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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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팬 최대의 혐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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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감독대행시절[1]

성균관대학교 감독
설기현 (薛琦鉉 / Seol The Tong-suKi-hyeon)
생년월일1979년 1월 8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강원도 정선군
신체184cm[2], 82kg
가족어머니[3], 4남 중 차남, 부인, 슬하 1남 1녀
소속팀로얄 앤트워프 (2000~2001)
RSC 안더레흐트 (2001~2004)
울버햄튼 원더러스 (2004~2006)
레딩 FC (2006~2007)
풀럼 FC (2007~2009)
알 힐랄 (2009/임대)
포항 스틸러스 (2010)
울산 현대 호랑이 (2011)
인천 유나이티드 (2012~2014)
지도자성균관대학교 감독(2015~ )
국가대표82경기 19골

K리그 역사상 최악의 통수왕.[4]

그러나 감독으로서는 현 성균관대 축구팀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기존의 한국형 팀문화를 타파한 것으로 주목받고 있는 젊은 감독. [5]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클리셰가 과연 깨질 것인가
깨질 뻔 했으나 현재 진행형

1 소개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선수이자 현 성균관대 축구팀 감독.

왼쪽 윙포워드가 주포지션이었지만 양발 모두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어 오른쪽 윙 포워드로도 종종 뛰었고 클럽에서는 중앙 공격형미드필더로 시즌을 소화한 적도 있으며 국가대표팀에서는 원톱에 서기도 했었다. 강릉 제일고의 전설에 따르면 설기현은 아침에 일어나서 숙소에서 식당까지의 경사진 길을 볼 트래핑하면서 가고, 다시 식당에서 숙소까지 볼 트래핑하면서 돌아갔다고 할 정도로 연습에 매진했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의 주역 중 하나이며 02 월드컵까지만 대표팀 에이스급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말년에는 역대급 배신의 연속으로 팬, 특히 K리그 팬들의 찬양을 욕으로 바꾸고 커리어를 끝낸 선수.

2002 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에서 후반 경기종료 직전인 43분에 0:1 상황에서 기적같은 골을 넣으면서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 가, 한국의 8강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고 이 때가 정점.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선 프랑스 전에서 박지성의 골로 이어진 크로스를 하기도 했다. 오른발을 많이 썼지만 양발이 두루 능숙해서 어느 발로도 중거리슛이나 세트피스 처리가 가능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한때 이동국과 언론이 만든 라이벌 기믹이 있었다. 비슷한 나이대에 엘리트코스를 타던 이동국과 언더독이었으나 스스로 길을 개척하여 유럽에서 성공한 설기현이라는 구도로 많이 비교되었다. 2000~2002까지는 설기현이 거의 유일한 유럽에서 뛰는 선수였고[6] 벨기에리그이긴 하지만 챔피언스리그에도 나가고 팀의 주전으로 자리잡았기에 분데스리가에서 실패하고 온 이동국을 보고 설기현을 배우라는 둥 아래에서 부터 차근차근 올라가야지 처음부터 한꺼번에 너무 높은 곳만 가려고 했다는 둥 게으른 천재와 노력형 준재 등으로 이동국을 비난하는 용도로 자주 애용되던 선수다.

2 약력

학창 시절부터 알아주는 유망주였다. 강릉 제일고와 광운대, 청소년 대표팀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하던 설기현은 특이하게도 02년 월드컵을 앞둔 유망주 육성 계획에 따라 K리그가 아닌 벨기에 주필러 리그의 로얄 앤트워프에서 프로데뷔를 한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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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해외 활동

