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불린

1 헨리 8세의 두 번째 아내 앤 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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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Boleyn 앤 불린(발음은 /ˈbʊlɪn/, /bəˈlɪn/, /bʊˈlɪn/ 등.)
1507? - 1536. 영국의 왕비. 헨리 8세의 두번째 부인이자 엘리자베스 1세어머니. 그리고 영국의 희빈 장씨

아버지 토머스 불린외교관이었고 어머니는 명문 하워드 가의 영애 엘리자베스 하워드였다. 자매로는 메리 불린, 형제로는 조지 불린이 있다. 외삼촌이 대귀족이었던 노퍽 공작(Duke of Norfolk) 토머스 하워드였다.

불린 가문은 원래 상인 집안이었으나 점차 세가 강해졌고 그녀의 부친에 이르러서는 명문 귀족과 결혼할 수 있을 정도로 가세가 성장했다고 한다. 태생부터 범상치 않은 배경을 가지고 있던 셈이다. 노퍽 지방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프랑스에서 성장했는데, 이미 7세에 5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이 어학에 대한 특출난 재능은 능력 있는 외교관으로 알려져 있던 아버지인 토머스 볼린에게서 물려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세간에는 '유부남이었던 헨리 8세를 사로잡아 왕비 자리까지 얻어낸 미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이 통념과 달리 앤은 당시 기준으로 특별한 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앤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에 따르면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거뭇한 피부를 지녔다고 하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금발과 흰 피부를 미인의 조건으로 쳤기 때문에 미인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상당히 이국적인 외모에 속했다. 금발에 푸른 눈이었던 언니 메리 불린이 더 미인으로 여겨졌다. (메리는 유학을 간 프랑스 궁정에서 난잡한 성생활을 했으며 잠깐 헨리 8세의 정부로 있기도 했다.)

그러나 유달리 반짝이고 표정이 풍부한 검은 눈이 매력적이었기에 앤에게 적대적이었던 이들조차 그 아름다운 눈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춤도 잘 추고, 교양이 풍부한데다 화술도 뛰어나서 남자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일단 당시 유행의 최첨단이었던 프랑스 궁정에서 오래 교육을 받고 몸가짐을 익혔기 때문에, 매우 세련되고 매력적이었으며, "잉글랜드 여성이 아니라 프랑스 여성 같았다"라는 감탄 섞인 묘사가 남아 있다. 또한 지적이었으며 신학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마르틴 루터가 주도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던 당시 앤은 교회 개혁을 지지했다.

워낙 정적이 많았기에 마녀였다, 손가락이 하나 더 있거나 유방이 하나 더 있는 기형이었다, 사악했다 등의 악성 루머가 많지만, 당대 기록에 의하면 매력적이고 재치있으며 적어도 지인을 비롯한 절친한 사람들에게는 선량한 여자였다.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신교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다혈질인데다 성정이 날카로워서 화가 나면 할 말과 못할 말을 가리지 못했으며 질투심이 많아 히스테리를 부리기도 했다고. 그리고 이 날카로운 성정과 강한 질투심이 왕비가 된 후로 악재로 작용했다는 평이 중론이다.

15세에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궁정에 들어가 헨리 8세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캐서린 왕비의 시녀가 된다. 아버지 토머스 볼린은 앤을 본래 볼린 가문과 재산 분쟁이 있던 아일랜드의 버틀러 가문의 아들과 결혼해서 분쟁을 종식시키려고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약혼은 흐지부지된다.

앤은 곧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가문인 노섬벌랜드 공작 가문의 아들 헨리 퍼시와 연애 끝에 약혼(precontract)하려 했으나 퍼시의 가족과 헨리 8세와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반대로 결혼은 무산된다. 후대에는 헨리 8세가 흑심을 품고 있던 앤을 차지하기 위해 토머스 울지 추기경과 짜고 앤과 퍼시를 갈라놓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미드 튜더스에서는 실제로 이 소문이 나오기도 하지만, 학자들 대다수는 그렇다고 보기에는 시기가 너무 이르기에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앤이 퍼시와 약혼했을 때에는 헨리 8세와의 관계는 시작되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또한 퍼시의 가문인 노섬벌랜드 공작 가문은 잉글랜드에서 손꼽히는 대귀족 가문이기에 퍼시 역시 그에 걸맞는 지위와 재산을 지닌 가문 출신인 약혼녀 메리 톨벗이 이미 있었으며 귀족 청년이 왕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결혼한다는 것은 왕궁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죄였다. 그러나 앤은 이 사건으로 울지 추기경에게 앙심을 품고, "할 수 있는 만큼 복수해 주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후에 앤이 왕의 애정을 얻게 되었을 때, 울지 추기경은 아라곤의 캐서린과 헨리 8세 사이의 결혼 무효화 협상을 실패했고, 앤과 헨리는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울지 추기경을 몰락시켰다. 왕의 오랜 심복이었던 울지 추기경은 시골로 쫓겨나 초라한 최후를 맞게 된다.

