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 아라곤의 캐서린
Catherine of Aragon
1485-1536
(헨리 8세와의 결혼 기간 : 1509 - 1533)
이사벨라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막내딸로,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다. 이 때문에 아라곤의 캐서린이라고 불린다. 헨리 8세의 첫 아내며, 후에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의 지배자가 되는 카를 5세의 이모.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각자 왕국을 다스리는 군주였기 때문에 특별히 고귀한 혈통으로 여겨졌으며, 여기에 대한 긍지는 후에 캐서린의 행보에도 영향을 끼친다.
1.1 냉대받는 왕세자빈
어렸을 때 잉글랜드의 헨리 7세의 장남이자 헨리 8세의 형인 아서와 약혼을 했고, 15세였던 1501년 스페인을 떠나 아서와 결혼을 했다. 아서는 헨리 7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왕자였으나 나이도 어렸고 유달리 병약한 체질이었기에, 과연 동침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부부가 결혼 서약을 했더라도 동침을 하지 않으면 결혼이 성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동침하지 않으면 결혼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 후에 캐서린은 시동생이었던 헨리 8세와 결혼할 때 동침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녀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을 교황청에서 받아들여서 결혼이 성사된 바 있다.
아서와 첫 결혼을 하고 그 이듬해인 1502년에 아서와 캐서린 모두 병에 걸리는데, 캐서린은 회복했지만 아서는 목숨을 잃고 말았고, 캐서린은 16세에 왕세자의 미망인(princess dowager)이 된다.
여기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헨리 7세는 사돈인 페르난도 2세가 지참금을 다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캐서린이 자기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헨리 7세는 장미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던 잉글랜드의 왕이었기에 다른 군주들에 비해서 그리 부유하지 못한 데다 굉장한 구두쇠로 악명이 높았다. 헨리 7세의 지참금 요청에 페르난도 2세는 지참금을 다 보냈다고 주장해 버림으로써 캐서린만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 사이에서 불쌍하게 애매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헨리 7세는 에스파냐와의 동맹은 놓치기 싫었기에 차남 헨리, 즉 미래의 헨리 8세와 첫째 며느리였던 캐서린을 맺어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시사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확신은 주려 하지 않았다.
지참금 협상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헨리 7세는 낯선 나라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캐서린에게 "너는 내 식객이나 마찬가지다."라며 심하게 눈치를 주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캐서린이 친정아버지인 페르난도 2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대국의 왕녀라는 지위가 무색할 정도로 빈곤하게 지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시아버지의 궁정에서 제외된 상태였던지라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들의 월급을 지급하는 것은 고사하고 당장 끼니에 먹을 것을 마련하는 것부터가 힘든 형편이었다. 이 와중에 헨리 7세는 캐서린을 차남과 약혼시키겠다고 간을 보다가 지참금을 다 못 받아냈으니 취소하자는 등 계속 희망고문을 해댔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페르난도 2세 또한 캐서린에게 딱히 돌아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먼 잉글랜드로 떠나보낸 딸의 안위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상태가 무려 7년이나 계속되었다.
1.2 헨리 8세의 사랑
다행히도 헨리 7세가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왕위에 오른 십대의 헨리 8세는 프랑스나 다른 나라의 왕녀와도 혼담에 오갔음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에게 청혼을 한다. 형수와 결혼하는 것은 근친상간으로도 여겨질 수 있었지만, 일단 캐서린이 자신이 처녀였기 때문에 사실은 형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절차를 거치고서 교황청에서는 둘의 결혼을 허가했다. 많은 창작물에서 캐서린은 보통 검은 머리에 매력없는 늙은 스페인 여성으로 나오지만 사실 캐서린은 상당한 미인이었다. 키는 매우 작았으나 고전적인 미인의 조건인 새하얀 피부, 치렁치렁한 금발, 푸른 눈동자를 모두 갖춘 여인이었다고. 더구나 캐서린은 대국의 왕녀라는 지위를 갖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낭만적이며 기사도를 좋아했던 헨리 8세는 "7년이나 시련을 겪은 가엾은 공주"를 자신이 구출한다는 사실에도 매력을 느꼈다.
