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찌르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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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문서: 민족주의 테러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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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浅沼稲次郎暗殺事件(あさぬまいねじろうあんさつじけん)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Tokyo Stabbing

1960년, 일본의 정치인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가 TV 연설회에서 극우 소년에게 살해당한 사건.

이때 마이니치 신문의 기자 나가오 야스시(長尾 靖)가 절묘한 순간에 찍은 사진의 영문 제목인 Tokyo Stabbing으로 유명해지면서 이 사진으로 나가오 야스시는 1961년 퓰리처 상을 수상하였으며, 또한 사진 뿐만 아니라 영상도 고스란히 TV를 통해 방송되면서 최악의 방송사고 중 하나가 되었다. 동영상 18초부터 나오는데 찔렀을 때의 충격이 강했던지 순식간에 피의자와 피해자의 안경까지 동시에 날아간다.

2 피해자 아사누마는 누구인가?


아사누마 이네지로
1898년 12월 27일 ~ 1960년 10월 12일

아사누마는 사회주의 계열의 정치 노선중에서도 비교적 온건한 중도적 정치인이었으나 중공에서 미국은 중국과 일본의 공통된 적이라는 요지의 좌익 노선에 충실한 연설 등을 하던 정치인이었다. 복잡한 정치 행보 끝에 1960년 일본 사회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 도쿄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일본 자민당, 일본 민사당[2], 일본 사회당 "3당 당수 연설회"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당일 미국과 일본의 협정을 비난하는 아사누마의 연설 도중 일본의 극우파들은 야유와 협박을 하였지만 아사누마는 계속 연설을 이어갔으며 그러자 17세인 우익 청년 야마구치 오토야가 연단으로 달려와서 순식간에 아사누마의 복부를 긴 칼(코등이 없는 와키자시)로 찌르게 된다. 아사누마는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하였다.

3 범인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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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오토야

1959년 16세의 나이로 대일본애국당[3]아카오 빈[4]의 연설을 듣고 감회받아, 대일본애국당에 입당한다. 대일본애국당의 청년 본부 위원이 되었다.

이후 좌익 정치인의 연설에 난입해 깽판을 부리는가 하면, 아카오 빈의 연설을 비난하는 사람을 두드려 패는, 일종의 자발적 정치깡패 노릇을 하게 된다. 입당한지 반년 만에, 대일본애국당을 탈당한다. 이유는 "더 과격한 활동을 하게 될텐데, 이대로는 아카오 빈 선생과 당에 폐가 될거 같아서"(...). 1960년 7월 1일, 동지들과 함께 전아시아반공연맹을 결성한다.[5]

1960년 10월 4일, 그는 집에서 우연히 와카자시를 찾아냈다. 그는 즉시 메이지 신궁을 참배한 후, 고바야시 다케시 일본 교원 노동조합 위원장과 노사카 산조 일본공산당 의장에게 전화를 건다. "대학의 학생위원인데 가르침을 받고 싶다"며 면담을 요청하지만 고바야시 다케시는 이사갔고(...) 노사카 산조는 여행중이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10월 12일. 문제의 그 사건이 터진다.

너,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일본의 적화를 도모하고 있다. 나는 너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으나, 사회당의 지도적 입장에 있는 자로서의 책임과 방중을 즈음한 폭언과 국회난입의 직접적인 선동자로서의 책임을 물어 너를 용서할 수 없다. 여기에 있어 나는 너에게 천벌을 내린다. 황기 2620년(1960년) 10월 12일 [6]

살인범 야마구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원에서 치약으로 七生報国、 天皇陛下万歲(칠생보국[7], 천황폐하만세!) 라는 내용의 유서를 쓴 후 목을 매 자살했다. 참고로 소설가 사와키 고타로에 따르면 자민당 실력자인 고노 이치로와 그 외 다른 정치인도 야마구치의 테러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태평양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언설을 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황족도 노리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좌익 세력을 아니꼽게 보고 있던 우익들은 천벌을 받았다며 그의 행동을 찬양하면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는 등 선전용으로 잘 이용해 먹었다. 지금도 그가 세상을 떠난 11월 2일에는 우익 단체에 의해 추모식이 열린다. 추모제의 이름은 山口二矢烈士墓前祭로, 구글에 검색하면 이미지가 많이 나온다.

야마구치 오토야의 아버지는 육상자위대 소속의 장교로 1959년에 1등육좌(대령)였다. 아들이 저지른 일로 인해 자위대에서 부담을 느껴 그는 전역해야 했다.

