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서제

청의 역대 황제
10대 목종 동치제 자이슌11대 덕종 광서제 자이티얀12대 공종 선통제 푸이
비정통 보경제 푸쥔
몽골 제국의 역대 대칸
49대 부린투 자사그치 칸50대 바다라울트 투르 칸51대 휴브트 요스 칸
비정통 아이신기오로 푸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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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덕종(德宗)
시호만주식암발링구 황제
중국식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한호[1]바다랑가 도로 한
(Badaranga doro han)
칸호[2]바다라울트 투르 칸
(Badarguult tör khaan)
만주어아이신기오로 자이티얀
(愛新覺羅 載湉, 애신각라 재첨)
연호
(청)
만주어바다랑가 도로
중국어광서(光緒)
몽골어-
생몰기간음력1871년 8월 14일 ~ 1908년 11월 14일 (38세)
재위기간음력1874년 2월 25일 ~ 1908년 11월 14일 (34년 263일)
제 11대 청나라 황제
이전 황제동치제
다음 황제선통제 / 보경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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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최초의 방계 혈통 황제. 도광제(道光帝)의 일곱째 아들 순현친왕(醇賢親王, 혹은 순친왕) 아이신기오로 혁현(愛新覺羅 奕譞)의 아들. 어머니가 서태후의 여동생이기 때문에 모계로 보나 부계로 보나 동치제의 사촌 동생이 된다.

청나라의 종법상 원래는 황제가 될 처지가 아니었다. 황제 계승 원칙인 1개 항렬에 1명의 황제가 원칙이여서 전 황제인 동치제와 항렬이 같았기 때문에, 원칙대로라면 그 다음 항렬인 부(傅)인 사람이 황위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서태후는 정치적인 거나 혈통적인 거나 그가 즉위하는 게 자신에게 더 나으리라고 판단, 항렬 무시하고 세 살의 어린 조카를 양자로 삼아 그를 황제로 삼는다. 즉위한 후, 광서제는 평생 서태후의 횡포에 시달렸다.

아버지 순현친왕(1840~1891)은 공친왕과 함께 함풍제 사후의 동치제 정국을 이끌어간 양무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광서제를 서태후의 양자로 준 것도 그의 정치적 거래라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4] 그는 광서제가 즉위한 직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고 아들인 광서제의 교육에만 힘쓰고 있었지만, 공친왕의 계속된 삽질로 점차 실권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서태후 또한 국가 대사를 우선 그와 상의하라고 명하기까지 했다. 사실상 순현친왕의 권력 뒤에는 서태후의 묵인이 있었다.

1881년, 동태후가 석연찮은 이후로 죽었고 곧 독살설이 나돌았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순현친왕은 바짝 쫄아서 북양해군 지휘권을 1885년에 돌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891년에 죽을 때까지 서태후의 비위를 계속 맞추었다. 심지어는 이화원 건립 등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나마 좀 낫다는 아버지도 이러한 판국이니, 황제인 광서제가 힘을 발휘할 리가 만무했다. 1887년, 광서제는 16세로 성년이 되었지만 서태후는 섭정을 계속 연장했다. 게다가 서태후의 강권으로 그녀의 조카인 융유황후 예허나라씨(隆裕皇后 葉赫那拉氏)[5]와 결혼해야 했다. 광서제는 고집 세고 성격도 나쁜 황후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애정을 주지 않았다. 서태후를 모셨던 궁녀의 증언에 따르면, 문안 인사를 온 황후가 이제 나가보라는 광서제의 말을 듣고도 침전에서 나가지 않고 버티자 격노한 광서제가 황후의 머리채를 잡고 침전 밖으로 끌어냈을 정도였는데 이게 광서제 붕어 10일 전의 일이었다. 결국 애정 없는 결혼에 지친 광서제는 후궁인 각순황귀비 타타라씨(恪顺皇贵妃 他他拉氏)를 총애하게 된다.[6] 진비는 처음엔 뛰어난 재능으로 서태후의 총애를 받았지만, 광서제에게 강한 황제가 되라며 각을 세우면서 미움을 받게 되었다.[7] 하도 어른스러워서 "진비 할망구"라는 조롱을 서태후에게 들었을 정도. 남장을 자주하는 여장부이기도 했다. 사진찍기를 좋아했으며, 황제가 외국어를 배우거나 개혁을 추진하는데도 많은 부분 조언했다. 광서제는 그런 진비를 더욱 총애했고, 그녀에게 "천자인 내가 있으니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라며 큰소리를 뻥뻥 쳤다고 한다(...) 그러나 의화단의 난 도중에 북경을 탈출하면서 우물에 던져졌다. 현실은 시궁창[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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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비의 사진.

1894년 6월부터 1895년 5월까지 벌어진 청일전쟁이홍장이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下關 條約)을 끝으로 청의 완패로 끝났다. 청은 일본에게 1년 예산의 2.5배나 되는 배상금과 함께 타이완과 펑후(澎湖) 섬, 요동 등을 할양했다. 특히 북양함대가 전멸했다는 점에서 그동안 진행되었던 양무운동이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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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당시 막 성인이 된 광서제는 꼭두각시 노릇에서 벗어나기 위해 캉유웨이(康有爲, 강유위), 량치차오(梁啓超, 양계초), 담사동(譚嗣同) 등의 소위 '변법파'를 중심으로 메이지 유신을 모방한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을 실시한다.[9] 일시적으로 서태후의 협력을 얻어 헌법 제정, 국회 개설, 과거제 개혁과 서양식 학교 설립, 산업의 보호/육성 등을 진행한 이 운동은 당연히 보수파의 반발을 불러 오게 되고, 광서제는 강력한 힘을 가진 군벌 위안스카이를 끌어 들여서 보수파를 억누르려 했지만...

