삼한·부여·고구려와 통일 삼국 이전의 신라의 유사)
  • 제2권:
기이(紀異) 제2(신라 문무왕 이후 통일 신라 시대를 비롯하여 백제·후백제 등에 관한 약간의 유사와 가락국에 관한 유사)
  • 제3권:
흥법(興法) 제3(불교 전래의 유래 및 고승의 행적)
탑상(塔像) 제4(사기와 탑·불상 등에 얽힌 승전과 사탑의 유래에 관한 기록)
  • 제4권:
의해(義解) 제5(고승들의 행적)
  • 제5권:
신주(神呪) 제6(이승들의 전기)
감통(感通) 제7(영험·감응의 영이한 기록)
피은(避隱) 제8(은둔한 일승들의 기록)
효선(孝善) 제9(효행·선행·미담의 기록)
  1. 편찬 시기에 약간의 논란이 있다.
  2. 군자는 괴이쩍은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3. 있는 것을 적을 뿐, 새로운 것을 지어내지 않는다.
  4. 일반적으로는 삼국사기를 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5. 쉽게 말하자면, 김부식이 유교식으로 필터링한 이야기를 현대에 다시 필터링 하는 것 보다는, 일연이 있는 그대로 전한 이야기를 오늘날에 직접 필터링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일연이 왜곡 하나 없이 설화나 민담 등을 정말 있는 그대로 옮겼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르기도 하지만.
  6. 풋내기 역덕들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가, 이야기 속에 신화나 전설적인 요소가 들어가면, 그 이야기의 역사적 가치 자체를 모조리 부정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민중들이 인식하던 역사를 있는 그대로 필터링 없이 담고 있기에 나름대로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7. 한자 원문으로는 부용(附庸)이라고 했다. 남의 힘에 기대어 따로 서지 못하고 큰 것에 기댄다는 뜻.
  8. 그 외에도 신채호는 삼국유사가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을 중국의 제석(帝釋) 등으로 묘사한 것과 불교사상에 의거해 여성을 짐승의 화신이라 비하한 것, 그리고 신수두 → 진단, 환국(桓國) → 환인(桓因) 등 우리 고래의 사서에 기록된 우리 전통의 문구들을 불교용어(佛敎用語)로 바꾸거나, 단군이 1048년을 살았느니, 1908세까지 수(壽)를 누렸느니 라고 기록한 것들에 대해 매우 비판했다. 단군(壇君)은 결코 허상이 아닌 우리 역사에 있어서 실재했던 인물인데, 중인 일연이 단군을 종교적으로 막연한 숭배대상이나 혹은 신화적 허구의 대상으로 추락시켰다는 것이다.
  9. 원문1 : 제석(帝釋)〉이니 〈웅(雄)〉이니 〈천부(天符)〉니 하는 따위가 거의 불전(佛典)에서 나온 명사(名詞)이며, 또는 삼국사(三國史)의 초반(初頭)의 사회(社會)에서는 여성(女性)을 매우 존시(尊視)하였는데 여기서는 남자(男子)는 신(神)의 화신(化身)이요 여자(女子)는 짐승(獸)의 화신(化身)이라 하여 너무 여성(女性)을 비시(卑視)하였으니, 나는 이것이 순수(純粹)한 조선(朝鮮) 고유(固有)의 신화(神話)가 아니오 불교의 수입(佛敎輸入) 이후에 불교도(佛敎徒)의 손에 의해 점철(點綴)된 것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문2 : 〈고기(古記)〉에 단군(壇君)이 수(壽) 1049, 1908세(歲)등 설(說)이 있으나 이는 신라(新羅) 말엽(末葉)에 〈신수두〉를 〈진단(震壇)〉으로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써 불전(佛典)의 구어(句語)로 조선(朝鮮) 고사(古史)를 환배(換拜)하는 불교도(佛敎徒)들이 모략한 것으로 ~후략~
  10. "보장왕이 도교를 신봉하자 보덕화상이 암자를 옮기다(寶藏奉老 普德移庵)" 제 3권 흥법 제 3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