대한민국 최초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자이자 최초 챔피언스리그 골 기록자

차범근 이후 두번째 유럽리그 두자리 수 골 기록자, 최초로 중동리그에 진출한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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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주필러리그에서 2000~01 첫 시즌 25경기동안 11골(리그 10골,컵 대회 1골)을 넣으며 좋은 활약을 했고 이는 차범근에 이어 역대 2번째 유럽리거 시즌 10골 기록[8]이었다. 이런 활약에 힘입어 다음 시즌은 같은 리그 우승후보인 RSC 안더레흐트로 이적한다. 안더레흐트에서 벨기에 리그 우승을 이뤘고 슈퍼컵 대회에선 헤트트릭을 하며 4:1 대승을 이끌어 우승 주역이 되었다.[9] 그리고 2002년에는 안더레흐트 소속으로 발롱도르 후보자 1차 리스트에 뽑히기도 하는 등[10]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2002~03 시즌에는 시즌 13골을 기록했으며 2003-2004 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여 예선라운드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한 한국인이 되었고 마찬가지로 예선라운드이긴 하지만 한국인 첫 챔피언스리그 골도 기록한다.[11] 당연히 국내에서의 위상도 어마어마해서 국대 에이스급으로 부상했다. 처음부터 빅리그 빅클럽을 노리기보다 중급리그 중소팀에서 '유럽에 적응'하고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간 성공사례로 꼽히며 이동국과의 비교가 극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주필러리그에서 4시즌 반동안 32골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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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잉글랜드 챔피언쉽의 울버햄튼에서 뛰었다. 이때 감독의 전술에 따라 최전방 공격수와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를 넘나들며 팀의 주전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2006년 1월 30일 박지성이 속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FA 컵에서 대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5년 역시 FA컵에서 아스날을 만났는데 앙리가 설기현과 경기 중 충돌할 뻔 했는데 피한뒤 양팔을 닭날개처럼 퍼덕이는 몸짓을 해서 국내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겁쟁이라는 뜻 외에 동양인을 비하하는 몸짓이라고 인종차별논란이 도마에 올랐으나 딱히 치킨이 동양인만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고 저런 닭날개짓이 딱히 동양인을 비하하는 제스처로 쓰이는 것은 아니라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05/06시즌 종료 후 챔피언쉽에서 우승하며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한 레딩 FC로 이적한다. 당시 레딩은 구단 최고 이적료를 지불하며 기대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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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초기엔 골과 어시스트를 고르게 기록하며 팀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특히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전에서 기록한 결승 프리킥골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슈퍼골.[12]
이 초기의 엄청난 활약을 바탕으로 설붐이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다. 어원을 생각하면 얼마나 큰 기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epl0708시즌 오프닝에도 출연했다!
0분 14초쯤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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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점점 부진의 늪에 빠져 결국 4골 4어시스트로 시즌을 마감했고 다음 시즌을 앞두고 풀럼의 오른쪽 수비수인 리암 로시니어와 트레이드로 풀럼 FC로 적을 옮긴다. 풀럼의 스폰서이던 LG의 영향도 있어 보이나 등번호로 7번을 달기도 했던 만큼 팀내 대우나 입지는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설기현 영입을 추진한 로리 산체스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고 로이 호지슨이 부임하면서 입지가 크게 좁아진다. 베스트 11을 고집하는 조직력 축구의 신봉자였고 교체를 통한 전술변화도 잘 주지 않는 호지슨 밑에서 변변한 출장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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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우디 알 힐랄로 임대 이적되어 뛰다 풀럼과 계약 해지한 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한다.

2.2 국내 활동

K팬들에게 빅엿을 주고 간 시절

2.2.1 먹튀 비긴즈 - 포항 스틸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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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작되는 역대급 먹튀전설

포항팬 한정 혐짤[13] 결과적으로 K리그에서 뛴 세 팀 모든 곳에서 먹튀 및 통수로 찍히면서 3관왕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포항 입단 직후 첫 훈련에서 부상을 당해, 3월, 4월, 5월 경기에 나온다 안 나온다 하더니 결국 반 시즌을 그냥 날려먹었다(...). 그리고 후반기 들어와 골도 기록하고 나름대로 밥값은 해주나 했는데...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포항이 8강 2차전 조브아한과의 경기에서 결정적인 한가위 대보름 폭발슛을 날리면서 팀의 무승부에 일조[14]하면서 제대로 욕을 먹고 삐걱대기 시작하였다.


이 슛의 이름은 여러가지가 있으며, 지금까지 포항팬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름은 다음과 같다. 한가위 대보름 폭발슛, 포항제철 대붕괴슛, 용광로 대폭발슛등등(...).
천천히 끝까지 보자, 아쉬워하는 설기현, 어처구니 없어하는 박창현 당시 감독대행,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닌 서포터즈, 맨 마지막 리플레이까지 봤다면 매우 심하게 빡쳐서 화가나 죽일 기세로 달려오는 모따까지 보너스사실 모따가 웃음포인트로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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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따는 전부터 '설기현에게 패스하면 골 넣는다는 감이 온다'라고 인터뷰를 하는 등 설기현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넣는다는 감이 온다고 했지 넣는다고는 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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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서포터즈들과 서로 주먹감자를 주고 받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지만 그래도 양심에 찔렸는지[15] 재계약 의사를 내비치면서 계약이 끝난 뒤에도 2월까지 팀에 잔류하자 팬들도 조바한전의 활약상(...)을 빼면 괜찮은 활약을 보여준 설기현에 대한 지나친 비난에 대해 화해의 표시로 생일파티[16]까지 열어주었으나...훼이크다 이 병신들아.

