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운동

洋務運動

1 개요

19세기 중·후반에 중국 청나라에서 일어난 근대화(자강) 운동.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태평천국의 난으로 엉망이 된 청나라를 근대화시켜서 서구 열강들에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 목적이 있었다. 1860년 2차 아편전쟁의 패배 이후 열강의 요구로 외교아문이 성립되는 시점을 시작으로 보고 1895년의 청일전쟁의 패배로 끝난 것으로 본다.

이 시기에 일시적으로 청의 통치력이 회복되었기에 이 시기의 회복을 당시 황제의 연호를 따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고도 한다.

2 내용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중국의 '자강'을 꾀하려는 부국강병 운동이었다. 흔히 교육과정에서 양무운동은 조선동도서기처럼 중체서용으로 대표된다.[1] 즉, 보수파에 대한 방어적 논리로 "서용"을 강조한 구호이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중체"를 강조한 구호가 아니라는 것이다. 양무운동 역시 당대에는 "자강운동"으로 불리었다. 다만 변법자강운동과의 구분을 위해서 양무운동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는 것.

2.1 1860년대

보통 1861년 근대적 외교기관인 "총리아문"을 세우면서 자강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간주한다. 다음해 서구식 교육기관인 "양무학당"을 세우니, 이것이 양무운동의 이름이 되었다.[2]

외교관 양성을 위해 장지동은 총리아문에 동문관(同文館)을 설치하여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의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고 통역사를 양성했다. 증국번은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미국으로 유학시켰고[3], 이홍장은 독일,영국,미국 등지로 유학생을 보내어 군사와 무기에 관하여 연구하도록 하였으며, 동문관에서도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개혁활동은 마건충(馬建忠)을 비롯하여 각 분야에서 활동했던 인재들이 이를 통해 배출되었다. 이런 통역 기관들은 상해(상하이), 광주(광저우)를 중심으로 확대를 시켜나갔다.

1860년대의 기관들은 대체로 무기 생산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홍장은 1865년 상해에 '강남제조총국'[4]을 세워 총포, 탄약, 기선 등을 만들고, 남경(난징)에는 '금릉기기국'을 세워 대포,화약을 생산하였다. 좌종당은 복주(福州)에 1866년 '선정국'(船政局)을 세워 윤선(輪船)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만주족 귀족출신으로 '북양삼국통상대신'으로 있던 숭후는 천진(톈진)에 '천진기기국'(1867년)과 '군화기기총국'(1870년)을 설치하여 화약과 포탄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4대공장이 설립된 이후 각 지방에 총 24개의 군수공장이 건설되었다. 그런데 이들 공장에서 생산된 무기는 총포, 탄약류가 대부분이었고 품질도 우수하지 못하였다. 이들 공장은 원자재를 외국에서 수입하고 서양인 기사에 의하여 공장이 운영되었으며 후진적인 경영과 정부의 지원 부족으로 서양에서 구입하는것보다 품질과 자금이 둘다 밀린다고 평가받았다.

한편, 공장이 필요로 하는 석탄과 철 등을 공급하기 위하여 각지에 광산이 개발되어 근대적 채광시설을 갖춘 광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대만의 기륭(基隆)탄광(1875년)이 대표적.) 또 공장의 부속기관으로 설치된 번역관과 서양식 교육기관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이 번역 보급되면서, 기술 인력이 양성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여담으로 1890년대 청을 여행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사천성에서도 서양 과학서적을 요구하는 지방관이 있다고 서술하였다.

2.2 1870년대

1870년대에는 과거시험에 '양무진취' 시험을 개설해 기술자를 선발하고, 강소성,직례성[5] 서구 교육을 실시하였다. 유학생을 미국에 파견하기도 했고, 최초의 방직공장인 '난주직니국'(1878년)과 북경-천진 전선(1879년)을 가설하기도 했다.

1874년 일본의 대만(타이완) 출병을 계기로 육방해방 논쟁이 전개되는데 좌종당은 신강지역 수복 작전을 중심으로 정책을 펴야한다는 육방 우선론을 제기하고 이홍장 등은 해방우선론을 주장 해군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논쟁이 지속되자 당시 계획하던 신강수복 작전도 그대로 실행하면서 해방도 강화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1884년 북양 함대·남양 함대·복건 함대의 3대 함대를 창설했다. 함대는 중국에서 건조한 배도 있었으나 주력함은 주로 영국, 독일에서 구입하였다. 이 밖에 유능한 지휘관 양성을 위해 천진에 '수사학당'(水師學堂)(1880년)과 무비학당(武備學堂)(1885년)을 세우고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군사고문을 초빙하여 서양식 군사학을 교육하였다. 이렇듯 70년대의 사업은 주로 해군과 서양식 교육제도에 치중되었다.

