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의 모습. 상당한 미남이다.
그 많던 머리가 홀라당...
게오르크 칸토어 Georg Cantor
수학에서, 답을 할 수 있는 것 보다 질문할 수 있는 것이 더 가치있다.
1 생애
1845년 3월 3일 (율리우스력 2월 19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6형제 중 첫째로 태어났으며 부모님은 독일인이었다. 1856년 칸토어가 11세 되었을 때 아버지의 병간호 때문에 러시아의 겨울을 피해 독일 비스바덴으로 이사하였고, 곧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하였다.
칸토어는 1860년 다름슈타트(Realschule)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862년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하였다. 1867년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수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869년에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연구원이 되었다.
1872년에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조교수가 되었고, 1874년에 발리 구트만과 결혼하여 총 6명의 자녀를 두었다. 1879년에 34세의 나이에 정교수로 승진하였다.
칸토어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이전하려 하였으나, 베를린의 레오폴트 크로네커는 칸토어를 매우 싫어하였으므로 이는 무산되었다. 크로네커는 수학의 구성주의를 지향하였는데, 칸토어의 집합론은 구성주의와 철학적으로 정반대되었기 때문이었다.
1881년에 칸토어는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직을 리하르트 데데킨트에게 수여하려 하였으나 데데킨트는 이를 거부하였고, 이 때문에 둘은 연락을 끊었다.
칸토어는 무한에 관한 주장 때문에 여러 수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은 바 있으며, 이에 칸토어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 병원에 입원하였다. 퇴원한 뒤 칸토어는 수학을 기피하고, 철학과 문학에 관심을 돌렸다. 이후 잠시 회복하여, 유명한 대각선 논법을 사용한 증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울증은 재발하였고, 칸토어는 다시 병원에 입원하였다.
1904년에 쾨니그 줄러는 칸토어 집합론의 핵심 개념이었던 정렬 정리의 "반증"을 발표하였다. 이 "반증"은 곧 심각한 오류가 있음 알려졌으나, 칸토어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칸토어는 매 2년~3년마다 입원을 반복하다가 결국 1913년에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은퇴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칸토어는 궁핍과 영양 부족에 시달렸고, 전쟁 중에 1918년 1월 6일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2 주요 업적
칸토어의 업적은 집합의 소개, 그리고 인간이 기피하던 무한에 대한 직시와 탐구로 볼 수 있다.
칸토어는 일대일 대응의 개념을 통해 집합의 크기(Cardinality), 즉 원소의 개수를 정의하였고, 이에 따라 무한집합도 그 크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실제로 그는 자연수와 짝수, 유리수는 그 개수가 같지만, 실수는 자연수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 증명에서 그는 유명한 대각선 논법을 개발했다. 말년에 그는 연속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칸토어의 사후 쿠르트 괴델이 연속체 가설은 반증이 불가능함을 증명했고 폴 코언[1]은 연속체가설의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연속체 가설은 불완전성 정리에서 언급된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최초의 명제가 되었다.
칸토어 이후 본격적으로 다루게 된 집합의 개념은 현대 수학에서 빼놓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모든 정의에서 집합의 개념이 들어가며, 기본적 공리에서조차 집합의 개념을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만큼 '집합' 자체의 정의가 중요하게 선행되어야 했으나 이를 완성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러셀의 역설 항목을 보면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