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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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ệt cộng 越共
비엣꽁(베트콩, 월공)
250px-FNL_Flag.svg.png

파일:Attachment/베트콩/Việt cộng.jpg
베트콩의 깃발.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 대통령궁에 진입하는 북베트남군의 59식 전차도 이 깃발을 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월남전이 끝나고 베트남이 통일될 때까지 이 깃발이 남베트남 국기였다.

1 개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Mặt trận Dân tộc Giải phóng miền Nam Việt Nam: 맛쩐 전똑 자이퐁미엔 남비엣남)

제2차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공화국미국을 상대로 싸운 남베트남 내의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이다. 베트콩은 "베트남 공산주의자"(Việt Nam Cộng-sản, 越南共産)의 비하적인 명칭이다. 말하자면 "월남 빨갱이" 정도의 의미. 이것은 비칭이기 때문에 베트콩 스스로는 "해방군"(Quân Giải phóng, 軍解放: 꾸언자이퐁)이라고 자신들을 일컬었다. 베트콩은 스스로는 남베트남의 자생적 조직이라고 주장했으나, 미국과 남베트남은 이들은 북베트남의 명령을 받는 괴뢰조직이라고 보았다.

실제로도 해방전선에는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비공산주의자들도 참여하고 있었으나, 북베트남에서 내려오는 지령을 그대로 수행했기 때문에 북베트남의 산하조직임은 틀림없다. 참고로 북베트남군의 정식명칭은 "베트남 인민군"이었고, 베트콩 군대의 정식명칭은 "남베트남 해방군"이었다. 현재 베트남 공식 역사서는 "남베트남 해방군"은 "베트남 인민군"의 일부였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이는 베트콩이 북베트남의 산하조직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뭐 통일도 했겠다. 이제 눈가리고 아웅할 필요 없으니... 사실 민족 해방 전선의 핵심적인 척추로 할 만한 조직과 기원은 베트남 노동당 정치국의 관찰 아래 노동당원들이 주축으로 구성 되었음으로 하노이 정권 산하 조직이었던게 맞지만, 이런 상부에서의 관점이 아니라 개개인 구성원들이나 산하 조직원들은 북베트남과 전혀 연고도 없고, 굳이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들도 대거 참가 했으며, 이들은 대부분 공식적으로는 다른 이런 저런 시민 운동가 조직이나 학생회, 농민 자치회 등의 간판을 걸어서 활동했다.

게다가 대미 항전과[1] 게릴라 투쟁의 분수령이었던 1960년대 초반에서 테트 공세 까지는 해방전선의 지휘체계 자체도 최상부의 직접적으로 하노이에 있는 베트남 노동당 정치국과 연결이 와닫는 인민 혁명당 남베트남 행정 위원회[2] 정도나 직접적으로 하노이의 지령을 받지, 혁명 위원회 산하의 해방 전선 조직 자체는 북베트남 하노이 정부와 맞닿을 접점이 적었으며, 하노이 정권 측에서도 현실적으로 남베트남의 무장 투쟁 모두를 총괄적으로 세세하게 지휘하는 것의 어려움을 알고 있어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독일군의 임무형 지휘체계 같이 전략적 목표만 달성할 수 있으면 그 과정은 현지 조직에게 많은 걸 넘겼기 때문에 적대하는 미국측에서는 물론이고, 실재로 해방전선 대원들도 70년대 들어서 하노이 정부가 전면에 나설 때 까지는 북베트남 정권을 '우방 세력'으로 인식하지, '지령을 하달 받는' 상하 관계라고는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전후 통일 베트남 당국에서 "우리 산하 세력이었던거 맞다"라고 인정하기 전 까지는 그 관계가 상당히 애매모호해 보였던게 사실이다.

