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무 덴노

일본의 역대 덴노
49대50대51대
코닌 덴노간무 덴노헤이제이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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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武天皇
737년 - 806년 음력 3월 17일 (양력 4월 9일)
재위 781년 - 806년

한글로는 환무 천황.

코닌 덴노의 아들이지만, 황후의 소생은 아니었다. 원래는 야마노베 친왕(山部親王)으로서 백제계의 여인이던 다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 소생의 1황자였다. 아버지는 덴지 계열의 황손으로 황통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아내가 덴무 계열의 쇼무 덴노의 딸 이노우에 내친왕(井上內親王)이었기에 황위를 이을 수 있었고, 내친왕의 소생인 동생 오사베 친왕(他戶親王)이 태자로 책봉되었었다. 그러나 황후와 아버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터에 저주 사건이 발생하면서 황후가 폐출되고, 자신이 황태자가 되어 황위를 계승하였다. 그 배후에는 간무 본인이나 후지와라 씨족, 모계의 도래인 세력 등의 음모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간무 덴노는 여러 가지로 백제와 연관되어 있다. 먼저, 일제 시기의 일본 언어학자인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廣三郞)는 '간무는 백제인이다' 라 말한 적이 있고, 비교적 최근으로는 아키히토 덴노가 2001년 12월 23일 자신의 만 68세 생일을 맞이한 기자회견에서 속일본기의 기록을 들며 간무 천황의 생모 다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 기록된 사실에 한국과의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언급하였다. [1]

백제인 떡밥 외에 더 중요한 것은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율령국가 시대인 헤이안 시대를 개창한 군주가 바로 간무 덴노라는 것이다. 간무는 덴지 계열의 세력이 남아 있고, 사원 세력도 강성하던 헤이조쿄(平城京, 奈良)를 떠나고자 하여 수도를 두 번 옮겼는데, 처음 784년에는 나가오카쿄(長岡京)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강의 범람 및 원령이 돈다는 소문과 함께 황실에 질병이 퍼지자 10년 후 794년에는 헤이안쿄(平安京, 지금의 교토)로 천도하였다.

그는 관제 및 군제와 토지문제의 변혁을 통해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율령제의 정비 및 통치안정을 꾀하였으며, 그에 따라 정부 조직과 기능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려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런 천도와 제도 정비 과정에서 자신의 부친의 옹립에 크게 기여했던 후지와라 가문을 신임하여 중용하였고 후지와라 가문의 여인을 황후로 맞이하였으며, 특히 후지와라 북가의 인물들을 발탁하였다. 그 덕에 헤이안 시대는 황가와 강대한 귀족 후지와라 가문의 협치라 할 정도로, 후지와라 가문이 융성하게 된다.

일본의 3대 사론서 중 하나인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기타바타케 치카후사, 14세기)에서는 "'옛날 일본(日本)은 삼한(三韓)과 동종(同種, 같은 동족)의 나라였다' 고 적힌 책이 전해내려왔는데, 이를 8세기 칸무 천황의 어대에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는 기록이 있다. 다만 책의 성격상 천황가의 해외 도래설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칸무 천황이 백제와 연관되어 있으면서 일본 최초의 율령제 시대이자 일본의 이미지가 정립된 헤이안 시대를 연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 실제로 이 시기부터 일본은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성격이 점차 사라지며, 견당사가 중단되고, 자국 중심적이고 폐쇄적인 국풍문화가 널리 퍼지게 된다.

교토 후시미구의 후시미 성 근방에 간무 덴노의 릉이 있다. 릉으로 가는 길이 잘 되있어 주민들의 산책로로 이용하는 듯.

  1. 역사스페셜에서 무령왕이 현재 일본 영토인 섬 출신이고 일본에서 자랐으며 당시 첫부인을 맞아들였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후 백제로 돌아와 맞은 백제 출신 후처가 성왕의 친모라는 주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