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대 덴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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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노에 덴노 | 고시라카와 덴노 | 니죠 덴노 |
왕호 | 고시라카와 덴노(後白河天皇) | |
이름 | 마사히토(雅仁) | |
생몰년도 | 1127년 10월 18일 ~ 1192년 4월 26일(65년) | |
출생지 | 일본 교토 | |
사망지 | 일본 교토 로쿠죠도노 | |
재위기간 | 덴노 | 1155년 8월 23일 ~ 1158년 9월 5일(3년) |
태상황 | 1158년 9월 6일 ~ 1179년 11월 20일(21년) |
목차
1 개요
일본의 제77대 덴노. 파란만장한 인생과 시대를 산 덴노이다. 묘하게 한국사의 흥선대원군과 비슷한 측면도 있다. 시호인 고시라카와(後白河天皇)에서 알수있듯이 인세이의 절정을 이룬 시라카와 법황 못지않은 권력을 누려보았던 덴노이기도 하다.
2 덴노 즉위 이전
1127년 토바 상황과 그의 중궁인 후지와라노 타마코[1]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즉, 토바 상황의 친아들이란 이야기. 여담이지만 토바 상황과 타마코 사이에는 이례적으로 덴노와 중궁 사이에서 네명의 아들이 태어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태어난지 두달여 뒤에 친왕으로 봉해지고 마사히토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친왕이긴 했으나 덴노 계승권과는 먼탓인지 마사히토 친왕은 어릴때부터 그냥 놀자판 인생을 살았다. 특히 오늘날로 치면 대중가요와 비슷하다 할수 있는 이마요란 노래 부르기에 푹빠져 지냈다. 후에 자신이 직접 언급하기론 10살부터 이마요를 매일 연습했다고.아이돌 데뷔라도 준비하셨수? 낮이고 밤이고 노래부르기에 열중해서 목에 무리가 가기까지 했다고 한다. 진짜 가수데뷔 준비하셨나보다 심지어는 토바 상황의 거처에서 머무르면서도 이마요를 매일 불러제낀 나머지 토바 상황은 혀를 끌끌 차면서 저놈은 덴노가 될것 같진 않구먼 했다는 기록까지 전할 정도.
이런 가운데 미나모토노 아리히토의 양녀 요시코와 결혼했는데 요시코와의 사이에선 후일 니조 덴노가 되는 맏아들 모리히토 친왕이 태어났으나 요시코는 모리히토 친왕을 낳은뒤 산후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이후 후지와라노 스에나리의 딸 나리코와 재혼해 2남 4녀를 낳았으나 마사히토 친왕은 별로 나리코를 총애하지 않았다고 한다.총애하지 않으면서 애들은 잘 낳으셨네?
3 파행적인 덴노 즉위
이렇게 놀자판과 노래 부르기에 열중하고만 있던 마사히토 친왕에게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시작은 바로 고노에 덴노의 급서였다. 병약했던 고노에 덴노는 1155년 마침내 사망했는데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덴노위를 누가 계승할지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본래라면 스토쿠 상황의 아들 시게히토 친왕이 덴노위 계승 1순위여야 마땅했다. 시게히토 친왕은 후지와라노 토쿠시의 양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봐도 시게히토 친왕의 등극이 유력해보였으나 후지와라노 도쿠시[2]는 시게히토 친왕이 즉위하면 스토쿠 상황이 친부이므로 인세이를 행하게 될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것을 염려한 나머지 파행적인 사태를 일으키기에 이른다. 토쿠시는 마사히토 친왕의 유부인 신제이와 작당하여 스토쿠 상황이 고노에 덴노에게 저주의 주술을 걸어 죽게 만들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를 들은 토바 상황은 격노했고 시게히토 대신 마사히토의 아들이자 토쿠시의 양자였던 모리히토를 후계자로 결정하려 했다.
