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샤오춘 馬曉春(마효춘) / Ma Xiaochun | |
파일:Attachment/030610-ma.jpg | |
직업 | 바둑기사 |
소속 | 중국기원 |
생년월일 | 1964년 8월 26일 |
국적 | 중화인민공화국 |
출신지 | 저장 성 사오싱 시 |
학력 | 추가바람 |
입단 | 1982년 |
단급 | 九단 |
타이젬바둑 닉네임 | 추가바람 |
馬曉春(마효춘) / Ma Xiao Chun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프로바둑기사. 1964년 8월 26일 생. 이창호의 전성기가 시작되기 전, 세계 1인자 자리를 반짝 차지했던 인물.
자기 이름을 간체자로 쓰는 것을 극혐해서, 馬曉春이라는 정체자만 죽도록 고집하기로 유명했다. 중국 국내대회에서 자기 자리에 간체자인 "马晓春"이 적혀 있으면 정체자 프린트한 종이로 덮어 씌우기 전까지 앉지 않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2 설명
전성기에는 중국 명인전에서 13연속 우승을 기록할 정도로, 녜웨이핑 이후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바둑의 1인자였다. 1995년에는 당시 둘뿐이었던 국제 기전인 후지쯔배와 동양증권배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며 세계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섰다.[1] 그야말로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천재 기사였으나 이창호가 국제 기전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온갖 국제 기전에서 이창호에게 번번이 덜미를 잡히며 2인자가 되었다. 이창호와의 통산 상대 전적이 6승 25패. 노이로제 걸릴듯
바둑TV 김성룡 기적의 묘수 100에 나온 이창호의 축머리 묘수 한방.
이창호한테 상대전적이 6승 25패나 된 계기가 있다. 1997년 동양증권배에서 이창호와 만났을 때 이창호한테 축머리의 묘수 한방을 얻어맞은 것이 결정적 타격이었던 것. 축머리의 묘수를 얻어맞은 이후로는 이창호한테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사실 그때 당시 이창호에게 맥을 못추던 것은 마샤오춘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기사였다.[2] 그러나 그 실력만큼 대단한 자존심 때문일까. 계속해서 이창호에게 패하자 서서히 부진한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은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변화무쌍하며 화려한 요도(妖刀)로 대륙을 재패했던 기재가 천외천의 존재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사례라 할 수 있다. 旣生春 何生鎬
2003년 1월 3일 병환을 이유로 명인전 첫 번째 대국을 기권하고 2003년 2월 14일 제2회 아시아 바둑 단체전 중국 대표팀 선발 대국에서 선발전 참가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는 등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심각한 모습을 보였다. 모두가 탐을 내는 중국 대표팀 선발 자격을 왜 포기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마샤오춘은 “저 무서운 용과 호랑이들을 보라. 나는 지금 저들과 도저히 대적할 힘이 없다”라고 답했다. 언제나 당당하고 오만했던 그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자조였다.
기풍은 굉장히 감각이 좋은 실리파이며 타개에 능하였다. 전성기 시절 ‘마요도(馬妖刀)’라 불리웠을 정도로 요사스러운 행마는 감히 따라올 자가 없었다.
3 기타
탁월한 재능과는 별개로 입이 방정맞은 편이다. 그는 현역 시절 이창호를 맞수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는데, “바둑계의 천재는 나와 이세돌 뿐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까마득한 후배 아닌가 정작 그 이세돌은 이세돌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실력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기사가 누구냐는 질문에 "마샤오춘은 빼 주세요"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로는 이창호를 인정했었는지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한번은 중국에서 열린 국제 대회 후, 중국기원측 사람과 한국기원측 참석자들이 모여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마샤오춘은 거만하기 그지없었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높은 사람이 술을 권해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마치 아랫사람이 주는 걸 받듯이 했는데, 사실 이것은 그날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마샤오춘의 평소 태도였다. 피아노도 일류급으로 연주하며 바둑 실력도 뛰어난 그는 스스로를 천재라 자부하며 좀체 남을 존중하지 않았던 것. 그러다가 술이 돌고 돌아 이창호가 마샤오춘에게 술을 권하기 위해 술병을 들고 그에게 가게 되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태평스레 앉아 있던 마샤오춘이 이창호를 보고 그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술잔을 받았는데 이것을 본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마샤오춘이 이렇게 술잔을 받은 것은 이창호가 유일했다고. |
사실 이창호 九단은 자신과 달리 바둑 외의 잡기에도 능한 마샤오춘 九단을 부러워했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후에 꽤나 친분을 쌓게 되었다. 마샤오춘이 은퇴를 밝혔을 때 그것이 자신의 탓이 아닌가 하여 괴로워한 것도 이창호였다.
은퇴 후에도 성깔은 어디 안 가는 듯, 2010년 3월 춘란배 세계기전 16강전을 평한 블로그 글에서 대회 운영을 비판하며 '춘란배(春兰杯)'를 '준란배(蠢兰杯)'로 써서 어그로 탱킹 능력이 죽지 않았음을 한껏 과시했다.[3][4] 열받은 중국 바둑 팬들은 그의 이름을 馬曉春 대신 馬曉蠢[5]으로 불렀다카더라. 덧붙여 이 사건에 대해 기자가 전화 인터뷰를 시도하자 “그것은 내 마음대로 쓴 것이니 상관하지 마시오”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고 한다.(...)
한때 중국 바둑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기도 했는데, 바둑 리그 선수 선발 문제로 스승인 녜웨이핑과 충돌하는 등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다가 기어이 감독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감독직은 같은 정상급 중국 바둑기사 위 빈이 물려받았다. 녜웨이핑이 중국 바둑계에서 가진 권위는 가히 절대적이기 때문에 중국기원과도 영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4 저서
- 바둑병법 36계 - 중국 바둑기초 마샤오춘의 : 2003년 대한민국에 번역 출간되었다. 한국에 번역 출간된 마샤오춘 九단의 유일한 저서. 여기서 마샤오춘이 마이너스 계가법이라는 것을 창안하고 알려주는데, 흑집을 먼저 계산한 뒤에 백집을 따로 계산하는 것이 아닌, 백집 한 집마다 흑집을 하나씩 까 내려가는 방식이다. 이 마이너스 계가법으로 했을 시 +7(덤 7집반 기준)이면 백 승, +8 이상이면 흑 승이라는 논리. 아주 좋은 책인데 한국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안 알려져 있다.
- ↑ 이창호는 당시 저 두 대회에서 초반에 탈락했다. 특히 동양증권배에서는 16강 문턱에서 완패를 당했는데, 그 완패를 안긴 주인공이 바로 마샤오춘의 스승인 녜웨이핑이다.
- ↑ 당시 창 하오, 위 빈, 조치훈 같은 1류 프로 바둑 기사들도 이창호 九단과는 만나기만 하는 지는 수준이었다.
- ↑ 蠢자는 '꾸물거릴 준'자로, 꾸물거리다, 멈칫거리다 등의 뜻과 더불어 오만불손하다라는 뜻이 있다. 마샤오춘은 이 "오만불손하다."는 표현으로 사용한 것.
- ↑ 이 둘은 한국어로도 발음이 비슷하고, 중국어로는 성조만 다르다. 春은 chūn으로, 蠢은 chǔn으로 읽는다.
- ↑ 마샤오춘 본인의 오만불손함이나 신경쓰라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