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헤이안 시대의 황후이자 막후 권력자. 그리고 스토쿠 상황의 최대 원쑤.
1 출생과 중궁이 되기까지
1117년 후지와라노 나가자네의 딸로 태어났다. 워낙 예뻤던지 나가자네는 도쿠시를 매우 예뻐했다고 한다. 그래서 도쿠시는 평범한 남자에겐 시집보내지 않겠다라고 했을 정도였다고.그래서 평범하지 않은 덴노에게 시집
나가자네는 그의 어머니가 시라카와 법황의 유모였던 것으로 인해서 시라카와 법황기에 꽤 출세한 인물이었다. 나가자네가 사망한 후에는 한동안 있다가 토바 상황의 눈에 들게 되었고 마침내는 토바 상황의 제2 중궁이 되어 나리히토 친왕을 덜컥 낳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토바 상황의 첫 중궁이었던 후지와라노 타마코가 시라카와 법황과 불미스런 관계에 있어 토바 상황이 타마코를 미워했는데 시라카와 법황이 세상을 떠나자 타마코와 스토쿠 덴노의 입지는 매우 좁아지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고노에 덴노의 즉위 직후 황궁에서 도쿠시를 저주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의 배후가 타마코라는 소문이 돌면서 결국 그녀는 권세를 잃고 출가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틈을 타서 도쿠시가 사실상 막후의 권력을 쥐게된다. 일부에선 이 저주사건의 배후가 타마코라는 소문과 스토쿠 덴노가 토바 법황의 아들이 아닌 시라카와 법황의 아들이라는 소문의 배후를 그녀로 추측하고 있다. 사실 후일의 행보를 보면 그러고도 남을것 같지만.
2 스토쿠 상황을 밀어내다
타마코를 밀어내고 중궁이 되어 사실상 토바 법황을 휘어잡은 그녀는 틈만 나면 토바와 스토쿠 부자 사이를 갈라놓는데 힘썼다. 그녀 덕분에 스토쿠는 토바에게 아들 취급도 받지 못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물론 스토쿠도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도쿠시와 정치적 타협을 해 자신의 맏아들 시게히토를 도쿠시의 양아들로 삼게 했다. 시게히토 친왕의 친모가 중궁이 아닌 후궁이었던지라 차후 덴노위를 계승해도 정통성에 문제가 있을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한편으로 그녀도 미래에 보험을 들어둔다는 생각으로 시게히토를 양자로 들인듯 하다.
시게히토를 양자로 삼으면서 그녀와 스토쿠 상황 사이의 관계가 개선되나 싶었으나... 1155년 고노에 덴노가 급서하면서 후계 구도를 놓고 논란이 일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고노에 덴노가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덴노 계승에 가장 정통성이 있는 쪽은 스토쿠 상황의 맏아들인 시게히토 친왕이었다. 그러나 도쿠시는 시게히토가 덴노위를 계승하게 되면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차에 도쿠시에게 접근한 이가 마사히토 친왕의 유부 신제이였다. 신제이는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마사히토 친왕을 덴노로 세우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고 둘은 결국 결탁해 시게히토의 황위 계승을 막기로 결심한다. 여기에 스토쿠 상황의 장인이었지만 중궁대신 후궁을 총애하고 후궁 소생인 시게히토를 덴노위에 올리려는데 불만을 품은 후지와라노 타다미치까지 끌어들였다.
이들은 고노에 덴노가 죽은 이유는 스토쿠 상황이 저주의 주술을 건 탓이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 소문을 들은 토바 법황은 격노해 시게히토의 덴노 계승을 취소하고 마사히토의 아들 모리히토에게 덴노위를 계승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조정 중신들은 친아버지가 버젓이 살아있고 아직 모리히토의 나이가 어리니 모리히토가 장성할때까지 징검다리로 마사히토가 덴노가 되는게 낫겠다라고 주장해 결국 마사히토가 덴노를 계승하게 된다. 그가 바로 고시라카와 덴노다. 문제는 마사히토는 토바 법황의 친아들이긴 했으나 황태자 책봉도 안받은 황족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토바 법황은 스토쿠 상황에 대한 분노에 파행적인 조치를 단행했던것. 이로서 도쿠시는 자신의 뜻대로 권세를 유지하게 되었다.
1156년, 토바 법황이 병사하자 도쿠시와 신제이, 타다미치는 완벽하게 후환을 없애기 위해 스토쿠 상황 일파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이들은 스토쿠 상황과 상황의 측근인 후지와라노 요리나가가 모반을 꾸민다고 모함했고 격노한 고시라카와 덴노는 요리나가의 영지에서 모병을 금지하는 칙서를 내렸다. 궁지에 몰린 요리나가는 반격에 나섰으나 병력의 열세로 결국 패배하고 만다.(호겐의 난) 스토쿠 상황은 사누키로 유배되었다. 완벽한 도쿠시의 승리였다.
3 사망까지
호겐의 난 진압후 고시라카와 덴노의 위상은 공고해진것으로 보였으나 실상 고시라카와는 실권이 없었고 실권은 신제이와 도쿠시에게 있었다. 도쿠시는 토바 법황이사망했기 때문에 출가하여 비후쿠몬인이란 칭호를 얻었으나, 더한 권세를 누리기 위해 황태자 모리히토 친왕의 덴노 등극을 염원했다. 결국 1158년 3월, 소위 부처와 부처의 타협이란 평가를 받으며 고시라카와 덴노는 결국 황태자 모리히토에게 양위할수밖에 없었다. 그가 바로 니죠 덴노다. 원래대로라면 고시라카와가 인세이를행해야 했으나 실권은 신제이에게 있었고 니죠 덴노도 친정에 의욕을 보인 탓에 고시라카와는 니죠 덴노와 연정을 하는 형태로 국사에 참여할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정은 니죠 덴노를 지지하는 친정파, 고시라카와 덴노를 지지하는 인세이파로 나뉘었고 인세이파는 실권자인 신제이의 주류파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의 비주류파로 갈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되려 과거같은 권세는 누리지 못하고 비구니로서 지내다가 1159년 일어난 헤이지의 난의 평정을 지켜본후 1160년 4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녀는 죽은 후에도 논란을 일으켰는데 여인이 묻힐수 없는 고야산에 묻힌탓에 도쿠시의 권세빨이라는 비난이 일기도 했다.
4 평가
권력욕으로 나라를 뒤흔든 여성이라 평가할수 있다. 사실상 권력욕때문에 스토쿠 상황과 후지와라노 타마코를 밀어냈으며 덴노의 등극과 퇴위까지도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후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이런 탓에 일본삼대악귀의 하나인 타마모노마에가 그녀를 모델로 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타마모노마에가 하는 행보를 보면 도쿠시와 빼다박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덴노가와 조정의 정권 다툼의 배후에 그녀가 있다는 세간의 인식이 타마모노마에로 반영되었다고 볼수 있을듯.
토바 법황은 자신의 개인영지를 대부분 그녀에게 상속시켰는데 그녀는 물려받은 영지들을 모두 자신의 딸 하치죠인에게 물려주었다. 하치죠인이 물려받은 영지는 하치죠인령으로 불리며 가마쿠라 시대에 황실의 수입원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