훗날 그 유명한 앤 불린이 등장하고 헨리 8세가 앤과 결혼하기 위해 사실상 캐서린을 내치는 방식의 이혼까지 강행한 것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은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애정이 없었다고 오해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첫 결혼을 하던 당시만 해도 캐서린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십대 무렵 쓴 시에서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나는 캐서린을 골라 결혼할 것이다."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1]
캐서린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성격은 순종적이고 얌전했으나 한편으로 7년간 시아버지의 핍박을 견딘 경험 덕분에 인내심도 대단하였으며 에스파냐의 왕녀보다는 어렵게 획득한 잉글랜드의 왕비 지위에 더 높은 자긍심을 가졌다고 한다. 결혼 초기에는 부부 금실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기에 캐서린은 헨리 8세와의 사이에서 무려 여섯 번이나 아이를 가졌었다. 이 과정에서 아들도 여러 번 낳기는 했으나 공교롭게도 모두 사산하거나 태어난 지 얼마 못 되어 숨졌다.[2] 당시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높은 사망률을 딛고 그나마 살아남은 자식이 딸인 메리 1세 뿐이었다. 그래서 헨리 8세는 앤 불린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유일한 적자녀인 메리 1세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1.3 이혼
하지만 세월이 지나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한 채 늙어간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헨리가 앤 불린과 만나 반하면서 그녀는 헨리에게 눈엣가시가 되고 말았다. 헨리가 젊고 매력적인 앤에게 푹 빠져 있기도 했지만 당시 헨리는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서 형수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에 오래도록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튜더 왕가 이전에 왕권을 계승했던 플란타지네트 가문의 계승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헨리는 자신에게 적법한 남자 후계자가 없으면 자신의 사후에 튜더 왕가가 왕위를 찬탈당할까봐 무척이나 두려워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즉 왕비가 왕자를 낳지 못해서 자기 대에서 튜더 왕가의 맥이 끊어질까 걱정했던 것이다.[3] 그래서 왕자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형수와 결혼해 신의 저주를 받은게 아닌가 고민하던 찰나에 앤이 등장한 것이다. 젊은데다 전통적인 캐서린과는 전혀 다른 신선한 매력으로 무장한 앤은 자신에게 몸이 달아 있는 헨리에게 '왕자를 낳아드릴 수 있으니 왕비로 삼아달라.'고 끊임없이 결혼을 요구했다. 결혼하면 원하던대로 자신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유혹하면서.
헨리는 앤을 왕비로 책봉하기 위해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하기로 한다. 그녀가 원래 형인 아서의 아내였다는 점, 형수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성서의 구절을[4] 어겼다는 이유를 들어 교황에게 이혼을 청구했으나, 교황은 당시 위세가 높던 에스파냐와 신성로마제국의 압력[5] 때문에 이를 기각했다.
이 과정에서 무려 7년 간의 지루한 공방이 이루어진다. 자신의 유일한 자녀인 메리 1세의 신분과 안위를 걱정하여 이혼을 극렬히 거부해대는 캐서린의 고집과 자기를 왕비로 세워달라는 앤 불린의 닦달에 동시에 시달리며 헨리는 그야말로 녹초가 돼버린다.
헨리는 캐서린에게 수도원에 들어가라고 했으나, 캐서린은 절대 용납하지 못했다. 캐서린은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는 것이 신이 내려주신 운명이라 생각하였으며, 왕은 앤 불린이라는 요부의 손에 놀아나면서 죄에 빠져들고 있을 뿐이며 결국은 진정한 아내인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고모로서 캐서린은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앤 볼린을 이단으로 생각하였기에, 앤이 왕비가 된다면 헨리가 이단에 빠져들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물러나면 사랑하는 외동딸이자 왕위 후계자인 메리 1세의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그리고 만약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이 적법한 것이 아니었다면, 대 에스파냐의 왕녀이자 잉글랜드의 왕비였던 자신은 헨리 8세와의 사이에 사생아를 낳은 창녀에 불과하다는 말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캐서린은 이미 아서가 죽은 후 7년간 시아버지의 냉대를 버틴 경험이 있지 않은가? 신은 그녀의 인내에 헨리 8세와의 결혼으로 보답하지 않았던가? 당연히 캐서린은 굽힐 생각이 없었다.
헨리는 한편 순종적이라고 생각했던 아내가 의외로 끝까지 자기 맘대로 해 주지 않자 대단히 화를 내고, 그녀를 증오하게 된다. 얼굴조차 보지 않고 궁정에서 내쫓은 후 메리가 어머니인 캐서린과 만나는 것조차 막았으며 앤에게 주기 위하여 캐서린이 지니고 있던 왕가의 보석들도 회수해 가져간다. 교황청에서는 헨리의 요청을 들어줄 듯 하다가 결국 캐서린의 조카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압박에 굴복하여 결혼은 적법하다고 선언해버린다. 결국 헨리는 국교회를 설립함으로써 교황과 결별을 선언하고, 자신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면서까지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했다. 이 과정에서 토머스 크롬웰이 왕의 오른팔로 떠오른다.