1520년대 중후반에 헨리 8세는 젊고 재치있는데다 매력적인 앤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헨리 8세는 앤에게 정부가 되어 달라고 했으나 앤은 왕의 사랑을 받은 당대의 여느 귀족 여인들과 달리 정부가 되기를 거부하여 헨리 8세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교묘하게 그의 애정을 부채질해 애태운다. 프랑스에는 공식 정부인 메트레 상티트르라는 지위가 있었는데,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궁정에서 전례가 없는 지위를 앤에게 약속했으나 앤은 거절했다. 앤은 결혼을 원했다.[1] 앤은 여자로서의 매력으로 헨리 8세를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재치있는 입담과 지성으로도 그를 매혹시켰다. 신학에 조예가 깊은 앤은 역시 재야 신학자였던 헨리 8세와 신학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몇 년이나 앤과 사랑을 나누던 헨리 8세는 오랜 결혼생활로 감정이 소원해진데다 자신보다 연상이라 이제 더는 자녀를 낳아줄 수 없는 아내 캐서린과 헤어지고 젊고 매력적인 앤과 결혼하여 적법한 아들을 낳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사실 앤이 헨리를 일방적으로 들볶아서 이런 결정을 내리게 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헨리 또한 간절히 앤과의 결혼을 원했으며 결국 이후 벌어진 사태에서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헨리였다. 앤이 헨리에게 동침을 허락한 후에도 헨리는 사생아가 아니라 적법한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며 거절하지 않았겠느냐, 라는 설도 있다.

캐서린이 에스파냐의 왕녀이기에 당시 헨리 8세에게 이혼이 정치적, 법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혼, 더 정확히 말해서는 결혼 무효화를 감행했던 것은 왕이 그만큼 대단히 절박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헨리 8세는 튜더 왕가의 유일한 남성이었고 그가 재위기에 적법한 남자 후계자를 낳지 못하면 헨리 7세가 세운 튜더 왕가는 겨우 2대 만에 끝날 터였다. 그리고 그렇다면 장미전쟁처럼 피비린내나는 내전이 다시 한번 벌어질 위험이 있었다.

결국 헨리 8세는 캐서린과 그녀와의 결혼을 무효화(annulment)해줄 것을 교황에게 요구했다. 명목상의 이유는 캐서린이 헨리 8세의 형인 아서 왕자와 먼저 결혼한 몸이었으므로 처녀가 아니었고, 따라서 정당한 결혼이 아니라 신이 진노했기 때문에 아들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이 이유는 근거가 희박하다. 캐서린이 헨리 8세의 형 아서와 결혼했을 당시에 두 사람은 모두 너무 어린데다 아서가 병약해서 부부관계를 가진 바 없으며, 실제로 아서가 요절한 이후에 캐서린이 처녀라는 공식적인 증거가 영국 궁정에 제시되었기 때문에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이 이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년 남짓한 결혼기간 동안 호색한으로 악명 높았던 헨리 8세조차 첫날밤에 캐서린이 처녀였다고 자주 자랑하곤 했다. 심지어 독실한 캐서린은 아예 성서를 걸고 헨리 8세와 결혼했을 당시에 자신이 처녀였다고 맹세한 바 있다.

교황은 결혼 무효화 요청을 불허했다. 캐서린의 조카가 당시 에스파냐(스페인)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였던 데다가 교황 역시 자신의 세력이 약해져 황제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평소 순종적이었던 캐서린은 헨리 8세의 예상과는 달리 끝까지 자신만이 잉글랜드의 진정한 왕비이며 헨리 8세와의 결혼은 정당한 것임을 주장하며 버텼다. 7년에 걸친 긴 법적 공방과 로비 끝에 헨리 8세는 마침내 수장령을 선포하고 로마 교황청과의 절연을 선언하여 영국 종교개혁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 결과로 성공회가 만들어졌다. 신교에 관심이 많았던 앤은 영국 내의 종교 개혁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연인 관계인 헨리 8세에게 영향력을 미쳐 이때 영국 종교개혁의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533년 1월, 첫 왕비 캐서린이 강제로 추방된 상태에서 헨리 8세와 앤은 마침내 비밀리에 결혼식을 치뤘다. 이 때 앤 불린은 이미 첫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으며 그 해 부활절에 헨리 8세는 앤의 임신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2] 헨리는 앤이 임신한 아이가 그렇게나 고대하던 아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점성가들 대다수도 왕자의 탄생을 예고하여 이미 궁정서기들은 왕자의 탄생을 알리는 공식 문서까지 작성해 둔 터였다.

같은 해 9월에 앤은 헨리 8세와의 사이에서 첫 아이인 엘리자베스 왕녀를 출산했다. 앤이 왕자를 낳을 것이라는 예상이 궁정에 널리 퍼져 있어서 모두들 실망했으나, 정작 헨리 8세는 "왕비가 공주를 낳았으니 곧 왕자도 낳을 것이다."며 무척 기뻐했고 딸을 낳아 실망하고 있던 앤에게 "곧 아들들도 태어날 거요."라고 자신있게 말했다고 한다. 훗날 엘리자베스 1세가 된 이 왕녀는 후대에 헨리 8세를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가장 빼닮은 자녀로 평가된다. 아이의 탄생을 알리는 공식 문서에 적힌 "왕자prince"에는 s를 뒤늦게 추가해 "공주princes"라고 표시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를 출산한 후로 앤의 운명은 빠르게 내리막을 걷게 된다. 자그마치 7~8년간이나 열렬히 사랑했던 두 사람의 결혼은 겨우 2년 9개월여만에 파국을 맞고 만다.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해 왕의 애정을 잃은 것이었고, 여기에 불을 당긴 것이 지금까지 앤의 논란 많은 행보에 겹친 여러가지 불운이라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일단 앤은 캐서린 왕비를 내쫓는 과정에서 국내외적으로 신망을 크게 잃었다. 앤의 전임자였던 캐서린 왕비는 왕자를 낳지 못했다는 유일한 흠만 빼고는 워낙 모범적인 왕비의 전형인지라 서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또한 덕이 높은 조강지처를 여우 같은 젊은 여자가 내쫓는다는 구도는 앤이 악녀라는 평판을 얻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앤이 헨리 8세의 연인이었던 시절에 앤이 왕비가 되고자 캐서린 왕비를 몰아내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분노한 백성들이 앤을 습격하려 했다는 비화가 있을 정도다. 여담이지만 후에 사람들은 앤을 여섯 손가락의 마녀[3]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데 물론 이는 후대의 전설이다.