외국자본주의의 중국진출에 대항하여 양무파는 민족자본과 민간기업의 양성에 힘을 쏟아 '반관반민'(半官半民)의 '관독상판'(官督商辦)의 새로운 기업을 육성해 나갔다. 또한 이홍장은 중국의 해운업을 독점하고 있던 외국기선회사와 경쟁할 목적으로 상하이에 기선 회사인 '윤선초상국'을 1872년 창립하였다.

한편 청 조정의 군사적 성과가 가장 돋보인 시기이기도 했는데 태평천국 전후의 반란을 정리하고 신강 지역을 회복함과 동시에 러시아와의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2.3 1880년대

1880년대는 10여년의 짧은 소강기가 끝나고 열강의 개입이 강해졌다. 1882년의 임오군란, 1884년의 청불전쟁갑신정변으로 청은 조공국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군사력보다는 산업 근대화에 많은 재정이 투자된다.

1881년 근대적 광업기관인 '개평광무국'을 세운 청 조정은 1890년대초까지 대만에 기융 탄광, 직예성에 개평(開平) 탄광, 흑룡강 성에 막하(幕河) 금광과 광무국, 호북성(후베이성)에 대야(大冶)철광과 연철창을 열었고 방직공장도 각지에 건설하였다. 한야(漢冶)에는 한야철창과 한양평매철창 광공사가 세워졌는데, 후에 이것이 중국 최초의 철강 콤비나트인 한야평매 철창광공사(한야평공사)가 되었다.

중국 최초의 철도는 1881년 6월 9일 당산(唐山, 탕산)에서 석탄산지 서각장(胥各庄, 쉬거좡)으로 이어지는 9.7km 구간의 철도였다(이후 이 철도가 텐진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아직 외국 자본의 손이 많이 들어간 일이었다. 1881년에는 북경과 천진 사이 전신이 개통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외국인이 연해부에 전보망을 개설하지 못하도록 상해에서 광주, 절강성(저장성) 영파(寧波, 닝보), 복건성(푸저우성) 복주(푸저우)와 하문(下門, 샤먼)에 전신선을 부설했다. 성선회 등의 관료들이 활약한 시기.

해군의 확장은 계속되어 1881년 여순(뤼순)에 군항이 세워지고, 1882년 '해군아문'(해군성)이 별도의 기관으로 독립했다. 근대적 육군사관학교로 천진에 '무비학당'이 세워지기도 했으나 1884년 이후로는 재정지원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최소한의 유지비조차 지원받지 못햇다고한다.

3 실패와 한계점

근 30년간의 양무운동의 시대는 청나라가 숨을 돌릴 수 있었던 마지막 시대였다. 사실 양무운동은 결코 짧지 않은 계획이었고 성과도 적지 않았다.

하필이면 바로 일본에서 일어나던 메이지 유신과 비교되었다. 사실, 양무운동이 한창 전개되면서 청의 군사력이 급팽창 하던 시기에는 일본 역시 청과의 대결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충돌을 피할 수 없었고, 1895년 청일전쟁으로 일종의 '체제대결'에서 패배하고 이홍장이 직예 총독과 북양대신에서 해임되면서 끝을 맺었다.

양무운동이 흔히 알려진 평가대로 군사력 부분에서만 치중 된 것은 아니었다. (되려 국방력에 쏟아부은 돈의 비중으로 따지면 메이지 유신이 더 높다.) 또 새로운 행정기관이 도입되고 교육제도의 측면에서는 충분히 개선 된 측면도 있었다. 또 강화된 무력을 바탕으로 중국과 주변 조공국들에 대한 패권 유지를 어느정도는 연장시킬 수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갑신정변이나, 패배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상태는 막을 수 있었던 청불전쟁이 대표적. 문제는 근본적인 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소수 관리들의 개혁책인지라 청조의 시스템은 여전히 구시대적이었다는 것.[6]