2.2.2 먹튀 리턴즈 - 울산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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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국 이전까지 울산 최고의 혐짤

결국 시즌 개막 직전 그 많은 팀들 중에 하필이면 포항의 자타공인 라이벌 울산으로 이적하면서 포항 팬들에게 죽일놈으로 찍혔다.[17]

이적하면서도 좋은 소리를 못 들은 것이 본인은 최전방 공격수 자리에서 뛰고 싶은데 팀에선 자꾸 윙 포워드를 강요한다고...한마디로 본인이 경쟁해서 자리 꿰찰 생각은 안 하고 자리 안 내준다고 징징대며 도망간 꼴[18]

하지만 이미 골결정력이 시망이고 돌파능력만 남아있는 상황에서 포항 입장에서도 윙포 말고는 배치할 자리가 없다.[19] 그리고 그 최전방 공격수 자리를 찾아간 울산에서 조차...이걸로는 답이 없다고 생각해서 윙포로 다시 내려 버렸다. 참고로 정작 포항에서는 슈바가 부상으로 전반기 결장을 했던 탓에, 오히려 포항에 남아있었다면 설기현 본인이 원하던 최전방 공격수 자리에 기용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못내 포항팬들에게 미안했는지, 2011년 4월 23일 리그 7라운드에서 벌어진 포항 홈에서의 영남더비[20]에서 한 번 더 포항을 상대로 홈런볼(...)을 차줌으로서 포항팬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게 만들었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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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K리그 7라운드 포항 대 울산 경기에서 포항 스틸야드 N석 철망에 걸린 대금청구서, 조바한전 정신적 피해 그리고 생일케잌이 웃음포인트.[21]

2011시즌 성적은 41경기 7득점 10도움. 괜찮은 편이지만 이 기록은 정규시즌과 PO, 컵 대회를 모두 합친 것이다. PO에서 5경기동안 2골 2도움의 맹활약을 했던 것은 있지만, 정규시즌만 따지면 29경기 3골 5도움이란 연봉에 비하면 만족스럽지 못한 활약을 보여주었고 볼 수 있다. 여담으로 울산에서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한 선수는 수비수 곽태휘다. 또한 같은 팀 공격수 김신욱이 리그에선 부진했지만 컵 대회에서 11골을 몰아넣은 것에 비한다면 그저 안습이란 말 밖에...

그렇다고 골 가뭄에 시달린 시즌이었냐 하면 그도 아니었다. 득점왕 데얀이 23골, 2위 이동국이 16골, 3위는 뼈트라이커 김정우 15골...만년 유망주 3동현 가운데 한명인 양동현이 9골로 10위를 기록했다. 몸값을 생각한다면 울산 팬들 입장에선 미칠 노릇이다.

그런데 K리그/2011년 챔피언십 플레이오프에서 친정팀 포항을 상대로 페널티킥을 얻어내고 성공! 이것이 그대로 결승골이 되면서 울산을 챔피언 결정전으로 진출시킴과 동시에 챔피언스 리그 티켓을 따냈다. 반면에 포항은 K리그의 챔스티켓이 3.5장으로 줄면서 플레이오프를 노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그리고 포항팬들의 어그로는 하늘을 찔렀다.

다만 뭐 돌이켜 보면 그나마 울산 시절이 공헌도도 그렇고 임팩트도 그렇고 헤어지는 과정도 그렇고 가장 양호했다고 할 수 있다. 연봉먹튀 기질도 있고 팀내 불협화음도 좀 내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플옵에서는 꽤나 몰아치면서 챔스 티켓에 공헌한 바 있고 아예 포항에서 울산으로 이적한 것보다야 울산에서 인천이적한 것이 낫다. 전지훈련 참가 후 이적이긴 하나 그런 선수가 설기현뿐인 것도 아니고, 전시즌 7경기 뛰고 전지훈련 참가한 후 갑자기 은퇴하고 감독하던 인천시절을 비교하면 그나마 울산 시절이 가장 양호했다고 할 수 있다.

