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나 덴노

일본의 역대 덴노
52대53대54대
사가 덴노준나 덴노닌묘 덴노

일본의 53대 덴노.

간무 덴노의 서자였던 준나 덴노는 황위와의 거리가 멀었으나,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810년에 일어난 구스코의 변 때문이다. 헤이제이 덴노사가 덴노에게 양위하자 그동안 헤이제이 덴노의 총애를 받으며 권세를 누렸던 후지와라노 구스코와 그의 오빠 나카나리가 다시 한 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변을 일으켰다. 구스코 등은 사가 덴노의 폐위, 헤이제이 상황의 복위와 헤이조쿄 천도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결국 나카나리는 처형되었고 구스코는 자결했다.

이 정변으로 당시 황태자였던 헤이제이 상황의 황자인 다카오카 친왕을 대신해 오토모 친왕이 황태제가 되었다. 이때 오토모 친왕은 사가 덴노에게 자신의 신분을 황족에서 신하로 바꿔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사가 천황은 받아들이지 않고 배다른 동생인 오토모 친왕을 황태제로 삼았다고 한다. 823년 건강이 악화된 사가 덴노는 오토모 친왕에게 양위했다. 이로써 오토모 친왕은 37세의 나이에 준나 덴노로 즉위하였다.

준나 덴노는 성격이 온화하여 배다른 형인 사가 상황과도 원만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는 황태자로 사가 상황의 황자인 마사라 친왕을 세웠고, 보위에 오른 후에 자신의 이름인 오토모와 오토모씨가 중복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오토모씨를 도모로 바꾸었다.

율령 체제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준나 천황은 지방행정을 감찰하는 가게유시를 다시 설치하여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헤이안쿄의 치안 유지와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게비이시를 정비했다. 그리고 친왕임국과 칙지전을 설치하여 황실의 재정을 강화했다. 한편, 그는 경국집(經國集)(827년)을 비롯하여 백과사전인 비부략(秘府略)(831년), 영의해(令義解)(833년) 같은 시문집과 법전을 편찬하는 등 문화 정책에도 힘썼다. 시문을 좋아했던 그는 능운집(凌雲集)과 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등을 경국집에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준나 덴노는 황태제 시절에 지냈던 서원을 새롭게 정비하여 준나인(淳和院)에서 지냈다. 그리고 그해 3월에 닌묘 덴노에게 양위했는데, 이때 준나 덴노는 상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과 상황으로서 대우를 받는 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황이 둘이나 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사가 상황을 선태상천황, 자신은 후태상천황으로 불렀다. 그는 양위 7년 뒤인 840년에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골은 유언에 따라 산릉은 만들지 않고 교토에 있는 오하라의 산중에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