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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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昊)상호/Chang Hao

1 개요

1976년 11월 7일생 , 중화인민공화국의 바둑기사

2 설명

녜웨이핑의 제자로 녜웨이핑이 조훈현에게 밀린 이후, "나에게는 무서운 제자가 있다"며 호언장담했는데 그 제자가 바로 창하오와 마샤오춘
창하오는 소년시절부터 녜웨이핑(聶衛平) 마샤오춘(馬曉春) 시대를 잇는 중국 1인자 계보로 꼽혔다. 만 10살 때 프로가 되고 입단 3년 후 중국 실력서열 7위까지 올랐으니 그럴 만 도 했다.20세 되던 96년 제10회 중-일 슈퍼대항전서 일본 간판급 타자들을 상대로 5연승,중국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듬해 11회 같은 대회 역시 창하오의 6연승에 힘입어 중국이 우승했다. 21세 때인 97년엔 당시 1인자 마샤오춘을 3대1로 누르고 첫 본격 타이틀인 천원 타이틀을 획득했다. 대륙의 1인자로 군림하기 시작한 신호탄이었다. 99년에는 九단으로 승단했다.든 중국인들은 굳게 닫혀있는 세계의 문을 창하오가 다시 열어줄 것으로 확신했다. 98년 여름 제11회 후지쓰배 때 찾아왔다. 상대는 한국의 이창호. 창하오보다 한 살 위의 이창호에게 결승에서 무너지고 2001년 말, 창하오는 제6회 삼성화재배 준결승서 숙적 이창호를 잡는다. 그리고 결승에 올랐다. 이번에야 말로 첫 세계제패의 꿈을 이룰 찬스. 상대는 48세의 조훈현이었다.그러나 이번에도 1대2 역전패였다. 2국의 반 집 패가 특히 뼈아팠다. 중국 팬들의 창하오를 향한 질타의 소리가 높아져 갔다. 그러던 중 2002년 도요타덴소배가 새로 창설됐다.창하오는 이듬 해 초로 이어진 결승까지 솟아올랐다. 한국의 샛별 이세돌을 2회전서 만나 탈락시켰다. 결승에서 창하오를 막아선 기사는 또 이창호였다. 백을 쥔 창하오가 꾸준히 리드해가자 중국 검토진들은 축제 무드로 들떴지만 바둑은 기어이 흑 불계로 끝났다. 창하오는 2004년에 접어들면서 다시 세계 정상권 노크에 힘을 낸다. 송태곤 최철한을 제물삼아 제2회 도요타덴소 배에서, 그리고 유창혁 쿵제 송태곤을 딛고 제5회 응씨배에서 잇달아 결승 고지를 밟은 것이다.
그 해 12월 최철한과의 응씨배 결승 두 판이 먼저 서울서 시작됐다. 1승 1패를 기록한 상황에서 일단 휴전. 그리고 곧바로 도요타덴소배 결승으로 이어져 이세돌과 한 판씩 주고받았다. 마지막 최종국. 그야 말로 필승지세였건만, 최종 승자는 이번에도 창하오가 아니었다.모두들 창하오가 귀신에 홀린 모양이라고들 했다. 시상식을 어떻게 치렀는지도 몰랐다. 그는 눈물을 훔치며 준 우승컵을 받았다. 세계 기전 결승에 여섯 번 모두 패한 실망감으로 중국 팬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인터넷은 창하오 성토장이 됐다.[1]

이때까지 세계대회에서 결승전 6전 6패. 이창호에게 3번, 조훈현에게 2번, 그리고 이세돌에게 1번을 당했다. 창하오의 당시 나이 이미 29세였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제5회 응씨배 결승이 베이징서 속개됐다. 상대는 한국의 최철한 九단, 도요타덴소배를 패배한 후유증으로 창하오는 7번째 준우승에 그치고 한국은 응씨배 석권 전통을 이어갈 것이란 예상이 많았지만. 하지만 결과는 창하오의 우승이었다. 3대1의 스코어로 마침내 어른 키만 한 응씨배 우승 트로피가 창하오의 가슴에 안겼다. 콩라인 탈출 [2] 그 후 2005년 삼성화재배, 2006년 춘란배를 우승하며 준우승 전문가라는 이미지를 불식시켰다. 특히 이창호에게는 철저한 약자 신세였으나 세계 대회 결승에서 연거푸 이창호를 제압하며 천적이라는 꼬리표를 뗐다. 하지만 구리와 이세돌에 밀려 지금은 정상권에서 밀렸다.
  1. 스승 녜웨이핑은 “그토록 유리했던 바둑을 패했다니 믿을 수 없다”며 탄식했다. 사형인 마샤오춘은 백의 침투 부대가 살아간 순간 즉각 바둑을 보고 있던 컴퓨터를 꺼 버렸다고
  2. 결국 최철한 九단은 2008년에 이창호를 꺾고 우승컵을 가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