2.2.3 먹튀 라이즈 - 인천 유나이티드

2012 시즌을 앞두고는 연봉문제로 울산 현대와 다투는가 싶더니 인천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허정무 감독과의 인연이 큰 이적을 결심하는데 역할을 한듯. 연봉을 울산에서 받던 수준의 절반으로 줄이고,울산 팬들의 원성 속에서[22] 인천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한 후 지도자 준비를 할 것이라고 한다.

2012년 11월 18일...인천 유나이티드와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서 메시난쏘공 사건을 홈에서 저질렀다.# 무슨 이유에서건 관중석을 향해 공을 찬 것은 비상식적인 행동이다. 비록 심판은 옐로카드로 넘어갔지만 저건 옐로카드 하나로 넘어갈 일은 절대 아니다. 흥분했다고는 하나 고의로 찬 것이며 관중에게 맞지는 않았지만 만약 어린 관중에게 맞았으면 절대 코피가 났다 수준으로 끝날 게 아니었다.

이후 언론에 밝힌 바로는 설기현 본인은 판정에 불만을 품고 공을 광고판에 찬다는 것이 그만 관중석으로 날아갔다고. 변명도 메시와 똑같다. 완전 벤치마킹 그나마 메시는 그 원수같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저질렀지. 설기현은 홈관중에게 관중슛을 쏨 당연히 네티즌들은 설득력 없는 설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조차 개발로 홈런을 치냐고 신나게 깠다. 설마 한가위 대보름 폭발슛 시즌2?

다음날 19일 인천 공식홈페이지를 통해 사과문을 게재했다.

설기현입니다.
먼저, 어제 경기중의 의도치 않은 실수로 여러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어제 경기중의 일련의 일들을 여러분께서 모두 보셨기 때문에 상황은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팀의 고참선수로 후배선수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소 흥분된 상태에서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했던 것 같습니다.
어제의 제 실수로 인해 불편을 겪으신 많은 분들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점, 깊이 반성하고 있으며 앞으로 보다 성숙된 모습으로 경기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설기현 올림

사과문을 올렸다지만 너무 경솔한 행동이었으며, 설기현 정도의 위치와 나이라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보다 더 경솔한 행동이 기다리고 있었음을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 했다.

일단 2013시즌은 인천은 스플릿 A그룹에 드는 저력을 발휘하지만 설기현 본인은 그저 그런 평범한 활약을 한다.
그리고 2014시즌은 부상으로 골골대며 고작 7경기만 뛰고 시즌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2015년...

3 갑작스런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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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블을 접다가 결국 선수 생활까지 접어버린 설기현
축구계를 떠날 때까지 안고 가야할 과오

2015년 3월 3일 K리그 클래식 개막을 4일 앞둔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하고, 성균관대학교 감독[23]으로 부임한다고 한다. 시즌 개막 직전마다 일을 저지르는 설기현 심지어 전지훈련도 동참하고 시즌 새 유니폼 모델까지 맡았기에 부상으로 경기 얼마 안 뛰고 연봉만 받아먹었던 작년의 모습을 지우고 그래도 올해는 뭔가 기대에 부응해주지 않을까 했던 팬들의 당혹감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 설기현 때문에 인천으로 이적한 케빈 오리스 안습[24] 포항 팬들과 울산 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천 팬들 역시 설기현을 크게 비난하고 있다. 이렇게 가는 팀마다 욕 먹기도 힘들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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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기현의 은퇴에 대한 관중들의 답례.[25] 압권은 SEOL마했던 우리가 호9[26]였네, 레며 다린 개막 실은 뒤통수.