그러나 조정의 중신들은 친아버지가 엄연히 살아계시고 아직 나이도 어린데요?라고 반대했고 결국 모리히토가 장성할때까지의 징검다리로 마사히토를 덜컥 덴노위에 앉혀버렸다. 마사히토는 황태자로 책봉된적도 없는 황족에 불과해 덴노위 계승의 원칙에 어긋나는 파행적인 행태였으나 스토쿠 상황에게 권력을 절대 못주겠다는 토바 상황과 토쿠시 일당의 행태로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진것. 얼마나 이 계승이 파행적이었는지는 마사히토가 덴노로 즉위하기도 전에 먼저 모리히토의 황태자 책봉식이 거행되는 사태만을 보더라도 알수 있다.[3] 어쨌든 이렇게 해서 즉위한 마사히토가 바로 고시라카와 덴노이다.
결국 이런 파행은 호겐의 난이라는 내란을 부르기에 이른다. 토쿠시와 신제이는 토바 상황이 붕어하자 거슬리던 스토쿠 상황을 제거하기로 하고 압박을 가하자 결국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를 필두로한 스토쿠 상황파들이 반격에 나섰던것. 그러나 병력의 열세로 스토쿠 상황파들은 고시라카와 덴노파들에게 밀려 패배하고 만다. 실상 호겐의 난 과정에서 고시라카와가 한 일은 별로 없고 대부분의 실권은 토쿠시와 신제이에게 있었다.
4 상황과 덴노의 갈등, 헤이지의 난
호겐의 난 진압후 실권은 신제이에게 급속히 쏠렸다. 신제이는 소위 "호겐신법"의 시행을 통해 장원을 정리하고 거대 장원들을 정리하고 사찰들의 세력을 꺾는데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고시라카와는 그저 허수아비 신세에 불과했다.
1158년, 고시라카와는 아들 모리히토에게 양위하여 상황이 되었다. 이는 고시라카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토바 상황 사망후 비구니로 출가한 비후쿠몬인(도쿠시,나리코)의 뜻과 고시라카와의 유부였던 신제이의 뜻이었다. [4] 이런탓에 통상적으론 고시라카와가 인세이를 행하는게 일반적이었겠으나 니조 덴노가 친정에 강한 의욕을 보였고 신제이가 실권을 쥐고 있던 탓에 고시라카와가 실권을 휘두를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직 젊은 고시라카와는 허수아비 상황으로만 남을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조정은 고시라카와를 지지하는 인세이파와 니조 덴노를 지지하는 친정파로 나뉘게 된다. 게다가 인세이파 내에서도 분화가 일어나 실권자 신제이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 파벌과 후지와라노 노부요리를 중심으로 하는 비주류 파벌로 또 갈렸다.
일련의 갈등은 결국 폭발해 1159년, 헤이지의 난이 일어나기에 이른다. 헤이지의 난은 신제이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의 갈등으로 인해 일어났다는 시각과 고시라카와가 인세이를 행하기 위해 니조 덴노를 공격한것이라는 시각이 존재하는데 어쨌든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에 의해서 신제이가 살해되었으나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친정파의 편을 들면서 노부요리가 죽게 된다. 결국 신제이와 노부요리라는 중요 정치인들이 제거된데다 대부분의 인세이파들은 실각하여 고시라카와는 정권에서 멀어지게 된다.[5] 그러나 고시라카와도 친정파의 주요 인사들을 신제이 살해의 명목으로 체포하도록 지시해 이들이 제거되면서 일단 인세이파와 친정파는 유력 정치인들이 제거되기에 이른다.
고시라카와 상황은 권력에서 멀어져서 불교에 심취했다. 타이라 가문의 후원을 받아 관음당을 건설하기도 했으며 니조 덴노를 관음당 완공식에 초청했으나 니조 덴노가 씹어버리자 매우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5 니조 덴노의 급사, 권력쟁취 성공
그렇게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는것 처럼 보였던 고시라카와였으나 친정파와 손 잡았던 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주목해 키요모리와의 연대를 추진하여 권좌복귀를 노리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키요모리의 처제인 타이라노 시게코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정략결혼이긴 했으나 고시라카와는 시게코를 총애했고 시게코는 결국 덜컥 아들을 낳기에 이르는데 그 아들이 바로 고시라카와의 일곱번째 아들 노리히토 친왕이었다. 노리히토의 탄생은 니조 덴노에게는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왔고 노리히토가 태어난지 불과 열흘도 안되어서 노리히토를 황태자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인세이파의 일원들이 삭탈관직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때 삭탈관직 된 자들은 시게코의 오라버니인 타이라노 토키타다, 키요모리의 친동생인 타이라노 노리모리, 키요모리의 둘째 아들인 타이라노 모토나리등이었다.
