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이산가족 상봉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1983년 방송 KBS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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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이요?
심정이요?
그걸 말로 할 수 있갔소?

이보시오,
처자식 남겨두고 내려온 세월이
육십이 년이요 육십이년.
새파랄 때 내려와
팔십일곱 되었소

소감이요?
심정이요?
말로 못 하지
표현 못 하지
이별한 그 세월은
가슴에
여기 가슴에
:
    울어도 못 풀지
죽어도 못 풀지
당신 같으면
말로 할 수 있갔소?

-제페토, <소회>(출전: 그 쇳물 쓰지 마라)

1 개요

연도별 남북 이산가족 교류 추이
분단 시대의 큰 비극 1945년의 남북분단과 1950년의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북한에서 따로 떨어져 생사조차 알지못하고 있던 가족 및 친지들이 서로 만나고 소식을 전할수 있게 한 것을 말한다.

1953년 휴전협정 이후 대한민국북한은 군사적 대치로 서로간의 교류나 방문도 없이 대치해왔으며 이후 북한은 테러를 시도하고 무장공비를 보내는 등 교란을 자행하였다. 대한민국에서도 반공 성향이나 감정이 깊어져 제대로 교류는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대한적십자사가 1971년 6.25 전쟁과 남북분단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의 실태를 확인하고자 이산가족 찾기운동을 시작하였다.1973년 6.23선언을 하였으나 북한과 교류 단절 상태는 해결되지 못하였다.

1984년의 남한 수해에 대해 북한에서 구호물자 제공 제의 이후 급물살을 타면서, 1985년에 가서야 서울평양간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 행사가 이루어졌다. 이 고향방문단은 남북 합쳐 100명의 이산가족을 만나게 한 행사로 이중에서 65명이 상봉에 성공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역사의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상봉은 추천을 받은 사회 유력인사들로 장기려 박사도 처음엔 포함되었으나 워낙에 대쪽같은 성격이었던 장기려 박사가 다른 사람들과 모두 평등하게 만나는 만남이 아니라 유명인사라는 이유로 특권처럼 만나는 것이라면 만나지 않겠다면서 북한의 납북 주장이 세계적인 신빙성을 얻을 것을 우려한 대한민국 정부가 자신을 억지로 보내려 하자 보내면 안 돌아오겠다고 위협해서 결국 빠지게 되었다. 다만 이후 남북관계가 또다시 얼어붙으면서 2차 행사는 제대로 논의도 못해보고 종료되었다.

그리고 1996년과 1998년에 일어난 무장공비 침투사건 및 잠수함 침투사건과 1999년 1차 연평해전 등으로 남북한의 관계가 악화되어 긴장상태에 있었다가[1],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이산가족 상봉 합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그 해 8월 15일 광복절에 제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이산가족 상봉은 김대중 정부시절에 시작되어 노무현 정부까지 순조롭게 이어져 그 당시까지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가족과 재회하는 기쁨을 나누었다. 첫 이산가족 상봉 때는 추첨에서 떨어진 숱한 실향민이 운집하여 고향 사람들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고개를 뺐다. 이땐 그야말로 전국이 눈물바다를 이루었으며 외신기자들까지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으니 아사히 신문 등에선 겨우 100여명 단위의 상봉은 너무 불안정하지 않은가 하는 우려를 표시한 것이었다. 또 이날 납북자 가족들의 시위도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출범 때 북한의 핵 개발 재개로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금강산에서 박왕자 씨 피살사건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때부터 끊어지게 되었다가 2009년 추석 때 어렵게 이루어졌으나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를 치달은 이후로 상봉 논의나 실행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상봉논의가 있었지만 북한이 천안함 피격 사실을 부인하므로서 계속 미루어졌다. 2010년 10월 어렵게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되어 일부 이산가족들이 가족과 재회하였으나 11월 연평도 포격 사태가 발발하면서 결국 이산가족 상봉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2011년 12월에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 체제가 출범하였다. 2012년 8월에 남한북한에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했으나 북한이 경제제재 해제와 금강산 관광재개 그리고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을 문제삼아 이산가족 상봉을 거부함으로서 그 후 오랫동안 이산가족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2010년 10월 이후 3년 4개월 넘게 이루어지지 않던 이산가족상봉이 2014년 2월 20일 이루어졌다. 정말 오래간만에 이루어지는 상봉이라 당첨된 이산가족들은 휠체어와 이동침대에 의지해서라도 상봉을 하겠다며 몰려들었다. 정말 이제 못 보면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지라 각자 이북의 가족에게 줄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고, 10년전 돌아가신 선친의 유언장을 들고 온 사람과 부모의 장지와 기일을 적어오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1명은 건강 악화로 정말 어쩔 수 없이 불참하게 되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서부전선 포격 사건의 남북협상(8.25 합의)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약속했고 그 결과, 2015년 10월 20일부터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20일 상봉은 3시 30분 부터 5시 30분(북한시간 5시)까지 2시간 동안 진행 되었다. 상봉 행사에는 남측 상봉단 96가족 389명과 북측 96가족 141명이 참가했다. 자세한 것은 추가바람

