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67년 1월 5일부터 투망작전을 실시하는 와중인 1967년 1월 10일에 발생한 대한민국 해병대의 전투이다. 한국 해병대가 크게 패배한 전투이자, 주월 한국군을 통틀어도 단일 전투로는 사상 최악의 피해를 입은 전투이다. 당시 우리 군당국의 공식적인 기록만으로도 전사 32명(후송중 전사자 포함), 부상 30명의 피해를 입었고 사살 18명의 전과를 올렸는데, 이마저도 뒷 부분에 다시 서술되듯이 당시에 우리측의 피해는 축소하고 전과는 부풀렸다는 의혹이 크다. [1]
전사, 부상, 포로, 행방불명 등 전체적 병력 손실이 1개 중대를 넘었기 때문에 대대 궤멸판정을 받아 해병 청룡여단 전체의 작전이 한동안 중지되기에 이른다.
2 아군 상황
1966년 8월 꽝응아이성 쭈라이 지역으로 이동한 한국해병 청룡여단은 1967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지역평정작전에 들어가게 된다.베트남 중부인 쭈라이 지역은 해방구(핑크빌)지역에 해당하는 베트남 중부지역이었기 때문에 VC(베트콩)들의 세도 컸다. 따라서 1월초부터 시작한 투망작전은 1월 5일부터 1월 14일까지 실시될 작전으로서 전술책임지역(TAOR)내의 평정지역을 확대할 목적으로 실시된 작전이었다. 전반기 작전(1. 5∼1. 10)은 집중폭우로 계획된 작전보다는 부대별 여건에 따라 소규모 단위로 작전을 실시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한국 해병대는 평정지역의 각 중대를 재배치를 목적으로 1966년 10월부터 예하 해병중대들의 재배치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던 시점이기도 했다. 따라서 청룡여단 3대대도 작전지역인 197고지에 제10중대의 전술기지를 개설하는 동시에 제10중대로부터 1개소대를 차출하여 197고지의 북쪽 안디엠(An Diem) 마을 부근에 대대관측소를 운용하였다. 이 마을에는 '빈손'군 민병대 1개소대도 배치되어 별도로 관측소를 운용하고 있었으나 '투망작전'초기인 1967년 1월 7일 월남측 사정에 의하여 철수하게 됨에 따라 대대관측소가 이를 통합 운용하게 되었다.
문제는 10중대가 주둔한 197고지 근처의 98고지에 VC들과 심지어 북베트남 정규군(NVA)들이 자주 출몰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로 인하여 적활동 중심지에 중대전술기지를 설치하여 그 곳으로 적을 유인, 섬멸한다는 여단의 작전방침에 따라 1966년 10월 18일 제10중대는 진지의 편성 및 구축요건도 훨씬 좋은 98고지(지도상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중대내에서 통용되었다)로 중대전술기지를 옮기게 되는데 당시 10중대는 적이 워낙 잘 출몰하는 98고지로 중대전술기지를 옮기면서 197고지의 중대전술기지를 메꾸는 사후처리를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여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떠났고 게다가 우기가 시작되고 있던터였다. 또 대대 지휘소가 있던 안디엠 마을 교류와 이동이 원활하였기 때문에 한국해병대는 사실상 1967년 1월 투망작전 실시 때쯤이면 아예 안전지대로서의 평정을 마쳤다고 보게된다. 우기 등으로 인하여 헬기로의 보급이 어려웠기 때문에 1개 소대를 동원하여 차량으로 보급하는 일들이 잦아졌고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 해병대에게 있어서 최악의 피해를 내는 가장 큰 원인이 될줄은 그때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1967년 1월 3일에는 10중대와 9중대간의 부대교체가 이루어진 상황이었다.
3 적 상황
한국 해병대가 98고지와 대대 지휘소 그리고 안디엠 마을과 주변 작은 마을이었던 짜빈박 마을간의 교유와 왕래가 원활한 것을 VC들과 NVA들은 계속 주시하여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베트남군은 해병대 9중대의 보급라인을 공격하기 위해서 200여명의 단대호 미상의 부대를 소규모로 침투하여 9중대의 보급라인 근처의 40고지(197고지와 98고지의 사이)로 집결하게 된다. 게다가 어둠을 이용하여 197고지에도 NVA들이 침투함으로서 사실상 적은 197고지와 40고지에 매복한 상황이 된다.