이들은 게릴라와 정규군으로 이루어졌으며, 다수의 구성원들이 남베트남 출신이나, 북베트남 정규군도 파견되어 현지 자생 조직으로 위장 합류해 싸웠다. 통킹만 사건이후 북베트남과 미국간에 공식적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구정 공세이후 미군의 반격 때문에 베트콩이 궤멸상태에 이르자, 베트콩 지휘부는 북베트남에서 내려온 이들이 맡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농촌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전과 도시를 중심으로 한 테러를 적절히 배합하면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골탕먹였다. 이들은 세계최강의 미군, 엄청난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군, 거기에 한국군을 비롯한 남베트남 지원국들과 20여년에 걸친(1955~1975) 전쟁을 벌이면서 엄청난 사상자(전사자만 20만에 달했다)를 냈으나, 역으로 미군에도 큰 타격(전사자 약 5만명)을 입혔다.

1969년 8월에는 남베트남 공화국 임시혁명정부(Chính Phủ Cách Mạng Lâm Thời Cộng Hòa Miền Nam Việt Nam)라는 지하 정부를 세웠고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쿠바, 북한, 알제리 등과 대사급 외교관계까지 맺었다.

결과적으로 1973년 파리 평화회담 휴전을 맺어 휴전을 빌미로 미군의 철수까지 이끌어냈으며, 휴전 당사자는 북베트남, 베트콩(북베트남의 괴뢰조직이지만), 남베트남, 미국의 4자로서 휴전협상의 한자리를 당당히 꿰어찼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군했고, 많은 장비들을 남베트남에 물려주고 떠났다. 남베트남군의 공군력은 당시 세계 4위를 자랑했다. 그러나 오일 쇼크이후 돈에 쪼들리던 남베트남은 1400대에 이르는 작전기를 굴릴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움에 처했다. 게다가 미국 정계는 당시 워터게이트 사건때문에 1974년 8월 닉슨이 사임했고, 뒤를 이은 제럴드 포드는 부통령에서 계승한 대통령이라 취약한 리더십 때문에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의회는 포드의 남베트남 지원안을 계속 부결시켜 버렸다.

그리고 북베트남은 국경충돌을 일으키면서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고, 1975년 3월 시범적인 공세에서 남베트남군이 무력하게 무너지자, 휴전협정을 파기하고 바로 대공세를 시작했다. 결국 1달의 공세 만에 남베트남군의 방어지는 모조리 무너지고 사이공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군에게 포위되었다.

이후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과 베트콩군에게 사이공이 함락되고, 남베트남의 대통령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 楊文明)은 무조건 항복했다.[3] 베트남 공화국은 멸망하고 베트콩이 주관하는 "남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졌다. 남베트남 공화국은 북베트남의 사실상의 괴뢰정부였다. 주석은 응우옌흐우토(Nguyễn Hữu Thọ, 阮友壽)[4] 이들은 1976년 7월 정식으로 통일하여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건국되었다. 베트콩은 공식적으로 1977년 해산되었고, 이후 통일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공산당이 주도하는 "베트남 조국전선"[5] 에 참여하고 있다.

2 북베트남(월맹)과의 관계

이들(베트콩이나 괴뢰 남베트남 공산정부 출신들)이 이후 통일 베트남에서 숙청당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근거없는 루머이다. 일단 구정 공세 이후에는 베트콩 주력은 남베트남인이 아니라 북베트남에서 파견된 이들이었다. 그 이후 베트콩들은 원래부터 북베트남 출신인데, 그들을 숙청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괴뢰정부의 각료들은 주로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던 친공산계 명사들이었는데, 위의 응우옌흐우토도 통일 베트남에서 국가주석(1981~1982)까지 지냈고(실권은 없었지만), 부주석도 1990년대에 사망하는 등, 사실과 다르다. 아마도 80년대 반공 교과서에서 옮긴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에는 공산권 정보가 전혀 없던 때라서 사실과는 다른 정보가 실려있는 경우가 흔했다. 물론 반공적 교육의 영향도 상당히 있을 테고.

