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토 테무르

Тогтох төмөр/脫脫帖木兒
(1314 ~ 1355)

원나라의 인물. 자는 대용(大用). 마자르타이의 아들. 메르기트 바얀의 조카이자 양자, 예센티무르의 형.

목차

행적

어려서 예센티무르와 함께 무주의 유학자인 오직방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남다른 힘을 발휘해 약 70Kg의 활을 가볍게 당길 정도로 힘이 셌고 1335년에 텡기스의 일파들을 물리치는 것에 공을 세웠다.

1338년에 어사대부가 되어 법강과 풍기를 엄숙하고 바르게 했으며, 상도에 북순을 돌다가 도중에 토곤 테무르가 사냥을 가자고 하자 천자와 대신이 함께 치도를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그 책무로 사냥 등은 예외가 있지 않다고 충고했다.

텡기스 일파들을 죽이고 숙부 바얀이 권세를 휘두르면서 토곤 테무르는 이를 참지 못했는데, 톡토 테무르는 바얀에게 은혜를 느끼면서 그가 실각하면 자신도 위태로울 것이라 생각했고 오직방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대의는 부모를 죽이고 대부는 국가에 대한 충절이 제1의 의가 된다는 말을 듣고 바얀을 타도하기로 결정한다.

톡토 테무르는 토곤 테무르를 찾아가 바얀에 대해 공이 높다고 교만해서야 되겠냐면서 그에 대해 반대할 뜻을 이야기했는데, 토곤 테무르는 그가 바얀의 조카라 의심했고 아버지 마자르타이에게도 바얀을 제거할 뜻을 밝힌다. 토곤 테무르의 신하인 세걸반, 아루 등에게 그 뜻을 이 이야기하고 1340년에 그 두 사람과 함께 바얀이 사냥을 나간 틈을 타서 추방시키는 것에 성공한다.

1341년에 승상이 되어 몽골인만 우위로 두는 제도를 고쳐 과거를 부활시키고 1343년에는 송사, 요사, 금사 등을 편찬했으며, 1344년에 사직했다가 1347년에 마자르타이가 감숙으로 좌천되자 이를 따랐다가 마자르타이가 그 해에 죽자 대도로 귀환했다. 1349년에 재상에 복귀했고 1350년에 설철독의 헌책에 따라 경제 파탄을 타개하기 위해 새 지폐마다 교초(交鈔)를 발행했지만 인플레이션을 조장하는 결과만 나왔다.

1351년에는 황하의 치수 공사에 착수했고 가노를 공부상서에 임명해 공사는 성공에 거뒀지만 이 공사는 백성들이 많이 투입되어 백성들의 불만을 낳았으며, 5월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예센티무르에게 10여 만의 군사를 주어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처음에 우세하다가 나중에 패하면서 예센티무르가 대도로 소환되어 12명의 감찰어사에게 탄핵되자 톡토 테무르는 이 어사들을 좌천시켰다.

1352년에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유복통, 지마리가 이끄는 홍건군을 공격하기 위해 원래 있던 병력과 2만의 군사를 모은 것을 합쳐 9일 만에 서주에 이르러 공격했으며, 이이등이 맞서자 철령전을 사용해 격파했고 다음날에도 서주를 공격해 함락했지만 병사들이 서주의 사람들을 무차별로 죽였다.

1354년에는 제왕에 봉해지고 제군에 임명되면서 서역의 지휘권을 부여받았고 많은 병력을 휘하에 편입하게 되었으며, 고우로 가던 중에 궐리에서 공자, 추현에서 맹자에게 제사를 지냈다. 11월에 장사성의 세력을 상대로 연전연승해 군사를 나누어 육합을 공략하고 장사성을 항복 직전까지 몰아붙인다.[1]

그러나 카마의 모함을 받아 사령관에서 해임되었고 대도로 돌아간 후 탄핵받아 좌천되었으며, 운남의 대리로 가던 도중에 독살당했다.
  1. 원은 이 장사성 정벌군을 800만이라고 과장을 심하게 치는 등 대군을 보내는데, 톡토의 해임이후 어처구니 없이 궤멸되게된다. 이 패배이후 원은 다시금 대군을 조직할 여력이 없어 한인 반란군의 공격에 수세로 일관하게 되고, 2년뒤 공민왕의 반원운동이 결정타가 되면서 몽골제국이 붕괴하게된다. 당시 원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국가가 고려였는데, 그 고려가 원을 거부하는 운동은 원이 그만큼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