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빈동 전투

짜빈동 전투
날짜
1967년 2월 14일 ~ 2월 15일
베트남 공화국 쾅나이 성 추라이 짜빈동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대한민국베트남 민족해방 전선
지휘관중대장 대위 정경진불명
병력해병대 294명
미해병 항공함포연락반(ANGLICO) 2명[1]
보병 2400명
피해 규모전사 15명
부상 33명
전사 234명
포로 2명
결과
대한민국 승

1 개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벌인 전투.

1967년 2월 14일부터 동월 15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월맹, 베트콩과 대한민국 해병대 제2 해병여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베트남군의 지휘관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2400명 이상의 병력이 참전했으며 이 중 243명이 전사, 2명이 포로로 잡혔고 국군은 장교 10명, 사병 284명으로 구성된 2여단 3대대 11중대가 참전했으며 이 중 15명 전사, 33명이 부상했다. 11중대 중대장은 정경진 대위였다.

이 승리로 당시 중대전술기지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되었다.[2]

2 한국군 상황

1966년 9월 23일 제2 해병여단은 베트남 중부 꽝나이성 북부지역 추라이로 이동해 지역평정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해당 지역은 베트콩의 활동이 상당히 왕성한 지역으로, 북베트남 정규군의 침투가 용이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해당 지역 일대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언제 어디서든 해병 2여단을 공격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었고 1967년 2월이 되면서 기습공격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 징후 또한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리고 2월 14일에서 15일 밤 사이에 걸쳐 규모가 증강된 연대 규모의 북베트남군이 짜빈동에 위치하던 11중대의 전술기지를 급습했다.

3 전투 경과

3.1 2월 14일, 제1 차 공격

제11 중대가 주둔하고 있던 짜빈동 마을은 꽝나이시(市) 북쪽 12km 지점에 위치했다. 기지는 둘레가 800m, 높이가 30m 정도 되는 구릉지대에 타원형으로 설치되었다.

베트남군의 기습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해병여단은 예하부대에 경계를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11중대는 여단의 지시에 따라 주변 지역의 수색 및 정찰을 강화하면서 기지 보강 공사에 착수했다. 주요 화기의 진지를 유개화하며, 기존에 구축했던 교통호와 개인호를 보강했다. 조명지뢰와 대인지뢰를 추가로 매설하고 많은 부분을 보완하면서 2월 14일 밤을 맞았다.

1967년 2월 14일 밤에는 초승달이 떴으나 오후 10시 무렵부터 짙은 안개와 가랑비가 내려 시야 확보가 어려워졌다. 오후 11시 30분 경에는 베트남군 침투부대가 3소대 전방기지 외곽 철조망을 폭탄통으로 폭파시켰다.

중대는 즉각 81mm 조명탄을 띄워 적정을 확인했고 1개 소대 규모의 적들이 숲으로 도주하는 것을 발견, 집중사격을 가했다. 베트남군은 산발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중대의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들이 도주한 후 중대장은 2차 공격에 대비해 50퍼센트의 병력을 전투배치하고 경계를 강화했다. 이 때를 이용해 11중대는 중대의 방어태세와 상급부대의 지원화력을 재점검함으로써 예상되는 취약점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다.

3.2 2월 15일, 제2 차 공격

11중대는 적의 제1 차 공격이 감행된 후 전투준비를 마쳤다. 오전 4시 10분 경 지난 밤 적과 교전한 바 있는 제3 소대 전방에서 은밀히 접근하는 적을 발견했다. 이에 따라 중대장은 즉시 전 병력을 완편 배치했고 적들을 최대한 끌어들여 기습적으로 사격을 가하도록 지시했다. 이어서 조명탄이 터지자 중대전술기지를 포위하던 베트남군은 기지를 향해 집중적인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11중대 역시 대응사격을 가함으로써 한 동안 포격전의 양상이 지속됐다.

베트남군의 공세는 상당히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군의 집중적인 포화 속에서도 3소대 정면에서 돌파를 시도하던 베트남군 주력은 외곽 철조망을 폭파하고 3소대 진지를 돌파했다.

이어서 1소대 지역의 일부 진지도 돌파당했다. 11중대는 모든 가용병력을 모아 역습을 감행했으나 중대 전체가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사이 2여단 본부에서는 11중대의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 판단하고 진내 사격, 즉 브로큰 애로우 상황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11중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날이 밝으면서 11중대의 역습은 성공했고 베트남군도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하지는 못했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병사들이 부상했으나 후송은 생각지도 못했고 전체적으로 난전이 벌어졌다. 이학현 상병은 교통호에 적이 진입하자 수류탄을 폭파시켰으나 본인도 산화했고 송용섭 일병은 기관총 사수가 전사하자 뒤이어 사격을 지속하다가 본인도 전사했다.

진지를 돌파했던 적들을 모두 사살한 것은 오전 7시 20분 경으로 상황이 반전되자 기지 외곽에서 저항하던 1개 중대 규모의 베트남군도 북서쪽으로 도주했다. 여단은 그쪽으로 지원화력을 집중했다.

한 편 11중대의 피해가 크자 2여단은 오전 5시 20분 경부터 6중대를 비상대기 시켰다. 그러나 비와 안개로 시야가 불량했기 때문에 6중대는 오전 7시 30분에야 공중기동으로 주변 수색작전에 투입되었다.

4 전투 결과

확인된 11중대의 전과는 적 사살 243명, 포로 2명[3] 등이었으며 확인된 전과 이외에도 다수의 적들이 포격 등으로 인해 사망 혹은 부상한 것으로 추정된다. 확인된 베트남군의 시신 중에는 1연대 90대대장을 비롯한 다수의 장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11중대는 증강된 연대 규모의 북베트남 정규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중대전술기지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국군의 전투력을 과시했다. 앞선 두코 전투에서 대두된 중대전술기지의 중요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전투였다. 그리고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별명이 생겨났다.
  1. 미해병대 연락부대로 함포나 포격, 항공지원을 하는 부대였다. 한국 해병대 청룡은 당시 여단 규모라 백마나 맹호처럼 포병부대가 크지 않아서 미군에게서 지원을 많이 받아야 했다.
  2. 바로 이 전술기지를 제대로 철거하지 않고 방치한 것을 북베트남이 꿀꺽한 결과, 짜빈박 전투란 참사가 터지고 말았다. 더욱이 청룡여단 3대대는 바로 그 짜빈박 전투의 당사부대이다. 60~70년대 전쟁에서 국군의 중대전술기지가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역지사지로 보여준 사례다. 전사 32명 중상 30여명에 피해를 입었다.
  3. 3명이라는 보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