다행히 설기현의 일방적 계약해지이기에 인천 입장에서는 위약금 받으면 끝나는 일이지만, 설기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인천의 1년 계획이 완전 틀어져버렸다. 설기현은 2014년 2년 계약을 맺어 2015 시즌까지 뛰기로 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지난 시즌 끝나고 진작 은퇴를 선언하며 계약을 해지했더라면 설기현에게 줘야 할 남은 1년치 연봉을 진작에 세이브하여 이석현, 박태민, 남준재, 문상윤, 구본상, 이보 중 몇 명은 지켜낼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석현을 FC 서울에 헐값에 팔아치워버렸던걸 생각하면 더 열받는 상황. 게다가 김도훈 감독은 2015 시즌 케빈과 설기현 투톱 체제를 구상하고 있었기에 설기현이 갑작스레 은퇴해버린 현시점에서 다른 자원을 억지로 투톱으로 올리거나, 여름 이적 시장이 열리기 전까지 케빈 원톱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27] 또한, 구단 측에서는 설기현의 은퇴를 전혀 생각하지 못 하고 그를 선수로 등록했기 때문에 로스터 자리에 그의 자리를 비우게 되었으며 설기현이 훈련도 제대로 참여하고 각종 홍보물에 메인모델로 설기현을 두는 등 지난 시즌에 그렇게 먹튀 짓을 했음에도 설기현을 기용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여왔는데, 설기현의 은퇴로 그 홍보물들을 죄다 폐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 안 그래도 돈 없는 인천 유나이티드는 돈을 또 써야 하는 상황이 됐다. 한 마디로 팀에 도움 안 되는 민폐 짓만 한다. 돈도 없는 시민 구단 돈 제대로 빼먹는 먹튀

이 와중에 대한축구협회에서 관리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페이스북에서는 '설기현, 당신의 새로운 축구 인생을 응원합니다. 지도자로서 새출발하는 설기현 선수에게 응원 메시지를 보내주세요! 3분을 선정해 설기현 선수 친필 사인 축구화를 드립니다.'라는 멘트를 올려 인천과 포항 팬들을 비롯한 K리그 팬들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다. 넌씨눈 물론 댓글창은 포털 사이트 못지 않게 전쟁이 일어났다.

앞서 각주로 언급된대로 설기현에게는 감독 경력도, 1급 지도자 자격도 없기 때문에, 성균관대에서 내세운 감독 채용 응시자격과도 맞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성균관대 축구부 내부에서도 반발이 커지고 있는 상황.

이 와중에 설기현은 은퇴 기자회견에서 "지도자를 할 것이라면 감독을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나의 철학을 실현하고 검증 받기 위해서는 감독으로 시작해야 한다. 내 경험을 내 팀에 입힐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감독이다. 코치로 시작하면 그런 축구를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라는 경솔한 발언으로 멋 모르고 실드치던 이들마저 떠나보내는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 참고로 전남에서 스태프 생활을 시작해서 포항 스틸러스의 명감독으로 인정받은 황선홍도 시작은 전남 드래곤즈 2군 코치로 시작해[28] 전남 수석 코치 → 부산 아이파크 감독 → 포항 감독으로 차근차근 시작했다. 현재 K리그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인 전북 현대의 감독, 최강희도 코치로 스태프 커리어를 시작했다. 심지어 지금 한창 욕 먹는 홍명보도 어쨌든 먼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29]

물론 선수생활 끝나자마자 바로 감독을 맡는 경우가 아예 없는건 아니다. 단적인 예로 한때 프리미어리그에 있었던 미들스브로의 전 감독이었던 가레스 사우스게이트는 2005-2006시즌까지 현역으로 있다가 현역은퇴를 하자마자 다음 2006-2007시즌부터 감독을 맡았다.[30] 하지만 이 경우는 사우스게이트가 미들스브로의 주장이자 팀의 중심이었고 사우스게이트 이전 감독이었던 스티브 맥클라렌 밑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으며 선수 생활을 했는데다 미들스브로 구단에 베테랑 코치들이 많기때문에[31] 이들이 사우스게이트를 보좌해줘서 가능한 일이었지만[32] 설기현은 지도자 수업을 받은적도 없고, 감독 생활을 시작할 성균관대와는 어떤 연관도 없다.