4 교전의 시작
한국 해병대도 3대대 민사장교 양영구 중위가 대민봉사활동을 하면서 적 1개 중대급 이상이 침투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안디엠 마을쪽으로 이미 적이 침투했다는 첩보를 확인하지만 대대 작전과장인 진우현 소령이 이를 무시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루에도 수백건의 첩보들이 들어와있어서 대대 작전과의 업무가 폭주한 상황이었고 그 첩보들 대부분이 허위로 판명나 있었기 때문에 대대 작전과로서는 믿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디엠 마을은 9중대가 주둔한 곳에서 불과 1.8km 떨어진 지역으로 사실상 아군 후방으로 적이 그것도 대낮에 침투했다라는 말을 믿기 어려워했다. 게다가 한국군 특유의 잘못된 조직 관습으로 대대장에게 보고가 되지 않았다. 결국 일선 장교들의 직능적 책임을 다하지 않은 점은 결국 피해를 키우는 원인이 되고 만다.
그리고 나서 1월 10일 3대대는 대대 지휘소를 이동하기 위해서 13시부터 지휘소 이동이 시작된다.9중대의 2소대가 지연되어서 14:10분에 이동이 시작되었다. 대대지휘부 자체가 화력이 빈약했고 절반이상이 권총으로 무장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197고지에서 전파방해가 계속되어서 이동중에 결국 통신이 두절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와중에 철수를 하고 있었다. 14시30분 아군 2소대가 40고지의 보급로를 절반쯤 지났을때 아군 첨병 앞에 2~3명의 NVA가 발견되면서 짜빈박 전투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대대지휘부 자체도 아군의 위력사격 혹은 화력수색으로 오인하여 그대로 행군 자세대로 정지한 상태였고 9중대 2소대 역시 40고지를 향해서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상호간 교전이 시작되자마자 우측의 197고지에서 경계소대와 대대지휘부를 향해 일제사격이 퍼부어지면서 한국해병대는 지리적 불리함 속에서 싸워야했고 상대적으로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있던 적은 한국군을 공격하는데 매우 유리했다. 더욱이 한국 해병대는 개활지였기 때문에 40고지에서 날아오는 사격은 그야말로 한국 해병대원들에게 매우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해병대 2소대와 대대지휘부 선두그룹이 조금이라도 이동하면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한국군의 피해는 계속 커질 수 밖에 없었고 사실상 움직일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더욱이 쏟아지는 비와 197고지의 전파방해로 한국 해병대 3대대는 전술망내의 9중대 외에는 지원을 요청할 곳조차 없었다. 초기 포병지원사격을 통한 화력제압을 요청하려고 했으나 197고지의 전파방해로 연결이 되지 못했다. 선봉의 경계소대가 사실상 전멸 상황에 처했고 대대역시 반수가 197고지의 일제사격에 피해를 입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대대지휘부의 통신병들만 골라서 사격을 해대는 통해서 경계소대도 통신병을 잃었고 동시에 선두의 2소대와 대대지휘부간의 교신은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이었다. 사실상 단절된 한국 해병대는 전멸위기로 몰리게 된다. 심지어 대대 지휘반에 파견되어있던 미해병 항공연락장교 오스왈트(Larry J. Oswalt) 대위도 피격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9중대는 2개 소대 병력 밖에 없었기에 적을 제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게 되지만 문제는 대대장이 교전지역을 대대선임부사관과 함께 이탈했다는 것이다. 명분이야 통신을 원활하게 하기위해서 9중대로 철수하는 것이었지만 현지의 지휘부를 제외한 두사람만의 철수였으니 문제가 컸다. 게다가 시점으로 선두의 경계소대의 소대장까지 전멸한 상황에서 대대참모들을 중심으로 지휘를 해야 하는 지휘 부재 상황이 벌어지게 됨으로서 고립된 한국 해병대의 피해는 커졌다.
작전보좌관 조경식 대위와 포병관측부사관 김충일 중사/4.2인치 박격포관측부사관 차용주 중사/ 작전부사관 김길우 하사 등으로 부사관을 주축으로 반격을 나섰지만 경계소대는 옴짝달싹 못한 상황이었고 대대의 화력은 미약하였기에 한국 해병대는 피해는 눈덩이 같이 불어나는 상황에다, 대대 군의관인 김수현 중위는 복부에 총탄 부상에도 불구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가히 최악의 상황이었다.