도리어 위안스카이가 X맨으로 드러났다. 위안스카이가 서태후에게 광서제가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를 밀어내려 한다고 밀고한 것이다. 변법자강운동은 좌절되었고, 광서제는 이후 죽을 때까지 베이징에 유폐되었다. 변법자강운동의 주도자인 담사동은 사형되었고, 강유위 등은 해외로 망명했다. 이를 100일 천하라고 한다. 쿠데타를 일으킨 서태후는 부준을 황제로 옹립한다.

광서제는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열강 연합군이 베이징을 습격할 때 잠시 시안(西安)으로 탈출했었지만, 이 사이에 진비가 서태후에게 죽는다.[10] 마침내 1901년, 열강 연합군과 의화단에 협력한 청 정부 사이에 화약이라고 쓰고 항복 문서라고 읽는이 성립되었고, 광서제는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유폐생활이 계속 되었다.

1908년, 그는 서른일곱의 나이로 사망한다. 갑작스런 급사를 두고 청나라 정부는 광서제가 오랫동안 앓아 왔던 지병 때문에 사망했다고 청나라의 공식 발표했지만 사망 당시부터 독살설이 퍼졌고 이후 백년이 지난 2008년에 중국에서는 광서제의 능을 공식적으로 발굴해 광서제의 유골과 머리카락 일부를 X선 투과법으로 조사해본 결과 다량의 비소성분이 발견어서 최종적으로 독살 당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 독살의 배후로는 서태후위안스카이가 독살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어젰든 광서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는 광서제의 3살짜리 조카인 푸이를 다음 황제로 지목하고 이 아이가 선통제가 된다. 아버지가 살아있는 어린아이를[11] 황제로 만드는 무리수를 두면서 섭정을 계속 유지하려던 서태후도 아이러니하게 광서제가 죽은 뒤 이틀 후 급작스럽게 그를 따라 사망했다

무려 34년간 청의 황제로 있었지만, 37년의 짧지 않은 생애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변법자강운동 외에는 없었다. 게다가 그가 즉위할 때 그나마 눈꼽만큼이라도 가망이 있었던 청은 그가 죽을 무렵에는 사실상 멸망 직전에 놓이게 된다. '광서(빛나는 후계)'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이다. 하지만 변법자강운동 등을 보면 결코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힘이 없었을 뿐이지...(같은 꼭두각시여도 동치제와 다른 점은 그 부분이다.)

물론 변법자강운동이 완벽한 근대화의 성공을 보장할 순 없었겠지만, 적어도 청의 멸망을 늦추고, 최소한 신해혁명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아쉬워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의 패배가 보여주었 듯이, 강력한 보수파의 거두인 서태후가 살아있는 한 청의 근대화는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명줄만 길어가지고...

또 비슷하게 비유되는 갑신정변이 그렇듯,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적은 인구를 가진 조선만 해도 극심한 반발과 혼란으로 나라가 요동쳤던 판인데, 다민족에다가 당시 이미 수억대의 인구를 자랑한 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서태후가 처음엔 지지했지만 이후 철회한 것도 이런 무리한 개혁의 위험성과 실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신 중화일미 애니메이션에서는 고증에 맞지 않게 상당한 뚱뚱보에 옛날 한족 왕조 황제들이 즐겨입던 황제 복식을 입고 등장했다.

  1. 만주식 군주 칭호
  2. 몽골식 군주 칭호
  3. 비정통
  4. 어떻게 보면 바로 12년 전에 있었던 이하응과 조대비의 거래(이명복은 효명세자의 양자로서 즉위했다.)와도 흡사하다. 물론 역량은 12년 앞선 흥선 대원군이 훨씬 컸었다. 서태후보다 조대비가 권력욕이 덜했던 탓도 있지만.
  5. 1868~1913. 본명은 예허나라 징펀(葉赫那拉 靜芬). 서태후의 조카로, 선통제 때 섭정을 맡았다.
  6. 1876~1900. 본명은 타타라 서설(他他拉 瑞雪). 주로 진비(珍妃)라고 불린다.
  7. 서태후의 그녀에 대한 미움은 엄청나서, 조카인 융유황후를 시켜 진비의 뺨을 서슴없이 때리는가 하면, 나중에는 아예 창문 하나 외에는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곳에 감금시켰다. 게다가 매달 초하루와 15일, 그리고 축제 분위기로 온통 들떠있는 명절 점심시간에 태감들을 보내 그녀를 욕하고 괴롭혔다.
  8. 가족들이 그녀의 시신을 건져올릴 때도 광서제는 차마 나타나지 못했다(...) 진비가 생전에 썼던 낡은 휘장 하나를 슬쩍 가져와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 광서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9. 이 운동은 1898년(무술년)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무술변볍(戊戌變法)이라고도 한다.
  10. 이 때 진비 역시 유폐되어 있었는데, 서태후는 "너무 예뻐서 함께 탈출하다가 외적에게 강간을 당할 수 있다."(...)라는 이유로 진비의 자결을 종용했다. 향년 24세. 일설에는 진비가 황제를 자금성에 남겨 연합군과 협상을 통해 서태후 일당을 일소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하며 이를 우려한 서태후가 "너 먼저 우물에 빠지면 나도 따라서 빠지마"라고 설득한 다음 유유히 피난길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말이 설득이지, 사실은 빡친 서태후가 쟤 죽여버리라며 고함을 지르자 반항하는 진비를 환관 최옥귀가 강제로 우물에 밀어넣은 것. 후일 서태후는 "내가 화낸 건 맞지만 죽이라고 했던 건 아님'ㅅ' "이라며 딱 잡아뗀 뒤 최옥귀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출궁시켰다(...)
  11. 실제 푸이의 아버지 순친왕은 1951년 2차 국공내전까지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