또한 앤은 신교도는 아니었으나 정치적, 개인적인 이유로 교회 개혁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이를 지지하면서 보수적인 세력과 부딪힐 수 밖에 없었고, 앤이 사실상 잉글랜드와 로마 교황청의 관계 단절의 동기 역할을 했으니 종교 갈등의 시대에 적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앤과 불린 가문의 몰락을 바라던 정적들이 많은 상태에서 앤은 헨리 8세의 총애를 잃어 결혼의 조건이었던 적법한 아들을 그에게 안겨주는 데에 끝내 실패했고, 결국은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앤과 캐서린 왕비의 소생인 메리는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앤은 메리에게 자신을 새어머니로서, 잉글랜드의 왕비로서 인정해 달라면서 화해의 손길을 몇 번 보낸 바 있으나 어머니가 쫓겨나는 과정을 다 지켜보며 계속 어머니의 편을 들고 있던 메리는 끝내 앤을 인정해 주지 않았고 "나는 우리 어머니 외의 영국 왕비는 모른다."며 저항했다. 이에 불같은 성격의 앤은 메리를 당시 아기였던 친딸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삼아 기저귀를 가는 등의 일을 직접 하게 시켰고, "시종과 결혼시켜 버리겠다!"등의 악담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메리는 앤과 원수지간이 됐으며, 상전으로 모셔야 했던 엘리자베스 역시 앤의 딸이라는 이유로 좋은 감정을 갖지 못했다. 단 앤 사후에도 끊임없이 엘리자베스를 경계하면서도 자매의 정을 주는 애증의 사이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4] 엘리자베스가 어머니의 원수인 앤의 딸이어도 죄 없는 엘리자베스까지 덩달아 미워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실제로 메리는 자신이 즉위한 후에 엘리자베스가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자 처형할 수도 있었는데도 살려준 적도 있다. 물론 엘리자베스가 진짜 역모를 꾸민 게 아닌데다 당시 튜더 왕가에 남은 직계 왕족이 얼마 없어서 내린 결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메리가 엘리자베스를 극렬히 증오했다는 증거도 없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편이었던 사람들과도 갈등이 생겨 다퉜고 결국에는 척을 지게 되었다. 자신을 지원해 주었던 토머스 크롬웰과 사이가 벌어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크롬웰이 헨리 8세가 믿고 있었던 최측근이었기 때문. 외가이자 잉글랜드의 명문 하워드 가문의 수장인 외삼촌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5]와도 사이가 틀어졌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왕자를 낳지 못하고 엘리자베스 이후로 가진 아이를 연달아 유산하거나 사산했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바는 없고 여러 가지 설만 있다.

일단 앤의 혈액형이 RH- 형이라 첫째인 엘리자베스는 항체가 형성되지 않아서 무사히 낳을 수 있었지만 둘째부터는 항체가 형성되어 태아의 적혈구가 파괴되는 바람에 조기에 유산했다는 학설이 있다. 앤의 유해를 연구한 결과도 이 학설을 뒷받침해 준다고는 하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

헨리 8세의 모든 부인들은 물론 정부들도 임신과 출산에 문제가 있었으며, 태어난 자식들 중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제외한 상당수도 요절한 것을 생각해 보면 헨리 8세에게 매독이 있었거나 그밖에 여러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세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가 낳은 그의 유일한 적자 에드워드 6세가 요절한 것도 헨리 8세의 난잡한 성생활 때문에 발병한 선천성 매독 때문이라는 설이 있기도 하다. 에드워드 8세를 낳기 전에는 정부와의 사이에서 서자 헨리 피츠로이를 낳았는데 헨리 피츠로이 역시 1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뿐만 아니라 첫번째 부인인 캐서린 역시 아들을 비롯하여 많은 아이들을 낳았으나 메리를 제외한 모두가 일찍 죽었다. 당시 영아 사망률이 높은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라지만, 그렇게나 많이 낳았는데도 하나같이 일찍 죽은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기는 하다. 다만 매독이었더라면 헨리 8세의 자세한 의료 기록에 당시 매독의 특효법으로 여겨졌던 수은 치료를 한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전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매독은 아니라는 설이 더 힘을 얻는다.

중세 사회에서는 태아의 성별 등 임신과 출산의 모든 부분의 여자에게 달려 있다 생각했으므로 계속 유산과 사산을 반복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자의 탓으로 여겨졌다.[6] 또한 감염에 대한 인식이 없어 아이를 받는 산파가 손을 씻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던 당대의 위생 관념이나 무엇보다도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유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앤과의 결혼이 끝나갈 무렵에 헨리 8세는 앤의 시녀로 있던 조용한 여인 제인 시모어에게 빠져 있었는데, 당대 기록에는 제인을 무릎 위에 앉히고 시시덕거리는 장면을 당시 임신 중이었던 앤이 보고는 충격을 받아 그 길로 남자아이를 유산했으며, 그 모습을 보고 헨리가 "하늘은 우리에게 아들을 주지 않으려는가 보오."라고 발언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일이 이렇게 되자 헨리 8세는 또 신이 자신의 결혼을 반기지 않는다고 여기고, 앤의 시녀였던 순종적이고 조용한 제인 시모어를 왕비로 세울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 앤과의 결혼을 무효화하려 한다.