그러나 베트콩 정부의 군대는 북에서 내려온 북베트남군 계열과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자생적 민족주의 계열로 나뉘는데, 68년 구정 공세로 베트콩 군대가 궤멸적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나 그 이후에도 민족주의 계열 부대는 상당한 규모로 존재했었다. 이들 "민족주의" 계열의 군대와 "남베트남 내의 반정부 활동가"로 베트콩 정부에 몸담았던 이들은 실제로 남베트남 패전 전후 숙청되었다. 그런데 저렇게 북에서 남파된 인원들도 순수하게 남베트남 현지와는 상관이 없다고 딱잘라 말하기는 힘든게, 애초에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남북 베트남의 분단 까지 베트남 내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은 호치민을 비롯한 무수한 혁명가들의 고향이며 1930년 응에안 소비에트 봉기로 민족 혁명의 성지로 추앙 받았던 응에안, 하띤 성 다음으로 사이공 소비에트를 비롯한 남베트남의 산업 도시들이 가장 크고 강했다. 이들 중 다수는 남북베트남이 분단 되자 북베트남으로 월북하였다가 60년대 초 북베트남측에서 대남 전쟁 개전 이후 다시 하노이에서 재월남 시킨 경우이다. 즉 원래 뿌리나 출신도 남베트남인데, 50년대~60년대를 북베트남에서 보내다가 전황이 게릴라전에서 정규전으로 변하면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온 경우가 다수인지라 "원래 남베트남인들의 자생적 조직이었던 해방전선이 북베트남 정권에게 집어 먹혔다"라는 식으로 서술 하는 건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원래 좌익 성향이 강했던 영남 지방 출신의 남로당원들이 한번 북쪽으로 올라가 정권 내에서 자리를 굳히다가 다시 남파 된 경우란 의미다.

남북베트남 사이에 오래된 역사적, 문화적, 기질적 차이가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20세기 들어서 서로를 아예 이질적인 다른 나라, 다른 민족으로 인식하고 통일 전쟁이 아닌 서로에 대한 분리를 주장했던 주요 정치 세력은 소수민족들 제외하고 하노이측이든, 사이공측이든 베트남 전쟁기간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피상적인 군사적 분석을 넘어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심도 있는 정치적, 역사적 분석과 이해를 위해서는 이렇게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미국 중심의 관점 뿐만 아니라 베트남 현지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이를 감안 하면 1920년대 대불 독립 운동가들의 세대 교체 시절 부터 유기적으로 현지 사정에 맞추어 발전해 온 베트남 민족주의, 사회주의 세력과 이들이 설립한 월맹 정부의 성격이 딱 이렇다 규정 짓기에는 복잡한게 너무 많다.

"종전 승리 퍼레이드에서 "탕(쯔엉뉴탕)"은 전에는 남베트남인들이 장악했던 부대가 북베트남인들로 교체된 사실을 알아챘다."

- "Porter, Gareth (1993). Vietnam: The Politics of Bureaucratic Socialism" 중에서 -

남베트남의 반정부 인사로 베트콩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낸 쯔엉니으탕(Trương Như Tảng)의 경우 북베트남 정부가 베트콩 내에서 민족주의 계열들을 정부와 군에서 축출시키고 북베트남 출신으로 교체하는 과정을 목격했으며 종전 이후에도 계속되는 북베트남 측의 이러한 행태에 환멸을 느끼고 프랑스로 망명했다. 망명지에서 그가 쓴 "A Vietcong memoir"(1985)은 그의 베트남 통일과정에서의 투쟁기록과 함께 북베트남 측의 남베트남 정부인사와 베트콩내 민족주의계열의 숙청과정을 회고하고 있다. 쯔엉니으탕 이외에도 북베트남군 고위 장교 출신으로 이러한 숙청 행태에 염증을 느껴 프랑스로 망명한 이들은 여럿 있으며, 이들은 망명지 프랑스에서 전쟁 중 북베트남이 남베트남 지역에서 벌인 양민 학살극과 전후 남베트남 내 반정부-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숙청 과정을 증언한 바 있다. 즉, 베트콩 세력들 중 실제로 숙청당한 세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베트남 전쟁/한국군 항목에도 나와있는 내용이지만, 베트콩은 1960년대 초반 (미군 개입 이전이다) 남부 촌락지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었다. 물론 북베트남이 학살을 적극 주도한 북한 같은 급은 아니었다지만 베트콩을 어쨌든 우군으로 활용한 게 사실인데, 전쟁 이후 토착 남베트남 해방전선 소속 인사들을 숙청한 것도 그 때문일 수 있다. 이들은 남베트남 정부 못지않게 일반 베트남인들에게 원한의 대상이었다.