4 후폭풍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 자민당이 패배할 것 같았으나[8] 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아사누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민당은 압승을 거두었으며(296석/467석 57.4%), 민사당이 유탄을 맞아 의석수가 40석에서 17석으로 줄어들어 참패했고 사회당은 의석수를 122석에서 145석으로 늘리기는 했으나 1958년 총선 때보다 의석수가 적었다.

참고로 아사누마가 암살당한 뒤 사회당에서는 그의 부인인 아사누마 쿄코(浅沼 享子)가 후보로 선정되었으며, 이 사건의 여파로 인해 무난히 당선되었지만 3년 후 실시된 선거에서는 입후보하지 않고 사퇴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전일본이 어린이들에게 "날붙이 추방 운동"을 실시하면서, 규제에서 제외 대상이었던 히고노카미[9]와 연필깎이 칼[10] 등을 1963년 4월 5일 총도법(銃刀法. 총포도검류등단속법(銃砲刀剣類等取締法)의 준말) 개정안에 추가로 적용시켰다.

여담으로 일본 래퍼 NORIKIYO의 노래인 仕事しよう의 뮤직비디오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5 기타

다른 나라에서 비슷한 사건이 있었는데 2007년 벌어진 아르메니아터키 언론인 흐란트 딩크 암살사건이다. 범인인 사마스트 오군은 1990년생으로 야마구치랑 똑같은 17살이었다! 터키 극우파인 오군인 아르메니아 학살을 연이어 보도하던 딩크를 살해했으며 잡혀가는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다음은 오르한 파묵 차례다! 라고 외치는 통에 오르한 파묵은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가야 했다.
  1. 이 사진은 막 찌르려는 순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사누마 이네지로의 왼편에서 달려오면서 칼로 찌르고 다시 오른쪽으로 튕겨나간 장면이다.
  2. 니시오 스에히로 등 사회당 일부 계파가 사회당을 탈당해 만든 정당. 1994년 신진당에 합류하면서 해산했다.
  3. 전쟁 전부터 활동하던 반공주의자들이 모여 만든 정당.
  4. 과거에는 사회주의자였으나, 고등경찰에 끌려가서 한번 코렁탕을 먹고 나서는 "천황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반공, 반소비에트 주의자였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5. 이 단체는 훗날 방공정신대라는 정신나간(...) 이름의 단체로 발전하는데, 이들은 스스로 "임협우익"을 자처하며 행동대(를 자처하는 깡패)로 활동한다. 원래 이들은 1955년 결성된 방공신문사의 "방공신문사 청년봉사단"엄마부대 봉사단?으로 결성되었으나, 1960년의 안보 투쟁 이후 고다마 요시오와 점점 더 친하게 지내면서 과격화 되었다. 이후 방공신문사에서 파문당하고 난 잔여멤버들이 전아시아반공연맹과 합세하여 방공정신대가 된다. 트럭에 확성기를 올려놓고 거리에서 시끄럽게 연설하며 다니는 "가선 스타일"의 원조라고 자처하고 있다. 현재 이들은 주주총회의 총회꾼 짓이나 어린 폭주족들을 꼬드겨서 회원으로 가입시키는 일로 유명하다고 한다(...).
  6. 원문은 다음과 같다. 汝、浅沼稲次郎は日本赤化をはかっている。自分は、汝個人に恨みはないが、社会党の指導的立場にいる者としての責任と、訪中に際しての暴言と、国会乱入の直接のせん動者としての責任からして、汝を許しておくことはできない。ここに於て我、汝に対し天誅を下す。 皇紀二千六百二十年十月十二日 山口二矢。
  7. "일곱 번 거듭 태어나도 역적을 주살해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의미다. 남북조시대의 남조 측 근황파 무장 쿠스노키 마사시게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패해 자결하면서 남긴 사세구로 알려져 있는데, 의미가 의미인만큼 일본 제국 시절 군국주의 교육에도 쓰였고, 카미카제 대원들의 하치마키(머리띠)에도 쓰이기도 했다.
  8. 물론 사회당이 낸 후보자수가 196명 정도라 정권교체 될 가능성은 적었다.
  9. 肥後守. 일본형 접이식 사무용 및 미술공작용 칼
  10. 안전 칼집이 있고, 날이 기요틴 날처럼 비스듬한 날이 가진 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