앤은 그녀의 적마저 놀랄 정도로 신속하게 몰락했다. 국내외적인 비난 여론, 앤 자신의 다혈질적인 성격, 거기에 잇따른 사산 등으로 앤은 왕의 사랑을 점차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앤의 젊은 시녀인 제인 시모어를 사랑하게 된 헨리 8세는 그녀를 런던 탑에 가두고 그녀가 6명의 남자와 간통을 저지르고 특히 남동생[7]인 조지 불린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누명을 씌운 뒤[8] 사형 선고를 받게 했다. 헨리 8세는 과거에 앤에게 주었던 불같은 사랑을 이제 와서 마녀의 마법이라며 애써 부정했다. 그래서 캐서린에게 그랬듯이 이혼이 아닌 결혼 무효화로 앤을 버렸고, 결국 당시에 고작 3세에 불과했던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를 잃으면서 사생아로 전락하며 계승권도 잃게 된다. 여담이지만 당연히 "엘리자베스 왕녀(Princess Elizabeth)"에서 "레이디 엘리자베스(Lady Elizabeth)"로 호칭도 바뀌었는데 영특했던 엘리자베스가 이 사실을 바로 알고 "왜 이제는 나를 왕녀라고 부르지 않느냐?"고 물었다는 비화도 있다. 물론 나중에 헨리 8세의 분노가 풀리면서 계승권은 회복했다.

헨리 8세가 앤에게 죄를 씌워 처형하기로 결심을 한 동기에는 첫번째 부인인 캐서린 왕비가 절대로 이혼을 해 주지 않고 버티느라 애를 먹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순종적인 캐서린 왕비가 저렇게 고집스럽게 버틴다면, 강한 성격의 앤은 얼마나 일을 피곤하게 만들지 상상하기 쉽다. 한편으로, 캐서린 왕비는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왕의 딸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조카가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상당한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막 세력을 얻기 시작한 볼린 가문의 딸인 앤은 자신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지켜줄 세력이 없었다. 앤은 헨리 8세의 애정밖에 기댈 곳이 없었고, 애정이 사라진 지금은 간단하게 처리해 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씻을 수 없는 패륜인 근친상간이라는 충격적인 죄를 굳이 뒤집어 씌운 것도 앤을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앤과 소위 "간통을 저지른" 남자들을 잡아들여 조사하고 재판을 진행하는 데는 한때 볼린 가문과 협력을 했으나 이제는 시모어 가문과 손을 잡은 토머스 크롬웰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결국 앤을 몰아내기로 결심하고 그 의지를 관철한 사람은 헨리 8세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앤이 아들을 낳을 수 없으므로 빨리 다른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가장 손쉽게 앤을 몰아내고 후환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그녀를 죽이는 것이었다.

앤이 정말 간통을 저질렀는지는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앤처럼 현명하다 못해 교활한 여자가 죽음을 자초할 일을 할 정도로 경솔했는가 라고 질문하는 학자도 있고, 아이가 생기지 않고 또 왕과 사이가 나빠졌으니 궁지에 몰려서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을까 하는 학자도 있다. 다만 앤은 처형이 확정된 상태에서도 끝까지 자신은 절대 왕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신을 걸고 맹세했는데, 앤이 불 같은 성격으로 왕을 유혹한 야심 많은 여성이라 해도 그 전에 대단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음은 분명하기에 앤이 누명을 썼다는 설에 더 무게가 실린다.

앤의 발목을 결정적으로 잡은 것은 앤이 매력적이었으며 많은 남자들과 시시덕거린다는 평판이었다. 당시 여성은 일단 정숙하고 순종적이어야 하지만, 한편으로 신분 높은 여성은 궁정연애의 원칙에 따라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궁정의 여러 남성과 밀고 당기며("flirting") 교류를 하는(물론 말로만 이렇게 하는 것으로, 육체관계를 맺어서 선을 넘어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모순적인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특히 왕비나 높은 신분의 여성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관습이었던 당시, 궁정 남성들은 왕비이자 궁정의 안주인인 앤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매혹되었다는 등의 아부를 했고 앤은 재치있게, 또는 이들을 희롱하는 듯한 태도로 응수했다. 이는 매우 일반적인 관습이었고 헨리가 앤을 사랑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앤은 이미 아내가 있는 남자인 왕을 사로잡았던 전력이 있었고, 앤의 매력과 적극성은 금방 남동생을 포함한 여섯 명의 남자와 잤다는 추문에 힘을 불어넣는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

결국 앤은 29세의 나이로 런던 탑 근처 광장에서 참수형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 헨리 8세는 처음에 앤을 마녀로 몰아 화형시키려 했으나 처형 직전에 그래도 한때 사랑한 여자에 대한 배려를 하고 싶었는지 빨리 죽을 수 있도록 참수형으로 처형 방식을 바꾸었고, 특별히 최고로 유능한 참수형 집행자를 프랑스 칼레에서까지 데려왔다. 원래 참수형은 도끼로 집행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날이 무딘 편인 도끼로 목을 자르기 위해서는 몇번이고 내려쳐야 하기 때문에 곱게 죽을 수가 없었다.[9] 하지만 칼레의 집행인은 검으로 한번에 깨끗하게 목을 벨 수 있었으니 그나마 편하게 갈 수 있었다. 런던 탑에서 앤은 처형 방식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웃으며 "내 목은 가늘어서 빨리 끝날테니 다행입니다."라는 농담을 남기기도 했다고. 어쩌면 그녀로선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저 순간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결혼 전 무려 7년 동안 천하의 호색한인 헨리 8세의 애정을 움켜쥐고 있느라 끊임없이 마음 졸여야 했으니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했을 것이고, 엘리자베스를 낳은 후 고작 2년 9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연달아 2~3번이나 5~6개월만에 유산했다 하니 육체적인 건강도 크게 상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가 왕비로 있던 시절에 그녀를 본 외국의 한 대사는 '늙고 추레한 여자'라고 혹평하기도 했다는 비화가 있다.

