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502-1537)
6대 노섬벌랜드 백작(Earl of Northumberland) 헨리 퍼시. 헨리 8세의 둘째 왕비 앤 불린의 옛 약혼자/연인으로 알려져있다.
2 생애
헨리 퍼시는 슈루즈버리 백작의 영애인 메리 톨벗(Mary Talbot, 탈봇이 아니라 톨벗이라고 읽는다)라는 약혼녀가 있었지만 당시 프랑스 유학 생활을 마치고 아라곤의 캐서린의 시녀로 입궁한 앤 불린과 사랑에 빠져 1523년 결혼을 약속한다. 앤의 가문은 결코 신분이 낮지는 않았으나 잉글랜드 북부를 지키는 대귀족이었던 퍼시 가문에 비하면 약소했다. 앤은 앤 나름대로 아일랜드의 오몬드 백작 가문인 버틀러 가의 청년 과 약혼을 할 예정이었다. 앤에게는 아일랜드의 오몬드 백작 부인이 되는 것보다 잉글랜드의 노섬벌랜드 백작부인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출세하는 길이었다.
또 하나 유념해야 할 점은, 중세-근세 초기 유럽에서는 남녀간 혼인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서로와 결혼을 한다고 약속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는 것. 굳이 성직자가 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헨리 퍼시와 앤 불린은 큰 사고를 친 셈. 당시 거의 모든 귀족의 결혼은 왕의 사전 허락을 받아야 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슈루즈버리 백작과의 동맹을 바랐던 헨리 퍼시의 아버지(역시 헨리 퍼시다)는 상속녀를 차고 "겨우 기사의 딸"과 결혼하겠다는 아들에게 분노했다. 따라서 헨리 8세의 심복 토머스 울지 추기경은 젊은 헨리 퍼시를 직접 불러 혼쭐을 낸다. 마치 어린 아이를 다루듯이 호통을 친 내용이 기록에 남아 있다. 앤의 (기정사실) 약혼자가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집에서 살고 있었으니 더 감정이 실렸을 듯.
다만 헨리 8세가 이미 앤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기에 울지를 통해 연적 헨리 퍼시를 제거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때 헨리가 앤에게 관심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론은 아직 왕이 앤을 마음에 들어하기 전이었다는 것.
헨리 퍼시는 앤을 포기하고 1525년 메리 톨벗과 예정대로 결혼했다. 2년 후 아버지가 죽자 헨리 퍼시는 노섬버랜드의 백작이 되었다. 메리 톨벗과 헨리 퍼시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자기를 독살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했고 남편은 아내가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1532년에는 메리 톨벗이 남편은 이미 예전에 앤 불린과 결혼을 약속해서 부부가 되었으므로 자신과의 관계는 중혼이 되어 무효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시기에는 앤 불린과 헨리 8세가 불같은 연애 중이었고, 앤은 당장 진상조사를 명령했다. 헨리 퍼시는 결국 앤과는 결혼을 약속하지 않았다고 성서에 손을 얹고 굴욕적으로 맹세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 메리와의 사이는 당연히 나아지지 않았는데, 헨리 퍼시는 아예 '우리 부부 사이에선 애가 안 태어날테니 내 전재산을 왕에게 남기겠다'라고 공표했다. 아내랑 애를 낳을 생각도 없고 더군다나 아내에겐 한 푼도 안 남기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헨리 퍼시의 형제들이 펄펄 뛰었고, 메리는 결국 이혼을 신청했다.
1536년 5월, 헨리 퍼시는 옛 연인 앤 불린의 재판에 병자의 모습으로 참석한다. 앤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지자 헨리 퍼시는 기절했고 사람들에게 업힌채 실려나갔다. 그로부터 1년 후, 건강이 계속해서 나빠진 헨리 퍼시는 숨을 거두었다. 왕에게 넘어갔던 노섬벌랜드 백작령은 후에 헨리 퍼시의 조카 토머스 퍼시가 물려받게 된다. 아내와의 아이는 없는 대신 이자벨이라는 사생아 딸을 남겼다.
3 매체에서의 헨리 퍼시
3.1 울프 홀에서의 헨리 퍼시
BBC의 영드 울프 홀에서는 해리 로이드(Harry Lloyd)가 찌질하고 순진한 청년으로 연기한다. 왕좌의 게임에서 비세리스 타르가르옌 역을 한 배우다!
앤은 헨리 8세의 왕비가 되기 위해 한참 노력 중인데, 옛 연인이었던 헨리 퍼시가 나타나 내 진정한 아내는 앤이라고 주장하는 사고를 쳐버린다. 왕과의 결혼이 걸린 문제이기에 앤 불린과 불린 가족은 당연히 뒤집어진다. 결국 토머스 크롬웰이 헨리에게 협박을 하러 파견되어 반폐인 꼴인 헨리 퍼시에게 "앤은 당신을 미워해요. 증오하죠. 당신이 사라졌으면 하고 있어요."라고 친절하고 차분하게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