1165년, 니조 덴노의 병환이 악화되어 결국 황태자인 노부히토 친왕에게 양위한후 사망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즉위한 덴노가 바로 로쿠죠 덴노이다. 하지만 로쿠죠 덴노는 친어머니가 미천한 신분이었던지라 니조 덴노의 중궁 무네코가 양어머니가 되었고 셋쇼 후지와라노 모토자네가 뒤를 받치는 식으로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들은 고시라카와 상황을 상대할 정도의 정치력은 없어서 점점 권력은 고시라카와 상황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이를 기회로 고시라카와는 노리히토를 친왕으로 봉해 권력쟁취의 기반을 닦는다. 인세이는 덴노의 친아버지가 행할수 있다는 원칙이 있는지라 당연한 행보였다. 게다가 로쿠죠 덴노를 지탱하던 셋쇼 모토자네가 1166년에 사망하면서 모토자네의 뒤를 이을 적자 모토미치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 대신 후지와라노 모토후사가 새로운 셋쇼로 임명되었다. 그 대신 모토자네의 미망인인 모리코가 셋칸케의 대부분 영지를 상속받게 되었는데 모리코는 키요모리의 딸로 사실상 일련의 일들 뒤엔 고시라카와와 키요모리의 타협과 묵인이 있었던 셈이었다. 이로 인해 셋칸케와 헤이케가 친정파에서 인세이파로 돌아서게 되었고 친정파는 붕괴하기에 이른다.
이제 거칠것이 없어진 고시라카와는 키요모리의 협력을 받아 마침내 노리히토를 황태자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명분은 로쿠죠 덴노에게 후사가 없다는것이 이유였으나 사실상 고시라카와가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 키요모리의 권력도 점점 강화되어 키요모리의 아들 시게모리에게 군권을 쥐어주었다. 심지어 키요모리에게 병이 걸리자 고시라카와는 키요모리의 쾌유를 위해서 대사면령을 내릴 정도였다.[6]
결국 1168년, 고시라카와 상황은 로쿠죠 덴노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결국 노리히토 친왕이 덴노위에 등극하기에 이르니 그가 바로 다카쿠라 덴노였다. 다카쿠라 덴노의 즉위이후 시게코를 겐슌몬인으로 봉하고 자신은 출가하여 법황이 되었다.
6 키요모리와의 협력과 갈등
그러나 애당초 고시라카와의 인세이를 뒷받침 하는 세력들은 서로간에 연계가 없이 그저 고시라카와의 권력만을 보고 뭉친 세력들이라 서로간에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얼마든지 갈등이 드러날 처지였다. 이런 약점을 드러낸 사건이 바로 1169년 엔라쿠지가 후지와라노 노리치카의 유배를 외치며 강소를 일으킨데서 시작되었다. 고시라카와는 노리치카를 옹호했으나 키요모리를 비롯한 헤이지들은 엔라쿠지와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서로간의 이견이 노출된것. 이 사태는 겨우 이듬해 2월에서야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셋칸케와 헤이지 사이의 갈등이 새롭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후지와라노 모토후사는 셋칸케의 영지 대부분을 키요모리의 딸 모리코가 상속받은것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상황에서 시게모리의 휘하 무사들이 모토후사가 입궁하는 와중에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진것. 사건은 고시라카와와 키요모리 사이의 타협으로 마무리되고 모토후사에게는 보상 차원에서 태정대신의 직책이 수여되었다.