2005년부터는 화상을 통한 상봉도 이루어졌으나 2007년 11월을 끝으로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안타까운 것은 이산가족의 연령이 대부분 80대나 90대 최대는 100세 이상 최고령의 노인들이라 앞날을 보장할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하여서 이들이 생전에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불명이다.[2]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해도 최고령인 1세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됨에 따라 이제는 2세대나 3세대들을 통해서나 만나야 하겠지만 이들 중 일부는 이산가족의 존재조차 아는 이들도 없거나 드문 편이기도 하다. 특히 1세대의 자녀나 손자녀 세대인 2세대, 3세대들은 분단과 전쟁을 직접 겪었던 1세대들과는 달리 전쟁 경험도 없고 헤어진 가족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1세대들에 비해서 이산가족 상봉을 한다고해도 서로 모르거나 어색해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이산가족 상봉 대상들에게 상봉 몇 달 전부터 좋은 음식을 먹이고 건강 검진을 하여 양호한 상태로 유지한다는 말이 있다. 쓸데없이 자존심이 센 북한 입장에선 초췌한 꼴을 보이기 싫은 건 당연지사일지도.[3] 또한 탈북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산가족 상봉에 지명되는 대상자들은 상봉 전에 사상훈련을 받게 되며, 이는 실제로 수십 년 만에 겨우 만난 북측 가족이 하라는 가족 얘기는 안 하고 북한 체제의 우수성 등을 설파하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는 남측 가족의 증언에서 나타난다. 또한 상봉 시에 남측에서 받은 물건 같은 것도 전부 수거해간다는 모양. 게다가 상봉 후에도 얼마 동안은 감시를 받는다고 한다는 말도 있다.

2 관련 문서

  1. 다만 한중수교 이후 중국에서 이산가족들이 상봉하는 경우는 상당히 많았는데 출입국이 심히 까다롭기는 해도 어쨌거나 일부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면 출, 입국이 불가능에 가까웠던 남-북한과는 달리 북한-중국과의 인적교류가 제법 있었기 때문.
  2. 2015년 9월 기준 지난 15년동안 이산가족이 하루 평균 12명 꼴로 사망했다는 통계까지 나온 상황
  3. 덧붙이자면, 14년 2월에 열린 상봉행사장에 북측가족 여성복의 경우 얇디 얇은 여름용 한복같은 것을 입고 나왔다. 한숨밖에 안 나온다.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라면서 춥지않게 어르신들 외투좀 챙겨드릴 것이지 바랄 걸 바라야지, 그랬다면 애시당초 막장국가였을 리가 없지.. 기사에 나온 내용으로는 이런 모습을 본 남측 가족들이 선물용 옷과 심지어 본인들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주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