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박/지도자 경력

역대 감독 전적
년도소속팀경기수정규리그포스트시즌
1996현대 유니콘스126675454위준우승[1]
1997126517146위-
1998126814501위우승
1999132685953위[2]-
2000133914021위[3]우승
2001133725742위3위[4]
2002133705853위4위[5]
2003133805121위우승
2004133755351위우승
2005126537037위-
2006126705512위3위[6]
통산142777861336­
연도소속팀경기정규리그포스트시즌
2007LG 트윈스126586265위-
2008126468008위-
2009133547547위-
통산38515821710­
총계181293683046­

현대 시절엔 최종보스, 그 이후엔 암흑군주 시대.

1 코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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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돌핀스로 건너가 1년을 더 뛰고 김재박은 자신의 기량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시인, 선수생활을 끝내고 코치수업[7]을 받는다.

2 감독 경력

2.1 현대 유니콘스

이후 현대 유니콘스가 창단되면서 새 구단에 어울리는 젊고 영리한 감독의 상에 부합한다는 현대그룹 고위층[8][9]의 판단에 따라 감독으로 취임한 후, 11시즌 동안 4회 우승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역대 감독 최단기간 승수 기록을 차례차례 경신하며 한국 최고의 감독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페넌트레이스 전체 승률 6할이 넘어간 시즌이 총 3번(98년, 2000년, 2003년)이다.[10]

현대 유니콘스 No.70
김재박(金在博)

2.2 LG 트윈스

LG 트윈스 No.70
김재박(金在博)

그리고 기울어져가는 현대와의 계약이 끝난 뒤 계약기간 3년, 계약금 5억에 연봉 3억 5천이라는 당시 역대 최고대우를 받으며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순철 전 감독이 부임하던 기간 동안 온갖 악재에 시달려온 LG팬들은 환호하며 LG의 부흥을 꿈꾸게 된다. 그리고 첫 해인 2007년에는 막장전력에도 불구하고 아깝게 5위에 그치며 팬들에게 희망을 주는가 하더니 2008, 2009년 최악의 추락을 보이며 감독으로서의 역량마저 비판받는 처지에 올랐다.

2009년 5월 9일. LG 감독으로서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승리하여 최연소 통산 900승을 달성하였다. 1000승은 언제 할라나

3 평가

LG 및 국대 감독으로 참담한 실적을 기록하면서, 현대 시절의 실적 또한 실은 모기업의 빵빵한 지원, 프런트의 뛰어난 역량[11]에서 비롯된 것이지 김재박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2000년 이후 현대는 부자팀이 아니었다. 프런트의 능력이 아무리 좋더라도 돈이 없는 팀이 프런트의 능력만으로 예산부족을 커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FA등으로 선수들을 하나둘씩 뺏기며 선수층은 매우 얇아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가 2006년 정규시즌 2등을 했던 것은 지금까지도 기적으로 불릴 정도. 이는 분명히 김재박 감독의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현대 초기, 태평양의 약체 타선을 물려받고도 이명수를 중용해 내야와 타선을 강화한 점, 전성기가 지난 최창호를 팔아 당시 저평가돼있던 박종호를 데려와 최고의 2루수로 키워낸 점[12], 신인시절 물방망이질을 자랑했던 박진만을 한국을 대표하는 명 유격수로 성장시킨 점[13], 박경완을 내준 이후 김동수를 과감히 중용해서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하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점, 포수였던 이택근의 포지션을 중견수로 바꿔주고 타격 재능을 끌어낸 점 등은 분명히 명감독의 소양이 있어야 가능한 부분들이다. 결국 현대시절의 성적은 프런트와 감독의 시너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건데 이제 와서 김재박의 현대시절 업적을 일방적으로 평가절하하기는 힘들다.

LG시절 팀 성적 추락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부임 첫 해였던 2007년, 전임 이순철 감독이 역대 최악 수준으로 말아먹은 팀에서 우규민, 이대형, 최동수를 발굴하여 중용하고, 척박한 불펜진 속에서 김민기마당쇠노릇 시키며 시즌 막판까지 아슬아슬하게 4강 경쟁한 부분은 분명 김재박의 능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후임인 박종훈 감독이 1998년 이래 역대 최강전력을 구축했던 2011년 4강과 한참 동떨어진 성적을 기록한 것을 생각하면 김재박이 감독으로 무능했다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감독 여하 현장 스태프들이 허약한 전력을 잘 활용하여 선전했음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해서 전력보강에 임했어야 하는 구단은 2008년 단 1명의 FA도 잡아주지 않았고[14] 박명환의 부상과 2007년의 주역이었던 우규민, 이대형, 최동수, 김민기, 조인성이 모두 전년도만 못한 성적을 냄에 따라 봉중근, 크리스 옥스프링의 대활약이 더해졌음에도 팀 전체 전력은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결과를 낳았고 8 원투펀치를 제외하면 총체적으로 무너진 마운드는, 2009년 두 명의 야수를 FA로 보강하면서 타선을 정상화시켰음에도 옥스프링의 부상으로 인한 전력이탈을 버티지 못하면서[15]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 7