시게코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고시라카와와 키요모리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협력을 유지했다. 양측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다카쿠라 덴노와 키요모리의 딸 도쿠코의 혼인이 성사되었고 키요모리는 송나라와의 무역에서 얻은 이익을 고시라카와에게 일부 바치면서 연대를 공고히 했으며 고시라카와 또한 사찰 세력을 제어하면서 키요모리의 이익을 지켜주는 식으로 양측간에 협력은 지속되었다. 1172년에는 고시라카와가 시게코와 함께 키요모리가 공을 들여 만든 이츠쿠시마 신사에 참배했으며 1175년에는 고시라카와의 50세 생일을 기념하는 거창한 축하연이 열렸는데 헤이지가 이 축하연에 여러모로 위상을 높여주는 행보를 보여 고시라카와의 권위를 높이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게코가 축하연 이후 갑자기 사망했으며, 때를 같이해 로쿠죠 상황, 다카마츠인, 쿠죠인등이 잇달아 사망해 정국은 혼란해지기 시작했다.[7] 이후 고시라카와와 헤이지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겪기 시작했다. 고시라카와의 9번째 아들인 도호 법친왕과 10번째 아들은 쇼닌 법친왕이 다카쿠라 덴노의 양아들이 되었는데 이는 고시라카와의 다카쿠라 덴노 폐위 공작이었으나 도쿠코가 아들을 낳지도 않은 상황에서 다카쿠라 덴노를 퇴위시키고 고시라카와의 아들을 다시 덴노로 세우려는 행보를 키요모리는 용납하지 못했다. 결국 양측은 대결국면으로 들어가기에 이른다.
고시라카와가 자신의 측근들을 중요 요직에 배치했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 셋칸케중 쿠게를 배출하지 못한 가계에서 쿠게가 나오면서 키요모리의 심기를 건드렸다. 키요모리는 이에 맞서 아들들인 시게모리와 무네노리를 다이쇼에 임명해 맞섰다.
여기에 기름을 끼얹은것은 바로 엔라쿠지였다. 엔라쿠지는 고시라카와의 사찰세력 억제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후지와라노 모로츠네가 엔라쿠지의 말사를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사소한 분쟁이었던 이 사건은 엔라쿠지와 후지와라노 모로타카의 아버지이자 고시라카와의 측근인 사이쿄와의 갈등으로 커지면서 엔라쿠지와 고시라카와 상황의 측근들간의 분쟁으로 격화되었다. 고시라카와는 일단 사건의 발단이 된 모로츠네를 유배보내는 것으로 일단락 지으려 했으나, 엔라쿠지는 모로타카도 유배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고시라카와를 압박하기 위해 신여를 들고 고시라카와의 처소로 향했다. 이런 시위를 고시라카와는 자신에 대한 모반으로 간주하여 시게모리에게 엔라쿠지 승병들을 해산시키도록 지시했으나 시게모리의 휘하 병사들이 실수로 신여에 활을 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문에 정국은 급격히 고시라카와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고시라카와와 다카쿠라는 엔라쿠지 승병들의 반란을 걱정해 피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선택지가 없어진 고시라카와는 엔라쿠지가 요구한대로 후지와라노 모로타카를 오와리로 유배보내고 신여에 활을 쏜 시게모리의 가신들을 하옥하는 조치로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그러는 와중, 1177년 4월 28일, 교토에서 대화재가 발생한다.(간겐의 대화재) 교토의 대부분이 소실된 이사건을 고시라카와는 정략적으로 이용하기로 하고 천태좌주(천태종의 수장)인 묘운을 전격 체포하고 좌주직에서 해임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엔라쿠지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간겐의 대화재로 수세를 공세로 전환하려는 고시라카와의 술책이었다. 묘운의 체포와 해임에 엔라쿠지가 반란을 일으킬것이란 소문이 횡행하던 가운데 엔라쿠지의 고위 승려들이 천태좌주가 유배된 전례가 없다면서 고시라카와에게 사면을 압박했으나 끝내 고시라카와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5월 23일, 묘운은 이즈로 유배를 떠났으나 중간에 엔라쿠지의 승병들이 유배행렬을 습격해 묘운을 구출해가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했다. 엔라쿠지의 이런 행보는 사실상 고시라카와와 정면대결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고시라카와 드루와 드루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고시라카와는 엔라쿠지를 무력으로 쓸어버리려 했으나 키요모리의 두 아들인 시게모리와 무네노리가 아버지의 명령없이는 출동할수 없다면서 군을 움직이는걸 거부해버렸다. 고시라카와는 직접 후쿠하라까지 찾아가 키요모리에게 엔라쿠지 공격 약속을 받아냈으나 키요모리는 여전히 껄끄러워 하던 상황이었다.
