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아이 덴노

일본의 역대 덴노
13대14대섭정
세이무 덴노주아이 덴노진구 황후

仲哀天皇
? ~ 200년 3월 8일 (재위 : 192.01.11~200.02.06)

1 개요

일본의 제 14대 덴노. 시호는 타라시나가츠히코노스메라미코토(足仲彦天皇).

야마토 타케루의 차남으로 모습이 단정하고 키가 10척이었다고 한다.

그의 시호 중에서 '타라시히코'는 케이코 덴노, 세이무 덴노의 시호에도 들어가 있고 7세기 때의 덴노인 조메이 덴노, 사이메이 덴노의 시호에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후대에 와서 조작된 것으로 전설상의 덴노로 여겨지는 등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2 행적

178년에 31세로 봄 3월 1일에 세이무 덴노의 후계자로서 황태자가 되었다. 191년 가을 9월 6일에 야마토국의 사키노타타나미노이케시리노미사사기(狭城盾列池後陵)에 장사지냈고 192년 정월 11일에 덴노로 즉위했다. 가을 9월에는 어머니 후타지노이리비메노미코토(両道入姫命)를 황태후로 높였다.

겨울 11월에 세이무 덴노가 사망한 것을 언급하면서 백조를 잡아 능역의 연못에 길러 그 새를 보는 것으로 그리움을 위로하고자 한다면서 여러 국에게 백조를 바치도록 했으며, 11월 4일에 코시국(越國)이 백조 4마리를 바치려 했다가 이복동생 아시카미노카마미와케노미코(蘆髮蒲見別王)가 그 백조를 빼앗자 군사를 보내 주살하면서 사람들이 아버지는 하늘이고 형은 또한 임금이다. 하늘을 우습게 알고 임금을 거스르면 어찌 주륙을 면할 수 있겠냐고 했다.

숙부의 딸인 오호나카츠히메(大中姬)를 첫번째 비로 삼았고 193년 정월 11일에는 진구 황후와 결혼했으며, 2월 6일에 츠누가(角鹿)로 가서 행궁인 케히노미야(笥飯宮)를 짓고 머물렀으며, 아하지노미야케(淡路屯倉)에서 사냥을 나갔다. 3월에는 미나미국(南國)을 돌아보면서 키이국(紀伊國)에서는 토코로츠노미야(德勒津宮)에 머물렀고 쿠마소(熊襲)가 봉기하자 이를 공격하기 위해 토코로츠(德勒津)에서 출발해 아나토(穴門)으로 나아갔으며, 사자를 츠누가로 보내 황후 오키나가타라시히메노미코토에게 바로 진을 출발해 아나토에서 만나자고 했다.

여름 6월 10일에 토유라노츠(豐浦津)에 정박했고 가을 7월 5일에 진구 황후가 토유라노츠에 도착하면서 합류하자 9월에 궁실 아나토노토유라노미야(穴門豐浦宮)를 짓고 머물렀다.

199년 정월 5일에 츠쿠시로 갔고 오카현주의 선조인 와니(熊鰐)로부터 5백 개의 가지가 있는 현목(賢木)을 뱃머리에 세운 채로 나무의 위, 중간, 아래에 각기 걸린 백동경(白銅鏡), 토츠가노츠루기(十握劒), 야사카니(八尺瓊)를 헌상받았으며, 그의 배를 타고 가다가 수문에서 나아가지 않았다. 그 포구에 오호쿠라누시(大倉主), 츠부라히메(莵夫羅媛)이라는 신이 있어 배가 나아가지 않는다고 하자 즉시 기도를 올리면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자 배가 나아갔으며, 또한 히코시마(引嶋)에서 이토현주의 선조 이토테(五十迹手)로부터 와니처럼 현목을 뱃머리에 세운 채로 나무의 위, 중간, 아래에 각기 걸린 야사카니, 백동경, 토츠가노츠루기를 헌상받았다.

21일에 나노아가타(儺縣)의 카시히노미야(橿日宮)에 머물렀고 가을 9월 5일에 쿠마소를 토벌하는 일을 논의해 신(神)이 황후에게 나타나 제사를 잘 지내면 쿠마소가 스스로 항복할 것이라 했지만 주아이 덴노는 이를 의심해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200년 봄 2월 5일에 갑자기 몸이 아프다가 6일에 사망했는데, 기록에 따라 신의 말을 듣지 않아 일찍 죽었다거나 쿠마소를 친히 정벌하러 떠났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그가 죽자 황후와 타케우치노 스쿠네는 죽음을 감췄고 몰래 그 시신을 거두어 황후가 타케우치노 스쿠네에게 해로를 통해 아나토로 옮기도록 하면서 아나토노토유라노미야(穴門豐浦宮)에 빈소를 차려 비밀리 장사를 지내도록 했다.

22일에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이를 황후에게 보고했지만 신라 공격으로 장사지내지 못하다가 201년 봄 2월에 장사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