앤은 처형장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정당한 이유로 처형을 당하는 것이며, 헨리 8세는 성군이니 그에게 충성을 다 해 달라는 간단한 연설을 하고 예수에게 영혼을 맡긴다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참수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이나 태도는 매우 의연했다고 한다. 집행인은 짚더미 밑에 칼을 감추어 놓았는데, 일부러 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손을 내밀며 "칼을 건네줘!"라고 외쳤고, 그 말을 들은 앤은 무의식적으로 목을 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집행인은 칼을 들어 앤의 목을 내리쳐 단번에 잘라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앤 불린의 딸은 영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왕 중 하나인 엘리자베스 1세로 즉위했고, 그 후 앤 불린의 이미지는 '여섯 손가락의 마녀'에서 '여왕의 어머니이자 신교의 성인'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는 딱히 어머니를 복권시키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초상화와 자신의 초상화가 함께 담긴 카메오 반지를 가지고 있었고, 궁정 사람들은 알아서 여왕의 어머니를 칭송했다. 탐욕스러운 토머스 크롬웰이 수도원에 해체에 대해 독실한 앤 볼린과 대치하는 구도의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조선시대 장희빈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왕에 의해 왕비가 되었다가 왕에 의해 왕비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것, 딱 하나 낳은 자식이 왕이 되었으며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죽었다는 것, 남편의 명령에 의해 죽게 되었다는 것, 둘 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나 현대에 들어선 당대의 평가만큼이나 악한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알고보면 평가가 상당히 갈리는 것 등. 그리고 둘 다 아버지가 외교관(장희빈 아버지는 역관) 출신이고, 집안이 잘나가는 외교관-상인 가문이었다는 점도. 심지어 여배우들이 캐스팅되길 원할 정도로 인기있는 배역에 자주 영상화된다는 점도 닮았다.

결혼 후 처형까지의 약 3년 남짓 되는 시간으로 인해 후대는 그녀를 '천일의 앤Anne of Thousand Days'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쥬느비에브 브졸드 주연의 고전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참고로 영국인들은 그녀가 참수된 날에 너무도 맑았던 하늘로 인해서 슬픈 푸른색을 'Anne blue'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그녀가 처형된 날이면 그녀의 고향 히버Hever 성과 런던탑에서 자신의 잘린 목을 팔에 끼고 마차를 타고 달리는 그녀의 유령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런던탑에서는 심심찮게 자신의 목을 들고 다니는 앤의 유령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1차대전 당시 런던탑에서 간첩을 처형하기 직전에도 나타났다는 설이 있다.

그녀의 비극적인 인생을 다룬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탈리아의 작곡가 도니제티오페라 안나 볼레나(Anna Bolena)이다. 안나 볼레나는 앤 불린의 이탈리아어 표기이다.

영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일생을 산 왕비로서 오래 전부터 영국 사극 영화나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기 캐릭터다. 비교적 최근작으로는 리처드 버튼, 쥬느비에브 브졸드 주연의 <천일의 앤>, 에릭 바나, 나탈리 포트만,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천일의 스캔들>, 나탈리 도머가 열연한 SHOWTIME 미드 <튜더스>,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BBC의 사극으로 클레어 포이가 앤으로 등장하는 <울프홀> 등이 있다.

앤 볼린의 삶에 대한 책은 여럿이 있으나, 내용이 가장 충실한 전기는 에릭 아이브스Eric Ives의 "앤 볼린의 삶과 죽음 The Life and Death of Anne Boleyn"이다.

1.1 여러 일화

퍼코이(Pourquoi)라는 하바니즈 개가 있었다. Pourquoi는 프랑스어로 "왜?"라는 뜻인데(프랑스어 발음은 뿌르꾸아), 하바니즈 개가 마치 질문을 하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 앤 불린과 친해지고 싶었던 리슬 부인(Lady Lisle)이 선물했다. 리슬 부인은 그 후로도 앤에게 노래하는 꿩을 보내는 등 여러 노력을 했지만 왕비와 친구가 되지는 못했다(...) 아무튼 앤은 뽀꾸와를 무척 귀여워했지만, 1534년 12월 뽀꾸와는 "창문에서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녀들은 앤이 충격을 받을까 봐 헨리 8세에게 이 소식을 왕비에게 대신 전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앤을 싫어했던 신성로마제국 대사 샤푸이(차푸이스)는 매우 즐겁게 이 소식을 편지에 전했다. 그 때문에 샤푸이가 뽀꾸와를 암살(...)했다는 소문도 있는데, 신빙성은 없다.

우리안(Urian)이라는 그레이하운드도 길렀는데 앤이 행차를 하는 도중 우리안이 멋대로 뛰쳐나가 근처 소를 물어뜯어 죽인 사건이 벌어졌다. 왕과 왕비는 소의 주인에게 보상금을 지불했다.