7 시시가타니 음모와 고시라카와의 추락
키요모리의 이런 행보는 고시라카와와 측근들을 격분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키요모리의 독재에 불만을 품던 자들이 늘어나던 차에 이들은 호쇼지의 슈고 타카히로 법사의 별장이 있던 시시가타니에 모여서 헤이케 타도를 은밀히 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177년 5월 29일, 이 모임에 고시라카와 법황이 직접 참석하면서 사태는 급진행된다. 이들은 북면무사 타다 유키츠나를 끌어들여서 키요모리를 타도하려 하였다. 그러나 제안을 받은 타다 유키츠나는 계획이 성사될지 자신이 없었고 자칫 가만히 있다가 키요모리에 의해서 타도 당할까 걱정한 나머지 키요모리에게 달려가 헤이케 타도 음모를 고변하기에 이른다(!)
격노한 키요모리는 즉시 고시라카와의 측근들을 모조리 체포한다. 음모를 주도한 후지와라노 나리치카는 유배되었고 사이쿄는 처형되었으며 후지와라노 모로타카는 키요모리의 가신들에 의해 살해되는등 고시라카와의 측근들이 제거되고 말았다. 헤이케모노가타리에 의하면 시시가타니 음모에 격분한 키요모리가 고시라카와까지 체포해서 죽이거나 유배보내려 했지만 시게모리가 막아서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하나 실제로는 고시라카와는 은근슬쩍 측근들만 희생해서 목숨만은 건졌고 키요모리도 고시라카와까지 제거하는 무리수는 두지 않으려 했던걸로 보인다.
일련의 사태들로 정국이 혼란하자 이런 혼란의 이유가 스토쿠 상황과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등 호겐의 난때 죽은 원혼들의 원한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고시라카와는 죄인으로 죽은 스토쿠의 신원을 회복하고 상황으로 추숭하는 한편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에겐 태정대신직을 추서하는등 호겐의 난때 죽은 스토쿠 상황파들을 신원했다. 아마도 고시라카와 본인도 키요모리에게 된통 데여서 스토쿠의 심정이 이해가 갔던 모양(...)
이와는 별개로 고시라카와의 정치적 위상은 갈수록 추락하고 있었다. 키요모리는 시시가타니 음모 이후 더욱 헤이케 독재를 강화해 나갔고 고시라카와의 권력 강화책으로 추진되던 다카쿠라 덴노 폐위 공작이나 엔라쿠지 공격 모두 키요모리에 의해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게다가 일련의 사태로 기세가 오른 엔라쿠지는 고시라카와가 하는 일마다 딴지를 걸고 나섰다.
1178년, 고시라카와는 온죠지에서 전법관정을 받으려 했다. 전법관정은 밀교에서 가르침을 다 받은 이가 스승의 자격을 얻는 의식으로 이 의식을 치루면 고시라카와의 불교계 권력은 더 강화될 터였다. 그러나 엔라쿠지는 이를 두고보지 않았는데 전법관정을 온죠지에서 치루게 되면 고시라카와가 그 댓가로 온죠지에 가이단(계단)을 만들어줄것이라 생각한것. 가이단이 설치되면 온죠지의 위상이 높아지기 때문에 엔라쿠지는 말사의 승병들을 동원해 온죠지를 포위하고 태워버리겠다고 협박하기에 이른다. 고시라카와는 엔라쿠지를 꾸짖는 한편 키요모리를 불렀으나 키요모리는 이를 씹어버렸고(...) 결국 고시라카와는 전법관정을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복으로 고시라카와는 5월의 최승강 법회에 엔라쿠지 승려들의 공청을 정지시켜버렸다. 양측의 갈등은 깊어졌고 다카쿠라 덴노가 중간에서 중재해보려 애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던 키요모리는 결국 고시라카와가 문제의 근원이라 여기고 고시라카와의 정계 은퇴만이 문제의 해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설상가상으로, 다카쿠라 덴노의 중궁인 도쿠코가 임신을 했다. 일단 고시라카와는 키요모리와의 앙금을 잊고 도쿠코의 순산을 기원했고 마침내 도쿠코는 아들을 낳게 된다.(후일의 안토쿠 덴노) 그러나 키요모리는 철저하게 고시라카와의 황태자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고 헤이케 일족들이 황태자를 둘러싸면서 고시라카와의 분노는 다시금 폭발했다.
