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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카지미에시 데이나 (Kazimierz Deyna) |
생년월일 | 1947년 10월 23일 |
사망일 | 1989년 9월 1일 |
국적 | 폴란드 |
출신지 | 스타로그라드 그단스키 |
신체 조건 | 180cm |
포지션 | 공격형 미드필더 |
소속 클럽 | ŁKS 우치 (1966) 레기아 바르샤바(1966 - 1978) 맨체스터 시티 FC(1978 - 1981) 샌디에고 사커스 (1981 - 1984) 샌디에고 사커스(1981 - 1987)(인도어 사커) |
국가대표 | 97경기, 41골[1] |
1974 Ballond'or | ||
수상 요한 크루이프 | 2위 프란츠 베켄바워 | 3위 카지미에시 데이나 |
레기아 바르샤바 영구결번 | |
No.10 카지미에시 데이나 |
목차
1 소개
1970년대 폴란드 축구의 간판스타
즈비그니에프 보니엑과 함께 폴란드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거론되는 선수. 플레이메이커로 1970년대 정상급의 선수였다. 다만 공산국가였던 폴란드의 정책 때문에 빅리그에서의 활약도 부족하고 요절했기 때문에 보니엑에 비해 인지도는 한참 떨어진다.[2] 1994년 폴란드 축구협회와 폴란드 축구관련 신문들은 보니엑이 아닌 바로 이 카지미에시 데이나를 자국 역대 최고의 선수로 선정한 바 있다.
2 클럽
1958년 지역의 브워크나시 스타로그라드 그단스키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유스팀에서의 좋은 모습을 보여준 덕분에 레히아 그단스크 등의 클럽을 놓고 고민하다가 ŁKS 우치와 계약, 1경기에 출장했다. 그러나 그를 놓치기 싫었던 레기아 바르샤바는 그를 영입했고 1966년부터 1978년까지 12시즌을 레기아 바르샤바에서 보냈다.
많은 공산국가들의 축구클럽이 그러하듯이, 레기아 바르샤바에게도 스폰서가 있었다. 레기아 바르샤바는 군대의 후원을 받는 클럽이었는데, 이때문에 데이나는 해외의 명문 클럽의 오퍼에도 떠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군대가 그들의 선수가 NATO 국가에서 뛰는 것을 원치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정 때문에 데이나는 30대가 되서야 해외에 진출할 수 있었다. 1978년 11월 그는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시티 FC로 이적했고 팀을 강등해서 구해내는 활약을 했다. 그러나 데이나는 부상 때문에 명성에 비해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감독이 교체되자 1981년 1월 맨체스터 시티를 떠난다.
1981년 데이나는 펠레, 바비 무어 등 여러 축구 선수들이 출연한 영화 '승리의 탈출'에 출연했고 그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데이나는 샌디에고 사커스와 계약을 했고 7년간 축구, 인도어 사커 선수로 활약한 뒤 은퇴했다.
3 국가대표
1968년 터키를 상대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득점왕을 차지하며 금메달을 차지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3] 이어지는 1974년 월드컵에서는 샤르마슈, 가도차, 라토와 함께 공격라인을 구성하며 3위를 기록, 폴란드 축구의 저력을 보여주었으며, 그제고슈 라토와 함께 대회 베스트 XI에 이름을 올렸다. 이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크루이프, 베켄바우어의 뒤를 이어 그해 발롱도르 3위에 오르기도 했다. 1976년 올림픽에도 참가해 은메달을 따냈으며, 1978년 월드컵에도 참가해 2차 조별리그까지 진출했다.
4 현역 은퇴 이후
은퇴한 뒤에도 미국에서 생활했다. 은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89년 9월 1일, 데이나는 교통사고로 인해 사망했다. 유해는 미국에 안치되었으며 2012년 폴란드로 운구되어 국군 묘지에 안치되었다.
(폴란드 국군 묘지에 있는 데이나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