5 아군의 반격
유일한 통신망이었던 대대 지휘부와 9중대간의 교신을 통해서 9중대가 아군 구출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제9중대 전방관측장교 양석교 중위의 지위하에 106mm 무반동총과 81mm 박격포를 통해 40고지에 화력제압이 실시되는데 당시 시계가 워낙 안좋았던터라 명중률은 낮았고 탄착역시 계속 상탄이 나고 있었다. 그로인하여 9중대는 줄이기 200을 외쳐가면서까지 40고지에 대한 화력제압을 실시하지만 이 역시 부족했다. 또한 여단 직할 포병대대는 처음부터 무선망을 청취하고 있었으나 포병연락장교와의 직접교신 불능으로 제9중대 관측장교를 통해 부분적인 교전상황을 보고받으면서 전포병화력을 교전지역으로 조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전지역은 197고지로 인하여 사각지대일 뿐만 아니라 피아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사격지원이 불가능 하였다. 그렇기에 여단 직할 포병대대는 부득이하게 교전지역 외곽에 대한 차단사격만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9중대 역시 2개 소대밖에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기지 방어의 3소대를 제외한 몇 안되는 박격포반 병력도 출동해야했으므로 화력제압에 동원된 81mm는 사실상 10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한국 해병대의 상황은 다급한 상황이었다.
9중대 1소대가 15시 30분에 교전지역에 도착했지만 적의 화력에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2소대는 이미 전멸에 가까운 상황이었고 대대 지휘부 역시 전멸상황이었기 때문에 1소대 단독으로 반격작전을 구사할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의 화력이 워낙 거세서 1소대도 반격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러던중에 16시30분에 1소대 부소대장이었던 황병호 중사를 주축으로 1개 분대가 197고지의 사각에 해당하는 하단 우측으로 우회해서 대대지휘부와 접촉하게된다. 이 과정에서 당시 피격상태였던 미해병 항공연락장교 오스왈트(Larry J. Oswalt) 대위가 구출되는데 이 것은 결정적으로 해병대의 항공지원을 받게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곧바로 무장형 UH-1E 8대가 40고지를 향해 화력을 퍼부으는 동시에 헬기를 통한 부상자 수송과 탈출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197고지에서도 그냥 있지 않고 대공사격을 맹렬히 가했고 다수의 헬기 승무원들이 피격, 엎친데 덮친격으로 1대가 불시착하게 된다.
한편 1소대만으로는 힘들겠다는 9중대장의 판단으로 3소대에게도 출동명령이 내려왔지만 약간의 시간 지연과 더불어 3소대 역시 기지를 방어해야하므로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는 병력을 소대장 전우창 소위가 이끌고 나가게 된다. 하지만 3소대장의 저돌적인 지휘가 문제였다. 성급한 진격과정에서 3소대는 40고지의 근방의 적 매복조를 파악하지 못했고 덕분에 적의 매복공격에 걸려 전멸했다. 더욱이 NVA와 VC들은 앞서 전멸한 9중대 2소대와 마찬가지로 사후처리를 위해 한국군 부상병들을 확인사살까지 한다. 나아가 3소대원들의 시신속에 부피트랩을 설치하여 나중에 10중대가 전사자를 수습하는 과정에서까지 피해를 입게 만든다. 다만 유일한 생존자였던 염규진 일병만이 부상을 입은채 구출됐다.
한편 9중대의 반격은 신통치 않은 상황이었고 피해 역시 불어나면서 여단본부에서는 3대대 10중대에 출동명령을 하달하고 1/2대대의 1개 중대씩에 출동대기 상태를 발령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3MAF(미해병 제3상륙군사령부;The 3rd Marine Amphibious Force)은 악천우 상황에서 긴급지원이 어렵다고 통보, 겨우 치누크 3대만을 지원한다. 더욱이 여단 예비전력인 2대대 7중대도 새진지로 이동중에 부피트랩의 공격을 받아서 긴급헬기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 그야말로 한국군 해병대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때문에 3대대의 유일한 여단본부의 예비대였던 10중대가 출동하지만.. 이 출동 역시 악천우 문제와 미해병간의 지원문제를 두고 잡음이 발생, 17시 30분이 되어서야 작전지역에 도착한다. 그러나 안개와 대공사격으로 인하여 10중대 전원이 제대로 전개를 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18시가 넘어서야 한국 해병대 10중대가 20고지 부근에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상황은 반전하기 시작한다.
