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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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봐도 범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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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시절 절친이었던 아인슈타인과 함께 찍은 사진


Kurt Gödel 쿠르트 괴델 1906년 4월 28일1978년 1월 14일

수리 논리학의 거장. 불완전성 정리완전성 정리라는 이상한 정리를 증명하고 상대성 이론에서 괴델우주를 고안, 연속체 가설 연구, 신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려한 존재론적 논증 등 여러가지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이다. 현재의 체코 공화국에서 태어났는데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Herr Warum(Mr. Why) 로 불릴정도로 궁금증이 많고 질문을 많이 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선천적으로 병약했기 때문에 자신의 건강에 크게 신경 썼다고 한다. 학문에 대한 흥미 덕분에 대학교 입학 당시 이미 철학, 물리학등에서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쌓은 상태였으며, 특히 수학의 경우 학부수준을 이미 끝낸 상태였다고 한다. 23살에 1차논리의 완전성을 증명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25살에는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불완전성 정리로 수학의 완전성을 증명하려고 했던 다비드 힐베르트의 계획을 무너뜨렸다. 당대 권위있는 수학자들은 괴델의 업적에 대해 인간 이성의 한계를 보여줬다고 평가했지만 괴델 본인은 이 찬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힐베르트의 형식주의는 네덜란드 수학자 브라우어직관주의와 한창 크게 싸우던 중이었고, 형식주의가 여기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체계 자체의 무모순성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형식주의를 지지하는 수학자들은 이에 대해 전력으로 연구를 거듭했는데, 브라우어는 자연수를 포함한 체계의 무모순성은 증명불가능할거라며 헛수고라고 천재적인 직관력으로 이미 언급을 하였다. 하지만 증명은 없었다. 브라우어는 후에 빈 대학에도 초청되어 하루 강의를 했었는데, 괴델과 비트겐슈타인은 이 강의를 들었었다. 이때 브라우어의 위 주장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은 그 강의 이후에도 하루동안 브라우어와 함께 하며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후에 이 만남이 철학의 길을 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괴델은 어찌 보면 컴퓨터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볼수도 있는데, 이는 불완전성 정리 증명시 사용된 방법론에서 최초로 '알고리듬의 집합' 개념을 정의하여 사용했던것에 기인한다. 그 몇년 후 발표된 앨런 튜링의 튜링 머신은 사실 괴델의 저 알고리듬 집합을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튜링은 저 튜링 머신을 이용하여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해보이기도 하였다.

젊은 나이에 남긴 혁혁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에서는 교수직을 받지 못하고, 결국 1940년대에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교수가 되었으며 아인슈타인과 물리학, 철학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친밀하게 지냈다. 기록에는 아인슈타인의 연구활동이 저조하던 시기에 아인슈타인이 "퇴근하며 그(괴델)와 함께 걷기 위해 사무실에 나간다"라고 했을 정도로 상당히 친했다. 미국 시민권을 받을 때도 아인슈타인이 추천을 해줬다. 하지만, 시민권 시험을 위해 미국헌법을 공부하다가 그 비논리적인 체계에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1]

1940년에는 집합론 공리에서 연속체 가설이 반증될 수 없음을 증명했는데 그로부터 23년 후 1963년 폴 코언(Paul Cohen)은 연속체 가설을 증명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말년에는 피해망상증에 걸려 누군가가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는 생각에 아내[2]....가 만들어 주는 음식만을 먹다가 아내가 입원하는 바람에 더 이상 그에게 음식을 줄 수 없게 되자 굶어 죽었다. 죽은 당시의 몸무게가 약 29.4kg으로 30kg이 채 안됐다.조선 인종 임금하고 닮았다또 말년에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에 착수했고 자신이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1. 시민권 획득 과정 중 판사 앞에서 미국 법체계에 대한 설명을 듣는 면접이 있었는데, 미국 헌법은 독일과 같은 독재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설명하자, 빡친 괴델이 나는 그렇지 않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미국 시민권 획득을 도와주었던 친구 모르겐슈테른과 아인슈타인은 당연히 그 이론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나 결국은 말하고 말았고 아인슈타인과 모르겐슈테른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를 가로막았다. 친구들의 민첩한 행동 덕분에 무사히 괴델은 시민권 심사를 마칠 수 있었다.
  2.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보다 7살이 많았으며, 부모들이 보통 느끼는 결격 사유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 시기 뿐만이 아니라 여러 차례 남편의 목숨을 구하는데 일조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나치 지배하의 조국에서 미국으로 오기까지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