설기현의 경솔한 발언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은퇴식에서 그는 "사실 3년 전부터 은퇴를 생각했다." "내가 인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인천에는 케빈이라는 좋은 공격수가 있다. 전력 공백은 특별히 없을 것이다" "김도훈 감독님은 너무나 흔쾌히 결정을 해줬다. 사실 서운하기도 한데, 그런 부분이 도움이 됐다"는 등, 본인은 농담이라고 하지만 정작 인천 구단 관계자 및 팬들을 더욱 화나게 하는 발언을 했다. 일단 재미도 없고 구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없으니까 은퇴해도 된다??? 그런 식이면 여러 팀에서 주전 경쟁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선수들을 무시하는 발언이나 다름 없다.인천에는 벤치에 앉는 선수들은 죄다 은퇴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케빈이 인천에 오게 되면서 설기현이 더욱 중요해진 것이 인천은 통역사가 없기 때문에 선수단중 영어를 제일 잘하고, 해외 경험이 많은 설기현이 통역사 대리를 해 주고 있었다. 그것도 자기가 자청해서. 게다가 케빈은 인터뷰에서 대놓고 벨기에리그 시절 설기현을 언급했을 정도이다. 은퇴선언 얼마전 인터뷰에서도 "케빈이 좋은 성적을 낼수있도록 최대한 적응을 돕겠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갑자기 은퇴해버렸으니...이대로라면 케빈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팀 멤버들과 같이 뛰어야 한다.

포털 사이트에서는 설기현을 옹호하는 댓글의 의견 대부분이 직장에서 일하는 도중에 더 좋은 제안을 건넨 직장이 있는데 당연히 거절할 수가 있겠냐라며 옹호를 하지만, 애초에 예시가 틀리다. 그들이 말하는 예는 이적 시장 종료를 며칠 앞두고 이적한 선수들에 한해서만 예시가 맞다. 편의점, 주유소 알바도 이딴 식으로 그만두면 욕먹는다. 어떤 사람들은 인천 유나이티드 구단이 삽질을 계속 하고 있었으니[33] 설기현도 팀에서의 입지가 불안하니까 은퇴한 게 아니냐고 왜 설기현이 욕 먹냐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설기현의 은퇴 여부가 아니고 설기현의 은퇴 시기다. 설기현이 그동안 잦은 부상으로 인해 몸 상태가 안 좋아 팀에서의 입지가 안 좋았던 것은 사실이고 그가 은퇴해도 인천 팬들이 크게 아쉬워할 것도 없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시기가 너무 안 좋았다. 한참 시즌을 준비해야 하는 2 ~ 3월에 전지 훈련도 꼬박꼬박 참가하고 홍보 모델로도 꼬박 꼬박 참여하면서 은퇴에 대해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다가 이적 시장이 다 끝나가고 시즌이 개막하는 시점에 갑자기 은퇴를 하니, 구단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 밖에 없다. 누가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당장 은퇴할 사람으로 보겠는가?

설기현의 이번 상황을 간단히 말하자면 한 때, 실적이 좋았던 사람이 회사 내에서 계속 삽질만 하다가 다른 유능한 직원들이 떨어져서 이 사람을 믿고 써야 하는데 이 사람이 자신이 해야 할 중요한 프로젝트를 앞두고, 나 슈퍼스타K 나가서 상금 탈 거니까 회사 관두겠음. 요번에 신입이 나보다 일 더 잘하니까 걔한테 내 일 맡기셈 이런 식의 행동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의 은퇴에 대해 인천의 한 관계자는 "인천이 기분 좋게 보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싸울 수도 없다. 꽃다발을 전해주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이별로 보기는 어렵다"라고 말했고 김도훈 역시 시기가 아쉬웠다며 올 시즌 그를 중요 선수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게 말은 이렇게해도 속뜻을 보자면 "니를 중심으로 전술, 시즌계획을 다 짜놨는데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수있어? 꼴도보기 싫으니까 그냥 꺼져!!"나 마찬가지다(...). 설기현 본인은 감독이 쉽게 은퇴 해주었다고 하더니??

참고로 역시 올 시즌 은퇴 예정이지만, 차두리는 시즌을 전부 소화하고 소속팀인 FC 서울에 FA컵 우승을 안겨주며 은퇴했고, 설기현 은퇴 직전까지 같은 팀이었던 이천수는 연봉을 자진삭감하고 팀에 잔류했으며, 팀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맡아 인천이 막판까지 상위스플릿 경쟁, FA컵 결승까지 올라가게 만드는데 공헌을 하고 인천팬들의 감사를 받으며 은퇴하게 된다. 이천수랑 설기현이랑 바뀌었나??