헨리 8세가 앤에게 보낸 연애 편지는 남아 있으나 앤의 답장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없다.

앤의 시도서(the Book of Hours)에 앤의 친필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 최후의 심판에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삽화 밑에 "그 때가 올 것이다"라고 라틴어로 적었다. 그 다음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 삽화 옆에는 "희망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라는 문구를 적었다(왕비가 되려는 야심을 보여준다고도 해석하기도 한다). 다른 시도서에는 헨리 8세가 여백에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만큼이나 당신이 기도를 하며 내 사랑을 생각해 준다면, 나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토록, 헨리."라는 문구를 적었고, 그 밑에 앤이 답으로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상냥한 태도로 대한다는 증거를 매일 보실 수 있을 거에요"라고 적었다. 둘이 한창 연애를 할 때 적은 것일 듯.

1.2 앤과 캐서린에 대한 헨리 8세의 태도 비교

역설적이지만, 헨리 8세가 앤에게 실망했던 것은 이혼한 캐서린과 그녀를 비교하게 된 탓도 있었다. 캐서린은 젊었을 때 붉은 빛이 도는 금발에 하얗고 홍조를 띤 피부의 당시 전형적인 미인이었고, 헨리가 형의 미망인이었던 그녀와 결혼한 것도 애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여럿 남아 있다.

게다가 캐서린의 부모는 둘 다 각자의 나라를 다스리는 왕(캐서린의 어머니인 이사벨라 1세 항목 참고)이었고, 캐서린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궁정에서 어려서부터 받은 엄격한 교육 탓에 말 그대로 남편에게 철저히 순종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모양처였다. 그녀는 버림받은 상태에서도 단 한 번도 자신을 소박놓은 남편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병에 걸려 외로이 죽어가는 그날까지도 사랑하는 남편이 자신에게 돌아와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캐서린은 앤에 비해 여러 분야에 걸친 교양을 가지고 있었으며, 헨리보다 나이가 많았으므로 어린 남편을 감싸주는 원숙함도 갖추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답답한 어머니 때문에 속이 터진 메리가 한이 더 깊어졌다는 주장도 있는데 꽤 신빙성이 높다.

하지만 앤에게는 이런 장점들이 하나도 없었다. 헨리는 앤과 한창 연애를 할 때는 앤의 발랄하고 귀여우며 때로운 도발적인 속성에 매혹되어 정신을 못차렸으나, 앤의 저런 속성들은 그녀가 헨리와 결혼하여 왕비로 즉위한 뒤에는 왕비 자리에 적합하지 않게 나타났다. 전임자인 캐서린처럼 왕비로서 신료들, 외교관들과 원만히 지내며 교류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또한 헨리는 캐서린이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교양과 원숙함, 피로하면 기댈 수도 있는 든든함을 앤에게서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큰 오해였다.[10] 앤은 애초에 그렇게 키워지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정적으로 연애하던 시절에 헨리 자신을 앤에게만 목매게 만들었던 앤의 밀고 당기는 연애술이 결혼 후에는 바가지로 변하면서 헨리를 더 힘들게 했다.

결국 이런데서 비롯된 실망 탓에 앤에 대한 헨리의 사랑은 결혼 직후부터 급격하게 식어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캐서린에게 다시 돌아가지는 않았다. 이혼하기 위해 국교를 바꾸는 등 온갖 소동을 벌여 놓았으며, 캐서린이 나이가 들어 그에게 아들을 낳아줄 수 없는 몸이 된 것도 이혼을 결심한 큰 원인이 됐기 때문에 만일 재결합한다면 전 유럽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므로 돌아가는 것은 생각치도 않았을 것이다. 앤 이후 헨리는 젊은 여자들을 이리저리 섭렵하며 결혼만도 4번을 더 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은 하지 않고 잠자리만 몇 번 같이하거나 일회성으로 수청을 든 시침녀가 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헨리 8세는 아내보다는 공식적인 정부가 적은 예외적인 왕이다. 헨리의 호색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악명높은 여성편력과는 비교가 안 된다. 지속적인 관계를 가진 정부는 베시 블라운트, 메리 불린, 매지 쉘턴 단 셋이다. 정말 사랑하는 여자는 정부로 삼는 대신 가급적 결혼을 해 곁에 계속 두려는, 당시 왕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상당히 신실한 태도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낭만주의자였다는 평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어쩌면 정말 순수한 사랑을 찾아 헤매인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요즘에는 헨리 8세를 호색한으로 보지 않는 게 학계의 대세다.

그런데 세 정부 중 메리 불린은 앤 불린의 친언니이다. 그래서 헨리가 앤과의 결혼을 무효화할 때 메리와 먼저 관계를 가진 점을 근거로 들기도 했다. 참고로 메리 불린이 첫남편 윌리엄 캐리와 결혼생활을 할 때 낳은 딸 캐서린, 아들 헨리가 헨리 8세의 자녀라는 주장이 있지만 헨리 8세는 생전에 이들을 자신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 두 자녀가 메리가 헨리의 정부로 있을 때 태어난 점, 당시 헨리 캐리가 왕을 닮은 외모로 구설수에 오르내렸다는 점, 앤과 교제하게 되면서 앤의 지시로 메리와 관계를 정리한 헨리가 결국 앤과 결혼하게 된 점, 헨리의 명에 따라 헨리 캐리의 양육권이 잠시 앤에게 주어졌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정황상 인정하지 못했다고 보는 견해가 대세다. 또 매지 쉘턴은 앤 불린의 사촌이다. 뿐만 아니라 헨리의 5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는 앤 불린의 사촌(내외종자매)이었다. 의외로 헨리 8세와 앤의 인연은 질겼던 것일지도 모른다.

