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n Thị Kim Phúc; 潘氏金福(반시금복)[1]
1963년 ~
비교적 최근의 모습. 등의 화상이 선명하다.
1 개요
베트남에서 캐나다로 귀화한 베트남 전쟁 피해자이며, 현재는 UN 우호대사로 활동 중.
2 생애 초반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3년 남베트남 쨩방에서 태어났다. 1972년 6월 8일, 가족들과 같이 카오다이 사원에 은신 중이었는데 그 와중에 병사들이 도망치라고 외친지 불과 몇초 만에 사원 주변이 네이팜탄 공격을 당해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이 때 네이팜탄의 불길이 킴푹의 왼팔에 옮겨붙었고 킴푹은 불붙은 옷을 벗어던지고 도망쳤다. 그리고 화상의 고통 속에 도망치다가 실신했다.
파일:Attachment/Phan Thi Kim Phuc (1972).jpg
당시 네이팜탄 공습을 피해 도망치는 모습으로 가운데의 벌거벗은 소녀가 판티 킴푹이다. 사진상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은 등에 3도 화상을 입었다.(혐오스러울 수 있으니 열람 시 주의.)
당시 AP통신 기자였던 후잉 콩 우트는 이런 판티 킴푹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고, 미국 AP통신 기자증을 보여주며 캄푹을 잘 치료해달라고 부탁했다. 후잉 콩 우트는 위의 사진을 찍은 주인공이다.
병원에 입원한 킴푹은 여러번 피부이식 수술을 받은 끝에 입원한 지 13개월 후 퇴원했다.
3 의사의 꿈
킴푹은 자신의 화상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던 킴푹은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의대에 진학했으나 위의 사진의 실체를 알게 된 공산당 지도자에 의해 의대를 강제로 자퇴당해야 했다. 결국 외신 기자들의 도움으로 인해 서독으로 건너가 다시 치료를 받았다.
얼마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베트남 총리는 1982년 킴푹을 쿠바로 보냈으며 거기서 의대에 다니도록 조치했다.
4 캐나다로 망명
쿠바에서 유학하는 동안 같은 베트남 출신 유학생인 부이 후이 또안을 만나서 1992년에 결혼했다. 결혼 직후 신혼여행을 가던 도중 중간 급유를 위해 비행기가 캐나다에 잠시 들른 그 사이에 이 부부는 비행기에서 뛰쳐나와 캐나다 정부에 망명 신청을 했다. 캐나다 정부는 킴푹 부부의 망명을 허락하고 비호권을 행사했다.
이후 킴푹은 1997년 유네스코로부터 평화문화친선대사로 임명되었으며, 1998년에 캐나다 시민권을 얻어 귀화했다.
1997년에 킴푹 재단(Kim Phuc Foundation) 이라는 전쟁고아 및 전쟁에 의한 어린이 희생자들을 돕는 구호재단을 만들었다.
5 기타
그 당시 폭격기 조종사였다고 주장하는 존 플러머(John Plummer) 목사는 폭격 다음 날에 신문에 실린 그녀의 사진을 보고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려 24년을 그녀를 찾는데 보냈다. 그러나 그렇게해도 그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 찾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생활은 피폐해져갔다.
이후 1996년 재향군인의 날, 베트남 전쟁 기념관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했던 그는 우연히 그녀의 연설을 듣게되었다. 그는 당장 무대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그를 용서했고, 그는 24년간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게됐다.
다만 후에 지휘 계통쪽에 근무했던 인물의 증언과 기밀해제된 문서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실제로 공습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2][3] 이에 본인과 그의 지지자들은 반박하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참고로 이 일화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545회에 소개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