3.1 정책 진행의 실패

당장 무기와 장비는 그걸 쓰는 사람에 따라서 위력이 천양지차로 벌어지게 되는데, 근대적 군사제도가 완벽하게 자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대가는 청일전쟁에서 청나라 군대가 장비빨에 비해 쉽게 몰락하는 원인을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과는 달리 청나라 군대의 무기체계는 낙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본을 능가하는 부문도 많았다. 경제력이 곧 군사력이라고 거대했던 청나라의 경제규모가 비록 비효율적이라도 무기수입에 있어 충분한 질과 양을 갖출수 있었던 것. 일례로 청나라는 일본도 아직 못가졌던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2척이나 독일로부터 수입해왔으며, 청일전쟁 당시까지도 일본에는 대형 순양함만 있었을뿐 전함은 없었다. 그러나 병사들의 훈련 인프라가 충실하게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장비빨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참패했다. 또한 무기는 제대로 갖췄지만 근대전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부족했다.

경제력을 갖추기 위해 육성한 기업은 대부분이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성격을 가진 '관에서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창업 초기에는 거액의 국가자금이 투자되고 양무파의 고관이 추천한 관료가 기업을 운영하였으나 후에는 민간으로부터 자본을 모집하여 거액을 투자한 상인에게 경영을 맡기고 국가는 이들 상인을 보호 감독하였다. 여기에 투자한 상인은 상하이 등지의 개항장에서 자본을 축적한 대상(大商)들이었다. 관리가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방식의 기업은 거대한 외국자본주의의 압력에 맞서 취약한 중국의 기업을 지키기 위하여 국가로부터 세제상의 특혜와 관문(官物), 관용(官用)에 남품하는 영업독점의 특권을 누리면서 운영되었다. 이는 관료들의 부패를 조장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청나라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며, 최소한 당대에는 국방력이 예산을 다 잡아먹는 일본에 비해 유리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양무파들도 상대적으로 청렴한 관교였던 것은 사실이다.

'관에서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관독상판 체제의 문제외에도 가장 큰 문제였던 자금 부족 때문에 기업이 문을 닫거나 경제 공황으로 파산하기도 했으며 경영을 맡은 상인이 공장 경영보다는 가지고 있는 자금으로 투기에 힘을 쏟아 공장 운영이 잘 되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그외에도 이홍장이 설립에 관여한 상해기기직포국은 1893년에 화재로 공장이 전소되는 등 재해도 있었다.

광산같은 경우에는 직예성의 개평 탄광처럼 흑자를 많이 내고 계열사까지 거느린 성공적인 사례도 있었지만 초기의 몇 차례는 낙후한 수송 능력으로 실패했고 양무 운동 기간 설립한 총 38곳의 광산 중 성공적인 곳은 개평 탄광과 막하금광을 비롯한 소수의 광산뿐이었다. 대만의 기륭탄광은 부정부패와 비효율로 유명했을 정도.

3.2 내부적인 갈등과 일관성 부족

청의 근대화가 방향으로 흐를 수 없었던 까닭은 청나라가 서구화 정책을 위임한 한인 대신들, 즉 태평천국 진압의 주도자였던 지방 신사(향족)들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컨데 이홍장은 일본의 위협을 강조하며 해군 강화를 주장했지만, 좌종당은 러시아 제국의 위협을 강조하며 육군 강화를 주장했던 것이다. 당시의 청나라에게는 일본에게서 해군력에서 밀려 제국이 무너진다는 것보다는 당장 국경을 맞대고 있던 러시아와의 충돌과 실제적인 영토 피해가 더 우려스러운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해군 확충은 오히려 늦어졌다. 즉, 거꾸로 국방력에 돈을 안 들여서 망했다라고도 볼 수 있는게 양무운동이다.

또한 운동은 잘 무장된 군벌을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애초에 자강운동을 주도한 것이 태평천국의 난을 막은 한인 대신들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 막대한 자금이 군대에 흘러들어가면서 말만 정부군이지 사병화 된 군대들에게 무장과 장비를 일신한 것이다.

지역별로 군벌이 나눠진 것도 문제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해군은 회군파와 상군파로 나뉘어 통일적인 지휘계통이 이루어 지지 못했으므로 1884년에 터진 청불전쟁에서 복건함대가 궤멸되는 원인이 되었다. 또 청일전쟁때 회군이 일본군에게 당할 때 상군같은 다른 지방의 군대가 상당기간 동안 멍때리고 있는 사태를 만들어냈다(...) 멀게는 위안스카이 사후에 군벌이 난립하여 대규모 내전인 반장전쟁이 벌어지는 큰 원인도 이때에 있었다. 일본군은 뭐 육군 해군끼리 안 싸웠냐마는