아서와 결혼했지만 자신은 처녀의 몸으로 헨리와 결혼했으므로 절대 이혼할 수 없다고 버티던 캐서린은 결국 다른 궁으로 쫓겨갔으며 한때 왕비라고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초라하고 궁핍하게 살아야 했다. 결혼 무효화에 저항하느라 헨리에게 미움을 산 탓에 연금 같은 게 일체 나오지 않아서 시종들에게 급료를 줄 수조차 없었기 때문에 세간과 보석, 옷을 팔고 여기저기서 빚을 내기도 했을 정도라 한다. 게다가 저렇게 쫓겨난 후에 그토록 그리워했는데도 메리와 다시 만날 수도 없었다.
일방적인 이혼을 당해 궁에서 쫓겨나고 메리와 생이별한 채 어렵게 지내다 2년여쯤 뒤에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떴다. 향년 51세. 캐서린의 시신은 부검됐는데 부검의가 "심장에 시커멓게 종양이 있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현대 의학 관점에서 보면 암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에는 앤 불린이 독살을 한 거다, 왕을 너무 사랑해서 심장이 썩어 들어간거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캐서린은 생전에 덕망이 높고 인기가 많았던 왕비였기에 많은 이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캐서린은 헨리 8세에게 "당신이 내게 저지른 모든 것을 용서하며, 우리 딸 메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기고자 합니다. 오직 당신 만을 다시 한번 보고 싶습니다."라고 애끓는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그러나 헨리는 오히려 캐서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앤과 함께 축하를 뜻하는 노란 옷을 입고 공식석상에 나란히 나타났다. 심지어 앤은 캐서린의 사망 소식을 듣자 "이제야 내가 진정한 왕비가 된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하고 다녔다는 비화도 있다.그러나 진정한 왕비가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신 역시 캐서린처럼 아들을 일찍 잃고 목이 달아난 게 함정... 시신도 예를 갖추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하는 대신 피터부르 사원에 매장했다.
어머니의 이런 아픔을 보고 자라며 졸지에 사생아가 된 데다가 어머니의 임종까지 지키지 못했던 메리는 앤 불린을 매우 증오했다. 아내 캐서린의 고집과 교황청의 반대, 그리고 당시 유럽의 패왕으로 캐서린의 조카인 카를 5세의 강력한 압박이 있었지만 결국 헨리 8세는 교황과 결별하고 성공회를 창립하면서까지 이혼을 거쳐 앤과 결혼하기에 이른다.
덧붙여 이 때문에 메리가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를 싫어하고 경계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 자매의 사이가 정말 어떠했는지에 대해선 엇갈리는 이야기가 몇 개 있어서 확실하진 않다. 그 때문에 메리가 엘리자베스에게 느낀 건 애증이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많다. 확실한 건 메리가 즉위한 후엔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 탓에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유일한 피붙이라 엘리자베스를 빌미로 수많은 반역 모의가 있었는데도 엘리자베스를 처형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죽일 정도로 미워하진 않았다는 견해가 있다. 메리는 상당히 정이 많고 무른 면이 있었기 때문에 복잡한 감정을 가졌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 한국사에 비유하면 경종과 영조의 관계와 유사하다.
순종적이지만 고집이 강한 성격으로, 6년이라는 긴 재판기간 동안 자신이 진정한 잉글랜드의 왕비라는 것을 주장했고 앤 불린이 잉글랜드의 왕비로 즉위한 뒤에도 자신의 모든 문서 서명을 'Katherine the quene'(고어표기다)으로 한다.
죽은 뒤 피터부르 대성당에 묻혔고, 어머니 임종조차 지킬 수 없었던 딸 메리 1세가 어머니 옆에 묻혀지길 원하지만 결국 그 꿈은 이뤄지지 못한다. 대신 메리의 옆자리는...메리 1세 항목 참조.
샌드맨에 나오는 불사신 로버트 가들링은 아라곤의 캐서린은 무어인 혼혈이라고 했다. 그왈 1960년대 앨러배마에서는 버스 뒷좌석에 앉아야 했을거라고. 당연하지만 만약에 캐서린이나 그녀의 후손들이 보면 천인공노할 말이다. 그리고 위에 나온 외모 묘사를 봐도 도저히 무어인 혼혈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다. 도리어 1960년대 앨러배마에서는 매우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외모였을 것이다(...)
2 튜더스에서의 캐서린 왕비
마리아 도일 케네디[6]가 연기한 아라곤의 캐서린.