3 전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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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베트콩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 제대로 된 군복도 없이 베트남 농민들의 일상복인 검은 파자마에 정글모 내지는 농라라고 불리는 삿갓, 거기에 맨발에 신은 폐타이어 샌들 차림에 AK-47 소총 등을 들고 다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게 일반적이다. 심지어, 이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을 정규 미군을 베트콩 게릴라들이 격퇴한 전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엄연히 정규군이었던 북베트남군은 커녕 베트남이 남북 분단되고 남쪽에 미국과 동맹인 국가가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데 뭘 제네레이션 킬의 브랫 콜버트왈: "포크 너 베트남전때 검은파자마 애덜 날렸던 거 모르냐? 파자마 부대 존경하라구"

실제로는,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전투력이 그렇게 높은 집단은 아니었다. 민간인과 평소에 구분이 안 가 색출이 힘들다는 것 정도가 골칫거리였으나, 실제 교전시엔 미군에게 밀려버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미군 참전자들도 대개 베트콩은 시원찮았으나 북베트남 정규군들은 무섭게 싸운 편이라고 회고하는 게 대세다. 그리고 애초에 게릴라 집단 자체가 세계 최강의 정규군과 대등한 화력이었다고 말하는게 바보다. COSVN의 전술 지침은 항상 허접한 남베트남 정규군을 집중 공격하여 전선에 구멍을 내고 물자를 탈취하며, 미군 등 화력도 빠방하고 훈련도 강하게 된 타겟을 상대로는 테러, 저격, 사보타쥬 등을 통한 '부드러운 전술'을 강조했지, 전면전에 나서는 건 미리 계획해 놓았던 기습 루트에 뻔하게 걸어 들어간 것 처럼 모든 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 되는 경우를 빼고는 교전을 피할 것을 지침으로 삼았다.미군 상대로 그 따위로 전쟁 했다간 베트남 전쟁이 미국이 처음으로 완패한 전쟁이 아니라 처들어가서 조지고 부시고 다 해먹은 수 많은 대외 개입 사례 중 하나로 남았겠지 실재로 남한의 빨치산들은 저렇게 어설프게 정규전 하려고 들었다가 알아서 자멸해 주어 베트남 같은 상황은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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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했듯, 북베트남 정규군으로부터 피복 등 물자나 교육훈련 등 각종 지원을 받아 정규군에 준하는 차림새를 한 경우도 많았고, 아예 베트콩으로 위장하고 남파된 북베트남 정규군들 같은 경우는 자신들의 군복에서 계급장 등만 제거하고 다니기도 했다. 도시 지역에서는 캐쥬얼한 일상복이나 드문드문 정장 차림을 한 베트콩들도 존재했다.
  1. 첨언으로 베트남 현지에서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적은 중간에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지만 둘 다 이어진 하나의 베트남 민족 해방전쟁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서방과 우리나라에서 자주 사용하는 '베트남 전쟁'보다 '대불항전', '대미항전'으로 일컬는게 더 일반적이다. 현지 베트남 인민들 입장에서야 사실 소강 상태 없는 전시 상황이 45년 8월 혁명 이후로 50년대 후반의 5년 정도 밖에 안되는 짦은 공백기를 제외하고 주욱 계속 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긴 전쟁으로 받아들이는게 더 자연스럽기도 하다.
  2. 서방 측에서는 그냥 남베트남 중앙위원회, 즉 COSVN으로 불린다.
  3. 80년대 한국 도덕교과서에는 그가 베트콩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기술되었지만, 실제로는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주다가 프랑스 망명을 허가해줬다.
  4.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변호사 출신이며, 주로 독립운동가를 변호해서 명성을 얻었다.
  5. 통일전선 조직으로 우당(友黨)과는 좀 다른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