그런 와중에서도 트레이드를 통해 잉여자원을 정리해서 손인호대타요원으로 활용하고 조인성과는 현격한 기량차를 보였던 최승환이재영으로 바꿔와서 2008 시즌에 중간계투로 요긴하게 활용했다.[16] 무엇보다 최승환 트레이드로 생긴 백업포수 공백을 은퇴한 김정민을 컴백시켜 메꾸고, 조인성의 주전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활용한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다.[17]

결론적으로, LG 감독 시절 성적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겠지만, 감독으로서의 능력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현대 시절에는 최고의 프런트와 함께하여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고, LG 시절에는 전임 감독의 삽질과 수준의 프런트 때문에 본인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망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4 스타일

현대시절부터 번트작전을 하도 시켜 김번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래서 '뻔트 마스터 재빡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카더라. 덕분에 야구판이 재미없어졌다면서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현대팬들은 김재박의 경기운영에 대해 그다지 비판적이지 않았고 우호적인 반응이 많았다. 다만 현대팬의 수가 적었다보니[18] 실드가 안 쳐진게 김재박의 불운이라면 불운.

특정 선수를 편애한다는 인상을 줄까봐 의도적으로 선수들과의 사적 교류를 피하고, 시즌 중 단체 미팅도 거의 소집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수들에게 전달 사항이 있으면 코치들을 통해 전달하였다고.

본인은 선수 시절 홈런을 잘치는 타자가 아니었는데, 감독이 된 후에는 홈런을 너무 좋아해서 인천구장 펜스 높이를 낮추고 수원의 잠실만한 넓은 펜스도 이중펜스를 쳐서 95-120-95로 만드는가 하면 LG감독 시절에는 전설의 X-존을 만들어 잠실 홈런난무에 일조하기도 했다.

5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현대 감독 시절인 2005년, 시즌 초반에 잘 나가던 롯데 자이언츠를 두고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고 일러 한국야구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만들어낸 장본인. 그리고 착실하게(?) 그 명언을 2009 시즌의 그 팀을 통해 재현해냈다. 원래는 현대가 하위권을 달릴 무렵의 인터뷰에서 '내려갈 팀이 생기면 그 때 치고 올라갈 것'이란 말이었는데 와전되어 지금의 형태가 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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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3위 한화, 2위 쌍방울을 꺾고 코시진출.
  2. 드림리그
  3. 드림리그
  4. 페넌트레이스 3위였던 두산에게 패배
  5. 페넌트레이스 4위였던 lg에게 패배
  6. 페넌트레이스 3위였던 한화에 패배
  7. 사실 이미 LG트윈스 말년부터 플레잉코치로 뛰었다.
  8. 정확히는 초대 단장이었던 김용휘의 판단이었다. 원래 구단에선 김용휘의 고교 선배인 백골프백인천의 영입을 검토했었다고.
  9. 참고로, 이 젊고 영리한 감독의 목록엔 허구연도 있었다. 당시 허구연의 나이는 만 44세로, 넥센 히어로즈의 감독으로 취임한 염경엽의 나이와 같았다.
  10. 김재박의 공도 컸지만 김용휘의 공도 무시할 수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김용휘 항목 참조.
  11. 여기서 말하는 역량이란, 선수단의 문제점을 정확히 집어내어 감독이 말하기 전에 알아서 지원해주는 능력을 말한다. 실제로 당시 현대 유니콘스 스태프들은 야구계에서 이구동성으로 으뜸이라 불리는 조직이었다. 비록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지만, 김재박은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성장하고 길들었기에 정작 그 시스템을 벗어났을 때 성적이 말이 아니었다는 것도 충분히 일리있는 말이다.
  12. 당연 LG팬 입장에서 생각하면 통탄할만한 트레이드다
  13. 신인 시절 박진만은 포수 장비를 착용하고 펑고를 받는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 펑고를 김재박이 직접 쳐줬는데 김재박 본인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쳤다고 한다.
  14. 당시 김재박 감독은 차마 비싼 선수 질러달라는 말은 못하고 하다못해 자신이 현대시절 가장 요긴하게 써먹었던 불펜요원인 조웅천이라도 잡아주길 구단에 요청했었다. LG의 불펜 사정은 그만큼 심각했었다. 물론 조웅천은 안 잡았다.
  15. 그리고 프런트에선 늘 그렇듯 대체용병으로 최악의 선택을 했다 - 제레미 존슨릭 바우어
  16. 덕분에 LG의 포스트 조인성감이 사라졌다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최승환은 조인성과 3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1978년생. 빠른 생일이어서 학번으로는 고작 두 학번 차이.) 기량차는 현격하다. 그렇게까지 아쉬운 선수였다고 보기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2011 시즌 0.234의 맹타를 친 김태군도 있는데...
  17. 이듬해 김정민이 부상당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반쪽짜리 성공이 되어버렸지만...
  18. 이는 원래 연고지인 인천을 버리고 서울로 튀려고 한 현대 유니콘스의 뻘짓이 결정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