4 성균관대학교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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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감독 대행이 된 이후 풋볼리스트[34]설기현은 왜 그렇게 감독이 되었나라는 이름의 인터뷰 기사를 냈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제목으로 나온 '왜' 감독이 되었나라는 내용은 변명으로 점철되어 있다. 또 왜 급작스럽게 출신학교도 아니고 자격증도 없으며 공채에도 응시하지 않은 설기현이 감독 대행이 됐는지 대한 내용은 스리슬쩍 넘어가고 감독 대행이 된 뒤 성균관대 출신 지도자들이 설기현의 선임에 불만을 품고 그 자리는 내 자리라며 물러나라고 협박했다는 내용이 주된 내용으로 논점을 흐리고 물타기만 하고 있는 기사여서 인천팬들을 비롯한 K리그팬들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있다.

또한 기사에 따르면 1급 지도자 자격증을 지닌 광운대 후배 홍복표 코치를 선임했다고 한다. 2급 자격증만 취득한 설기현은 벤치에 앉을 수는 있어도 지시는 내릴 수 없어 경기에 나가면 홍 코치가 지휘를 해야하고, 경기장 외에서만 감독의 직무를 대행하는 웃지 못할 상황을 설기현이 1급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하는 2016년 1월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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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리그 개막전으로 감독 데뷔를 했지만 자격증 문제때문에 경기장 벤치에도 못 앉고 학교 건물에서 경기를 봐야했다. 예원예술대를 3-1로 이기며 데뷔전에서 승리를 기록한다.

대한축구협회 FA컵에선 2라운드부터 출전했는데 영남대에 0:1로 패해 일찌감치 짐을 싼다.

[인터뷰 ‘지도자’된 설기현 “운동? 하루 딱 한 번, 1시간 10분”]
최근 인터뷰가 또 나왔는데 "저는 선수 때부터 평소 갖고 있는 철학을 펼치려면 대학 감독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성균관대에서 마침 좋은 제안을 주셔서 선수 은퇴라는 중대한 결심까지 하면서 수락한 건데 생각지도 않은 논란이 발생해 솔직히 당황스러웠죠." 이 말을 남기면서 자기만 아는 사람이란걸 또 인증하며 인천 팬들의 어그로를 또 끌고있다.

10월 13일 대표팀의 자메이카와의 친선경기때 은퇴식을 연다고 한다. 한동안 소식도 없다가 갑작스럽게 나온 발표에 축구팬들의 반응은 엥? 시바끄 이 무신 소린교?

은퇴식 후 인터뷰에서는 자신을 지지해준 포항, 울산, 인천 팬들에게 감사히 여긴다는 안해도 될 말을 해서 더더욱 팬들의 공분을 샀다.

저 위의 홍명보, 황선홍, 사우스게이트 등을 거론하며 늘어놓은 저주와 달리 성균관대는 대학리그 결승전까지 올라갔다. 지도자로써의 능력은 있다. 성균관대는 U리그 결승전에서 용인대에게 0:2로 지면서 준우승을 했다.[35] 애초에 대학팀에 설기현 정도의 커리어와 위상을 가진 사람을 거스를 선수가 어디 있겠는가? 사우스게이트처럼 본인 인품과 상관없이 팀 장악에 문제를 겪을 가능성은 없었다.

성균관대는 안방에서 재학생들과 학교 관계자 등이 지켜보는 앞에서 첫 U리그 챔피언십 정상 정복을 노렸지만, 용인대의 기동력과 압박축구에 이렇다할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서 아쉽게 준우승에 만족해야했다. 그럼에도 성균관대는 살림꾼 위현욱과 해결사 정준규(이상 3학년)의 BTV-CUP 대학선발 차출, '캡틴' 김성현과 최영효 등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경고누적 등 온갖 악재 속에서도 인천대와 숭실대, 서남대, 선문대 등 만만치 않은 상대들을 줄줄이 연파하는 저력을 뽐내며 '설기현호'의 장밋빛 미래를 암시했다. 해당기사

U리그 왕중왕전 당시 인터뷰를 보면 교육은 다 받았고 자격증 발급만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2016년 1월에 1급 지도자 자격증을 획득후 정식 감독이 되었다. 성균관대 감독으로서는 계속 순항중. U리그 서울-경기권 대학 1위를 차지했고 2016년 FA컵에선 챌린지의 강호 이랜드를 승부차기 끝에 물리치고 16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프로선수를 키우는 바탕인 대학팀에서 기존의 한국 축구의 관행과는 다른 자신의 철학을 펼치려고 노력하고 있다. #

5 플레이 성향

스피드와 돌파력은 좋으나 볼터치는 좋지 않았고 결정력이 떨어졌다[36]. 다만 결정력과 별도로 중거리슛의 파워가 쓸 만했다.