2 튜더스에서의 앤 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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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도머가 연기한 앤 불린. 시즌1, 2에 걸쳐 등장. 역사상처럼 검은 눈이 아니라 푸른 눈의 배우가 역을 맡았다.

사실상 튜더스의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역사 속의 앤 불린도 헨리 8세의 아내들 중 가장 유명한 여인이기도 했고.

아버지 토마스 불린 못지 않은 야심가로 연인 토마스 와이어트를 망설임없이 차버리고 헨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노력한다. 천진난만한 인상이지만 계산적이고 야망을 위해 거리낌없이 나아가는 성격이다. 헨리에게 순종적이기보다는 자신의 태도를 굽히지 않고 토마스 크롬웰과도 사사건건 충돌한다. 캐서린 왕비와, 캐서린이 죽은 뒤에도 앤에게 끝까지 굴하지 않는 메리 튜더를 위협으로 여기는데다 점차 자신 역시 캐서린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시달렸는지, 헨리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이 아닌지 사사건건 캐묻고 쫒아다녔는데 이것이 그녀에 대한 헨리의 애정이 식어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결혼하고 한 달 뒤에 모두가 예상한 아들이 아닌 딸 엘리자베스를 낳고 나서는 몹시 상심하지만 또다시 아이를 낳으면 된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이후 임신한 아이를 임신 초기에 유산하자 점점 신경질적이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렵사리 헨리의 애정을 붙잡아 셋째 아이를 가지지만 두번째 유산으로 이 아이마저 잃게 된다. 그런데 두번째 유산은 임신 초기에 헨리가 제인 시모어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앤이 극도로 분노하여 스트레스를 받은 탓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됐다. 안그래도 남편의 사랑을 잃고 있다는 불안감에 빠져 있었는데 그때 남편이 다른 여자랑 시시덕대고 있는 걸 눈앞에서 봤으니 흥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러니까 헨리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모든 잘못된 일을 죄다 남탓으로 돌리며 살아왔던 헨리는 당연히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산하여 몸져 누운 앤에게 "내 아들을 잃다니?!"라며 질책하면서 "하늘은 우리에게 아들을 주지 않으려는 듯하니 그대 몸이 회복되는대로 말을 해야겠다."며 뒤돌아섰다. 이에 더더욱 흥분한 앤은 "제 잘못이 아녜요. 당신 잘못이에요! 제 사랑은 늘 당신께 있었는데 당신은 제 앞에서 오입질을 하셨죠!"라며 바로 강하게 맞받아쳤다.불같은 성질만은 부창부수 그 와중에 동생인 조지 불린과 다른 이들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시녀들이 오해하고 그녀를 모함하는 이가 거짓 자백을 하는 등 상황은 꼬일대로 꼬여간다.

이때 헨리는 앤이 자신을 두고 바람을 폈다는 모함을 최측근인 찰스 브랜든 앞에서 언급하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그런 마음을 갖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연기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시즌 2 9화 참조)

결국 헨리에게 버려져 런던 탑에 갇힌다. 동생인 조지 불린이 참수를 당하는 장면을 창밖으로 목도하고 오열하는 모습은 애처러울 지경. 부친 토마스 불린은 모든 것을 잃고 목숨만을 건진 채 밖으로 나오지만 결국 그녀를 외면하고 떠나버린다. 끝내 희미한 희망조차 잃고 체념한 뒤 사형대에 올랐을 때 그녀가 죽을 때 울어준 남자는 다름아닌 옛 연인 토마스 와이어트[11], 헨리는 후련한 듯 미소를 짓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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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아들을 원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낳을 수 있었던 하나뿐인 딸인 엘리자베스에게는 애정을 아낌없이 쏟았고, 자신의 상황이 위태롭다는 것을 직감했을 때에는 딸의 안위를 무척이나 걱정했다. 그렇게 도도하던 그녀가 눈물짓던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도 딸 때문이었다. 최종 시즌인 시즌 4의 최종회에서는 헨리의 환각인지 아니면 정말 유령인지, 밤중에 헨리의 앞에 등장해서 "내게 죄가 없었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지 않았나요?"라며 총명한 엘리자베스를 좀 더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 말에 헨리가 괴로워하며 "하지만 그 아이는 당신이 내게 저지른 일을 생각나게 한다."고 하자 앤은 더 냉정하게 "난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았어요. 다만 당신에게 정말로 아들을 낳아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라고 항변한다. 또 엘리자베스를 "제 인생에서 가장 순수한 것이었죠."라고 지칭한다. 더 나아가 자신처럼 왕비가 됐다가 불행한 죽음을 맞은 캐서린 하워드의 일을 언급하며 "불쌍한 아이"이라고 지칭함으로써 헨리를 더 괴롭게 하고는 사라지는데 이때 짓는 차가운 미소는 참으로 섬뜩하다.

