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유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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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有爲 (강유위)
(1858년 3월 19일 ~ 1927년 3월 31일)

청말 민국초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변법자강운동을 통해 중국을 개혁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광둥성 난하이 현에서 태어나 공양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 과정을 지켜보면서 개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향에 사숙 만목초당을 열고 여기서 량치차오 등 제자를 배출하였고, 1895년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다.

청일전쟁 패배로 인해 양무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청나라 개혁을 위한 상소를 꾸준히 올렸고, 이것이 광서제의 눈에 띄게 된다. 결국 1897년 독일의 교주만 공격으로 청의 주권에 상당한 위협이 가해지게 되자, 1898년 4월 23일 광서제는 직접 캉유웨이를 정권에 적극 등용하면서 개혁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변법자강운동이다.

하지만 변법자강운동은 캉유웨이의 사상적인 면 즉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과 같은 공교주의에 치우친 측면으로 인해 조야의 지지를 많이 받지 못했고, 1898년 7월 서태후의 재가 없이 수구파 대신을 숙청시킨 것이 화근이 되어서 1898년 8월 4일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들이 일으킨 무술정변으로 광서제가 유폐되고, 8월 6일 체포령이 내려지게 되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일본으로 망명 간 캉유웨이는 보황회 등을 통해 입헌군주제를 고수하면서 변법자강운동의 실패 이후 성장한 혁명파와 대립을 하게 된다. 결국 1912년 신해혁명으로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그의 입지는 확실하게 줄어들게 되었고, 1914년 위안스카이의 제정에 반대하며 선통제를 복위시키려는 복벽운동을 일으켰으나 당시 중국은 이미 혁명파와 군벌들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했다. 그의 공교주의 사상 또한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신문화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말년에는 중국문화 보존활동에 힘쓰다 1927년 칭다오에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