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구(삼국지)

陳球
(119 ~ 180)

후한 말의 인물.

자는 백진(伯真). 진미[1]의 아들, 진우의 아버지, 진규의 백부.

하비 회포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유학, 율령에 밝았으며, 양가 연간에 효렴이 되었다. 위군태수가 뇌물을 요구했고 진구는 뇌물을 바치지 않았으며, 위군태수가 독우를 하면서 진구를 단속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위군 15개의 현 중에 진구가 있는 곳만 뛰어났으므로 위군태수는 포기했으며, 삼공부에 벽소되고 고제에 올랐다. 시어사가 되었고 계양에 도적이 나타나자 주군에서 제어할 수 없으므로 진구는 영릉태수에 임명되었으며, 속관이 자신의 가족을 피신시키려고 하자 자신은 계양태수에 임명되어 국가의 군권을 받았으므로 처자를 피신시켜 국가의 위신을 훼손시킬 수 없다면서 화를 냈다.

형주가 평정되자 아이 한 명이 낭이 되고 진구는 위군태수가 되었으며, 장작대장이 되어 환제의 능원을 만들어 비용이 수만 전이 들었다. 남양태수에 임명되었고 호족을 규탄해 세력있는 가문에서 그를 비난했으며, 정위에게 체포되었다가 대사면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정위가 되었다가 172년에 두태후가 붕어하고 유해가 방치되었으며, 중상시 조절, 왕보 등이 황후에서 등급을 떨어뜨려 귀인으로 매장시키려 했다. 중상시 조충이 두태후를 대신해 풍귀인의 위패를 환제의 종묘에 배향하려 하자 진구는 조충의 의견에 반박하고 두태후의 위패를 선제(환제)의 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서 두태후를 환제와 합장할 수 있게 했다.

177년에 사공이 되었다가 지진으로 면직되었고 광록대부, 정위, 태상 등을 역임했으며, 178년에 태위가 되었다가 일식으로 면직되었다. 영락소부(永樂少府)가 되었다가 179년에 사도 유합, 보병교위 유납, 위위 양구 등과 함께 중상시 조절을 주살하려고 모의했으나, 발각되어 조절의 모함을 받았고 겨울 10월 14일에 감옥에 갇혔다가 62세로 사망했다.
  1. 陳亹, 광한태수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