3 울프 홀에서의 앤 불린

BBC 드라마 울프 홀에서의 앤 불린. 1984년생 배우 클레어 포이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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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철저히 토머스 크롬웰의 시점에서 진행되다보니 상당히 차갑고 야심에 불타는 인물로 나온다. 지적이고 매력적인 여성이지만 한편으로 폭언에 가까울 정도로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등 한 성깔하고, 남편의 정부였던 언니 메리 불린이나 순진한 시녀 제인 시모어에게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못되게 굴기도. 그러나 때때로 자신이 휘말려 있는 권력 싸움에 대한 피곤함이나, 딸 엘리자베스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왕비로서의 절망이 뒤섞이는 시선이 언뜻 비치는 등 입체적인 인물. 결국 토머스 크롬웰의 적이 되지만 그가 존중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그녀의 최후는 튜더스에서 나탈리 도머가 연기한 모습과 해석이 약간 다르다. 비교하면서 보는 것도 재미. 나탈리 도머처럼 클레어 포이도 푸른 눈이다. 한마디만 하자면 울프홀의 처형 집행인이 훨씬 프로같이 능숙하게 처형했다.

프랑스물을 먹었다는 점을 반영한 점인지 프랑스어도 자주 쓰고 은근히 발음이 불어스럽다. 크롬웰을 부를 때 Cromwell이 아니라 Cremuel이라고 하는 식
  1. 유럽의 왕들은 동양의 왕들처럼 정식으로 혼인 관계가 인정되는 후궁을 둘 수 없었다. 법적인 부인으로 둔 왕비와는 보통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이며 그 후에 마음에 드는 여자들을 만나면 정부(情婦) 혹은 애인(愛人)으로 삼았는데 정부에 대한 총애가 지극할 경우 정부에게 귀족 부인의 작위를 내리곤 했다. 정부가 유부녀일 경우에는 그 남편의 작위를 높여서 더 작위를 높여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정부가 자녀를 낳는다 한들 왕자나 공주로 인정받을 수도 없고 왕위계승권도 당연히 없다. 이들은 사생아에 불과했기에 왕의 자식이 아니며 법적으로는 정부의 남편의 자식이었다. 정비가 적출 왕자를 낳지 못하면 가장 높은 품계의 후궁이 낳은 서출 왕자가 정비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동양의 왕실과는 극명히 대조되는 유럽 왕실만의 특징이다.
  2. 참고로 이 위키에는 결혼식에서 헨리 8세가 "천 일안에 아들을 낳지 않으면 널 죽이겠다!"라는 소리를 앤에게 했다는 설이 기록되었는데, 역사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당시 종교개혁을 감행하는 모험까지 감행하며 앤과 정식으로 결혼할 정도로 헨리 8세는 앤에게 푹 빠져 있었으며, 한창 연애할 때에는 대단히 낭만적이고 정열적인 것으로 유명했던 그가 새 신부에게 그렇게 차가운 말을 했을 가능성도 희박하기 때문이다.
  3. 앤의 손에 손가락처럼 보이는 혹이 하나 있었다는 설도 있으나 진위는 알 수 없다. 외모는 사람의 선악을 나타내며 기형이 악의 상징이라고 여겨지던 시대에 그렇게 눈에 띄는 흠이 있었다면 왕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는 반대 의견도 있다.
  4. 미드 튜더스에서는 이를 반영해 메리는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의 시녀가 되는 굴욕을 겪으면서도 엘리자베스가 혼자 울고 있을 때 직접 안아 달래 주는 등 잘 돌봐 주었고, 나중에 엘리자베스가 어느 정도 자란 후에도 잘 지내는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5. 조카 앤 볼린을 통해 세력을 강화했던 그는 다른 조카인 캐서린 하워드를 또 왕비감으로 밀게 된다. 그는 사태가 나빠지자 앤 볼린을 버렸듯 캐서린도 버리고 외면했다.
  6. 여담이지만 필리파 그레고리가 집필한 '천일의 스캔들' 원작소설에서는 앤이 가장 마지막에 사산한 아이가 기형아로 태어난 것이 앤이 마녀로 몰리는 데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고 한다. 튜더스에서도 헨리 8세가 "사산한 아이는 기형아였으니 내 아이일 리 없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앤이 기형아를 낳았다는 설은 후대에 신교도와 앤의 딸인 엘리자베스 여왕을 싫어했던 반대파가 쓴 프로파간다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정말로 기형아를 낳았더라면 당시 궁정 기록이나 앤의 재판 기록에 전혀 언급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필리파 그레고리는 자신이 사학 전공이었으므로 역사를 정확하게 서술한다고 주장하지만 많은 면에서 부정확하고 재미를 위해 악의 넘치는 소문을 그대로 갖다 쓰는 등 악명이 높다.
  7. 불린 가문의 3남매의 나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다. 게다가 영어로는 형제자매끼리 sister, brother라고 부르기 때문에 누가 나이가 많은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메리-앤-조지의 순서였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8. 영화 <천일의 스캔들>에서는 사산을 하는 바람에 극도의 절박감을 느낀 앤이 동생 조지를 침실로 끌어들이기까지는 하지만 둘 다 죄책감을 느껴 실행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앤을 감시하기 위해 몰래 따라다니던 시녀가 둘이 침실로 들어가는 것까지만 목격하고는 그것을 헨리 8세에게 밀고하고, 앤은 다음날 사산 사실을 고백하러 헨리 8세에게 가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9. 실제로 도끼로 참수당한 토머스 크롬웰, 메리 스튜어트는 한 번에 목이 잘리지 않아서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아야 했다. 여담이지만 크롬웰의 경우는 헨리 8세가 보복 차원에서 일부러 서투른 집행인을 썼다는 비화가 있다.
  10. 그나마 이런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은 헨리 8세가 말년에 마지막으로 들인 왕비 캐서린 파뿐이었다. 이름도 둘 다 캐서린
  11. 와이어트도 앤과 간통혐의를 받았지만 그의 상관인 토마스 크롬웰이 손을 쓴것인지 무사히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