시즌 1, 2에 걸쳐서 등장, 극 중에서 발음이 심히 뻣뻣(?)한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스페인 공주다운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전형적인 현모양처형의 왕비로 정말 답답할 정도로 헨리에게 사랑을 쏟는다. 백성들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이 쫓겨난 뒤 혹시나 스페인이 보복할까봐 자기 심복이었던 스페인 대사 차푸이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대인배로 그러졌다.[7] 궁을 옮길 때 신하들이 전부 그녀를 My Lady라고 칭하는 반면, 마중나온 백성들이 그녀를 'Her Majesty'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인기 있었던 왕비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녀에 대한 인기가 앤 불린의 죽음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다. 극중에서 앤이 왕비가 된 후 자선활동을 하며 백성들에게 돈을 주는 씬이 나오는데 돈을 받은 백성들이 '캐서린 왕비는 이것보다 더 주셨다.'며 앤을 원망하는 씬이 나오기도 한다.
죽어가면서도 하나뿐인 딸 메리를 볼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만 헨리에게 편지를 남겼다. 그리고 그녀의 편지를 전해받은 헨리는 자신에게 끝까지 다정하게 대했던 캐서린을 떠올리면서 그녀의 죽음에 슬퍼하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또한 그녀의 독실한 신앙 생활을 극중에 자주 나타나는데 정작 그동안 남편은 그녀가 의지한 시녀와 검열삭제를 벌여 시녀를 임신까지 시키는 바람에 나중에 이를 알고 상처받는다. 오프닝 크레딧에서도 묵주는 그녀의 상징이고 그 상징은 후에 그녀의 딸, 메리 튜더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성격은 앞서 말한대로 현모양처형이며 해바라기처럼 헨리를 사랑하지만, '잉글랜드의 왕비'라는 칭호를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역사 속의 캐서린처럼 튜더스에서도 왕비 직위를 결코 앤 불린에게 내주려하지 않는다. 이혼을 위한 법정에서도 그녀는 무릎을 꿇고[8] 자신이 처녀였음과 아직까지도 헨리의 아내이고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결국 쫓겨가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을 잉글랜드의 왕비라 생각하며 딸 메리가 왕가의 적법한 자손으로서 적합한 대우를 받기를 바란다.
시즌 4 마지막 화에서는 늙고 병들어 임종을 앞둔 헨리 8세 앞에 유령의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때 생전에는 보이지 않던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하느님 눈 앞에서는 자신만이 헨리의 진짜 부인임을 강조한다. 또한 하나뿐인 딸 메리가 여태껏 헨리 때문에 약혼을 번복하고 결혼조차 못한 채 쓸쓸히 있는 것에 대해 "이 아이는 진작에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어야 했다."며 분노를 표했다.
- ↑ 모 교육만화에서는 헨리 8세가 '내가 왜 늙고 못생긴 형수와 결혼해야 하냐.'고 반발을 하는 것으로 묘사해 놓았다.(...) 물론 당시 캐서린은 '늙고 못생긴 형수'가 아니라 20대의 한창 나이였다. 이 책에 있는 숱한 고증 오류 중 하나.
- ↑ 튜더스 시즌 1에서 시녀에게 '아들을 낳았지만 태어난 지 엿새만에 내 품에서 죽었다. 아주 귀여운 아이였다. 그리고 그 후로 전하께서 제게 발걸음을 안 하신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 바 있다. 이와 비슷하게 영화 천일의 스캔들에서는 캐서린이 아들을 사산하여 아직 어린 딸 메리 1세에게 '왕위를 이어갈 네 남동생을 낳지 못했다.'고 울며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캐서린이 낳은 아들이 생후 며칠만에 숨진 경험 때문에 헨리 8세는 훗날 제인 시모어가 에드워드 6세를 낳았을 때 그 건강에 엄청난 신경을 썼다고 한다.
- ↑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미혼으로 살다 죽은 후로 튜더 왕가의 맥이 끊어졌으니 이 걱정이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 ↑ '레위기 20 : 21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자는 자식이 없을것이다' 라는 구절. 드라마 '튜더스'에서는 헨리의 고해를 받고 이 구절을 말해준 신부가 '자녀분이 계시잖습니까?'라고 하자 심각하게 '아들은 없소.'라고 받아친다.
- ↑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카를 5세로 에스파냐 왕이며, 캐서린의 조카였다.
- ↑ 아일랜드 출신 가수 겸 배우. 덱스터 시즌 5에서 아일랜드계 보모 소냐를 맡기도 했다.
- ↑ 그러나 정작 스페인 측은 캐서린이 죽은 뒤에는 메리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 ↑ 극 중 그 분위기를 보면 상당히 돌발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