8 인을 폐하다
1178년 6월 17일, 관백 모토자네의 미망인이자 키요모리의 딸인 모리코가 사망했다. 당초 셋칸케의 영지들을 대부분 모리코가 상속받은것은 어린 모토자네의 적장자 모토미치가 장성할때까지의 임시조치였으나 문제는 모리코가 너무 빨리 사망했다는것. 아직 모토자네가 관백이 되기엔 어린 상황인지라 외손자를 통해 셋칸케까지 장악하려던 키요모리의 구상이 틀어지고 말았다. 당장 셋칸케의 다른 계통들이 들고 일어날 판이었던것. 상황이 이리되자 키요모리는 모리코가 관리하던 셋칸케의 영지를 다카쿠라 덴노에게 상속시킨다라는 무리수를 작렬시켰다. 모리코가 다카쿠라 덴노를 양아들로 삼았기 때문에 명분은 있었으나 문제는 엄연히 셋칸케의 씨장자인 마츠도노 모토후사가 있는 상황이었으니 불만이 안생길수가 없었던것.
모토후사는 당장 고시라카와에게 달려가 억울함을 호소했고 고시라카와는 이문제에 개입했는데 덴노가의 가장이 자신이므로 다카쿠라 덴노가 모리코의 영지를 상속받더라도 가장의 권리로 다시 자신이 관리할수 있다는 논리를 앞세워(...) 자신의 측근인 후지와라노 카네모리를 영지 관리인으로 임명해 모리코의 영지를 자신의 관할하에 두었다. 키요모리는 부글부글 끓었으나 덴노가의 가장이 고시라카와이므로 어쩔수 없이 일단은 두고볼수밖에 없었다.
한편, 키요모리의 장남인 시게모리가 이때 병에 걸려있던 차라 고시라카와는 시게모리를 병문안했다. 시게모리는 고시라카와와 친한편이었고 시게코의 사후에 나름 고시라카와와 키요모리 사이를 중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시게모리는 사망했고, 시게모리의 죽음은 고시라카와와 키요모리 사이에 마지막 남은 안전핀마저 뽑혔다는것을 의미했다.