다행이도 10중대의 투입으로 대대 지휘체계가 다시 바로서면서 적에 대한 반격이 본격적으로 들어가나 이미 적은 점진적 철수작업을 거쳐 197고지를 마지막으로 전 부대가 철수함으로서 다음날인 11일에 있었던 한국 해병대의 반격은 무의미하게 된다. 오히려 전사자 수습과 사후처리 중에 적이 설치한 부비트랩에 아군이 피해를 입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6 참담한 패배 후
청룡여단 전체가 작전중지 상황이 벌어질 정도로 참담한 패배였다. 당시 1/2대대는 아예 작전중지에 대기상태가 되고 10중대는 9중대 기지에서 있다가 12일 오후에 대대 지휘소쪽으로 완전철수를 한다. 공식상으로만도 30여명이 당일 전투에서 전사하는 피해였지만 정확한 피해수치가 확실하게 나온건 없다고 한다. 더욱이 대대장이 대대지휘를 포기하고 증원을 핑계로 대대 선임부사관과 사실상의 도주가 됨으로서 대대의 지휘책임소재가 엉망이 되어서 한국군의 피해는 컸다. 더욱이 반격에 나서는 과정에서도 소대장의 신중치 못한 수색없는 기동이 적 매복에 걸려서 섬멸당하는등의 피해는 매우 심각한 지휘관의 능력 부재를 봐야했다. 게다가 첩보를 소홀히 다루는 문제점은 나중에 승리를 했지만 소모전을 치루어야만 했던 안케패스 전투에서도 반복된다.
더욱이 197고지의 NVA의 공격은 아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었는데 당시 197 고지는 10중대가 쓰던 전술기지가 파괴되었지만 형태 자체는 온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적의 제압사격에 아군이 큰 피해를 입거나 아군의 반격 및 고립부대를 구출하는데 상당한 피해를 입어야 했고, 40고지의 NVA와 근처 매복조를 지원하는데 있어서도 큰 역할을 함은 물론이거니와 적의 최종 퇴출지역으로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한국 해병대로서는 전술기지가 고지에서 어떤 위력을 가지는지 직접 경험하게 된 패배이기도 했다.
당일 전투로 1개 중대에 해당하는 피해를 입은 전례는 당시 한국군에게는 존재하지도 않았기에 충격도 컸고 대대가 전투불능의 전멸판정을 받은 것도 파월 한국군 중 처음이었다. 더욱이 이 전투에 관련해서 피해상황은 공식적으로 축소된 것이 아니냐라는 의혹이 있고, 정확한 피해 정보가 잘 공개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전과 역시 정확한 전과가 아닌 점을 감안한다면 아군의 피해에 비해 북베트남 정규군의 피해는 매우 적다고 할 수 있었다. 한국군이 북베트남 정규군 즉 NVA와 싸운 전례가 많지는 않지만 가장 혹독하게 피해를 입고 패배한 전투라는 점에서도 많은 교훈을 남긴 전투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청룡여단은 3대대 11중대가 짜빈동 전투에서 NVA(월맹군) 2개 연대 공격을 격퇴하고 승리하게 되어 설욕하게 된다.
이 곳에서도 많은 정보를 확인할수 있다.
이 전투는 기록은 되어있지만 당시 정부의 승전보만 울리고 싶은 마음 때문에 묻힌 교전중 하나이다. 오히려 참전용사들의 증언과 수기로 알려지고 자세한 연구를 통해서 밝혀진 전투이기도 하다.
국방부에서도 짜빈박 전투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투망 작전"을 통틀어서 "부분적 승리/목표 달성"으로 지정하고 최종적 전과를 선전한다. 이러한 사례는 오작교 작전이나 안케패스때도 있었다. 짜빈박 만큼 피해가 크지는 않았지만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에게 허를 찔려 손실을 본 교전들도 존재함에도 오히려 대대적으로 승리한 작전이나 전투들만 국방부가 보도하는 식이라 최근에 와서 밝혀진 교전이나 전투들도 존재한다.- ↑ 국내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졌던 월남전에선 상부로부터 책임을 면하거나 전과를 부풀리기 위한 조작 보고가 빈번하게 이루어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