비 군사 부문의 경우를 보면 양무파 관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자신이 총독으로 있는 임지에서 양무에 힘쓰다 임기가 끝나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면 설립한 공장이나 각종 시설들을 죄다 뜯어서 자신이 부임하게 될 지역에 새로 설치했다. 그러면 원래의 지역은 완전히 기반이 날라가버렸기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설령 공장이나 시설을 온전히 남겨두고 이임하더라도 새로 부임할 총독이 보수파라면 양무 운동의 결과물들을 아예 없애버리기도 했다. 또 이홍장, 좌종당, 장지동 같은 이들은 지방에서 양무 운동을 벌일 때, 서로 연합하지 않고 각자 따로 양무를 했었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양무 운동을 이어나가는 것에 큰 장애가 되었다.

거기다 양무파들은 청 제국 권력의 핵심인 조정에서 소수였다. 조정의 대다수는 늘 보수파들이 차지했었고 이런 불균형은 양무 운동에 장애가 되었다. 청 제국의 최고 실세이자 양무파의 영수였던 공친왕 혁흔과 이홍장은 늘 이들에게 공격당하고 비판을 받았으며 양무 운동을 지지했던 서태후조차 보수파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또, 서양 열강들과의 전쟁이 끝나고 태평천국, 염군이 진압되어 평화를 되찾자 굳이 양무를 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식자와 관료층을 중심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양무 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회의까지 제기되어서 양무파들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홍장이나 좌종당, 풍계분 등은 실용주의를 강조하며 양무운동을 통해 군사와 산업 전반에 걸친 개혁을 추구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중국은 문무만이 서양에 뒤지며 오직 총포만이 서양이 앞선다"(이홍장, 1864년)는 발언 등에서 보듯 양무운동의 방향성은 여러차례 논쟁에 휘말렸으며 그 재정 투자도 일관되게 이뤄지지 못했다.

3.3 총론

30년간의 근대화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청의 자강운동은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는 청일전쟁의 군사적 패배, 대내적으로는 서태후의 건재와 변법자강운동의 실패로 총체적 난국에 들어서게 되고, 결국 의화단의 난신해혁명을 겪으며 안팎으로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청의 근대화 노력은 패전 이후에도 20세기 초, 즉 1900년대까지 지속되면서 지방의 토착자본과 지식층을 깨우고 신해혁명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신해혁명도 당장 늘어나던 철도를 정부와 민간 중 누가 운영해야하는가라는 문제로 촉발되었으니 근대화의 성과가 완전하게 부정되기는 어렵다.) 다만 한 왕조로서의 청나라에게는 자체적 모순을 가진 실패한 근대화였다고 평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제국이 어느 정도 선전한 것을 비추어 본다면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러시아보단 근대적이었다. 문제는 양무운동이 막대한 세금을 필요로 했고 무엇보다 지배계급이었던 만주족에 대한 증오가 사라지지 않았다. 신해혁명이 닥치자 만주족이 한족에게 학살 당했을 정도... 일관성의 부족 또한 병크까진 아니었다. 18세기까지 동양이 유럽보다 '전근대적'인 건 아니었다. 사실 중국과 유럽을 비교해보면 근대적 요소가 많이 나타난만큼 어디를 손대야 할지 몰랐던 것이 더 정확하다.

4 관련 인물

  1. 다만 이 구호가 정식으로 나오는건 1895년의 일이다.
  2. 자강운동의 내용은 무기와 장비, 군사시설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알려져있으나,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시작은 교육기관이었다. 양무(養武; 무력을 기름)이 아니라 서양의 문물을 힘쓴다는 의미의 양무(洋務)인 것이다.
  3. 유감스럽게도 중도에 조정에 마찰을 빚어 2회로 끝났으며 몇몇 유학생들은 중간 귀국했고 그마저 교육을 이수한 학생들조차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전사한다.
  4. 1863년 소주(쑤저우)의 '소주양포국'의 후신. 1885년 청불전쟁으로 폐지됨.
  5. 현재 하북성. 청의 직할지역이다.
  6. 양무파들이 근본적인 개혁은 놔두고 군사력이나 산업 부분만 개선하려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여겼고 서양의 제도에 주목했었는데 문제는 조정에서 양무파들은 소수였고 보수파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근본적인 개혁을 진행하기 어려웠다. 보수파들은 양무파들의 활동에 사사건건 비판을 가했고 탄핵하려고도 하여 일본처럼 중앙 정부에서 계획을 짜서 일관성 있게 개혁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