이런 와중에 고시라카와는 시게모리의 영지를 빼앗아서 자신의 휘하에 두고 키요모리가 지원하던 고노에 모토미치 대신 마츠도노 모토후사의 불과 8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인 마츠도노 모로이에를 곤노주나곤에 임명해버렸다. 이는 모토후사의 아들 모로이에가 셋칸케의 씨장자를 계승할것이란걸 의미했다. 그러나 이는 시게모리를 잃고 상심에 빠져있던 키요모리를 대폭발시키키는 역효과만 나았다. 고시라카와 입장에선 시게모리를 잃고 상심해있는 키요모리의 틈을 파고든다는 생각이었을지 모르나 조정에선 이를 고시라카와의 과욕이라 비난하는 여론이 나왔고 심지어는 셋칸케안에서도 그런 비판이 나왔을 정도였다. 여기에 고시라카와가 헤이케를 토벌하려 한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결국 참지 못한 키요모리는 11월 14일,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다.(지쇼 3년의 쿠데타) 모토후사와 모로이에는 파면되었는데 이는 다카쿠라 덴노의 칙서로 이루어졌다. 놀란 고시라카와는 측근을 보내 키요모리에게 사과하여 사태를 무마해보려 했으나 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를 체포해 토바도노에 유폐시켜버렸고 사실상 인이 폐해졌다. 고시라카와는 이제 연금되어 꼼짝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9 키요모리 독재와 사망까지
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의 영지를 모조리 몰수하고 다카쿠라 덴노의 양위를 성사시켜 황태자 고토히토 친왕이 등극하여 안토쿠 덴노가 된다. 키요모리는 덴노의 외조부가 되어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고시라카와는 키요모리의 명령으로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측근 두세명만 오갈수 있을 정도로 혹독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런 키요모리의 독재에 불만을 품은 고시라카와의 둘째아들 모리히토 친왕이 헤이케 타도를 외치며 거병했으나 금방 진압당했다. 모리히토 친왕의 거병 배후에는 도쿠시의 딸 하치죠인이 있었다. 고시라카와도 개입되어 있었으나 또 다시 은근하게 빠져나갔다. 모리히토 친왕의 거병등으로 반 헤이케 세력이 득시글한 교토가 싫어진 키요모리는 본거지인 후쿠하라로 돌아갔는데 고시라카와도 같이 끌려가(...) 후쿠하라의 타이라노 모리노리 저택으로 들어갔다.
키요모리는 이참에 후쿠하라로의 천도를 추진했으나 준비가 부족한데다 교토의 기득권 세력들은 물론 심지어는 다카쿠라 상황까지 반대하고 나섰고 도고쿠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후지천에서 헤이케가 캐발리면서(...) 키요모리의 입지가 좁아져 결국 다시 교토로 돌아갈수밖에 없었다. 일련의 상황을 해소할 방책으로 고시라카와의 인세이 재개와 마츠도노 모토후사의 복귀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조성되었고 입지가 좁아진 키요모리는 결국 스스로 고시라카와의 인세이 복귀를 주청할수밖에 없었다.
키요모리가 고시라카와의 인세이 복귀를 주청할수밖에 없었던건 다카쿠라 상황의 건강이 안좋아졌기 때문이었다. 만약 다카쿠라 상황이 죽는다면 결국 살아있는 황실 최고 어른인 고시라카와가 인세이를 할수밖에 없기 때문에 키요모리가 타협할수밖에 없었던것. 그러나 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가 인세이를 재개하더라도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고시라카와를 지지하던 사찰들을 불태우고 고시라카와의 측근들을 해임하는등 세력기반을 줄이는데 힘썼다.
결국 1181년 1월 14일, 다카쿠라 상황이 죽고 고시라카와의 인세이가 재개되었다. 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를 어떻게든 견제하기 위해 갖가지 수를 썼는데 다카쿠라 상황의 중궁인 도쿠코를 고시라카와의 후궁으로 들인다는 파격적인 제안이 나왔으나 너무 무리한 이야기라 실패했고 대신 키요모리의 다른 딸인 미코노 히메기미가 고시라카와의 양딸이 되어 후궁에 들긴 했으나 고시라카와는 키요모리의 수작을 알고 "부녀지간일뿐이다"라면서 미코노 히메기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 ↑ 쇼시라고도 한다
- ↑ 나리코라고도 한다.
스토쿠 상황 최고의 원쑤 - ↑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반적으로 새 덴노의 즉위->황태자 책봉이 정상적이다.
- ↑ 효한키에선 이를 부처와 부처의 합의라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출가한 비후쿠몬인이나 원래 승려 출신인 신제이를 비꼬듯이 일컬었던듯.
- ↑ 헤이지의 난때 얼마나 존재가 미미했으면 다들 니조 덴노의 생사에만 관심이 있고 고시라카와 상황은 관심도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 ↑ 당시 일본의 관례에서 셋칸이 아니면 덴노가 신하를 위해 대사면령을 내리는 예가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키요모리의 위상이 얼마나 컸는지 알만하다.
- ↑ 세간에는 대텐구로 변신한 스토쿠 상황이 고시라카와에게 복수하기 위해 한 일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