하지만 결코 저평가 될 선수는 아니다. 무엇보다 고정운 이후 대표팀에서 가장 뛰어난 크로스를 가진 선수였다. 설기현 이후 대표팀에선 양질의 크로스 올려줄 측면자원이 사라진다. 설기현이 주로 윙 포워드로 뛴 이유는 이 크로스를 썩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0년이 넘도록 양 측면 가리지 않고 한국에서 제일 정확한 크로스를 올렸다. 정확도는 물론이려니와 속도가 빨랐고, 각도 예리했다. 정지상태 뿐 아니라 달리는 상태에서 올리는 러닝 크로스도 한국에선 독보적이었다. 2006년 월드컵 프랑스전에서 박지성의 동점골 과정에서 올린 런닝 크로스가 좋은 예.

2002년의 대표팀에서는 유일하게 한국 측면에서 안정적으로 볼을 운반할 능력이 있던 선수라고 히딩크가 언급했다. 2001년 시절, 국가대표가 공격수 부재에 시달렸을 때 히딩크는 담담하게 "설기현만 오면 다 해결된다."라는 코멘트를 했었다.

피지컬도 한국 기준으론 스피드, 몸빵 공히 최상급이었고 187cm의 장신이라 공중볼도 상당히 잘 따냈다. 이 피지컬을 바탕으로 가끔 최전방 스트라이커로도 뛰었다. 가장 큰 단점은 상기한 큰 장점을 냅두고 자꾸 중앙 공격수로 뛰기를 원했다는 것. 레딩에서도 이 때문에 스티브 코펠 감독과 갈등이 생겨 결국 이적하게 되었다.

6 기타

강원도 출신이기 때문에 강원 지역[37]에서는 이을용과 마찬가지로 애지중지 하는 선수 중 한 명이다. 때문에 국내 복귀 이야기가 나오면서 강원FC로 오지 않겠느냐는 설레발이 있었다.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데다 자기 주관이 뚜렷해서 주변 사람들과 티격태격하는 일이 잦았다. 이거 아니면 안 한다 등등의 일도 잦았고 포지션 관련해서 다투는 일도 많았다. 잉글랜드 시절에도 여러 차례 팀과 다툼이 있었고, 포항, 울산, 이제는 인천과도 좋지 않게 헤어졌다.

이영표가 전도에 실패한 몇 안되는 사람이 설기현이라고 한다. 김신욱도 울산 시절에 시도해 봤지만 그럴 때마다 저 교회는 뭐가 안 좋더라, 저 교회는 누가 비리 있다더라 하면서 조목조목 튕겨내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여담으로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영웅에서 불과 30분만에 그야말로 대역적으로 추락할뻔 했다. 연장전에서 한국 존에서 수비하던 와중 어이없는 백힐 패스로 젠나로 가투소에게 골든골을 헌납할뻔했기 때문. 물론 다행히도 이운재가 선방해줘서 위기를 모면했지만 진짜 아찔한 순간이였다.

과거 나이키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2002 월드컵 시즌을 앞둔 나이키의 Secret Tournament라는 캠페인에 데니우손, 호나우딩요와 같은 팀으로 나왔으나 정작 출연한 것은 이름(SEOL)뿐 실제로는 그림자도 안나왔다. 당시 국내에서 설기현의 위상을 알 수 있는 CF이긴 하다. 티에리 앙리, 피구와 함께 나온 CF도 있었다. 한국 대상 지역모델

해외 처자들에게 먹히는 얼굴인 듯하다. 벨기에 시절 경기장 밖에 소녀팬들이 몰려와서 설기현의 이름을 외쳤다고. 이 기믹은 정성룡이 물려받았다.

K리그 팬들 사이에서는 활약 초기에는 국가대표 출신에 2000년대 초반의 몇 안 되는 유럽파 선수들이었다는 점에서 많이 추앙받았지만, 국내 복귀 후 거듭된 통수질로 이미지가 상당히 안 좋아졌다. 아예 본명인 설기현으로 부르지 않고 통수, 설사 등의 혐칭으로 부르는 팬들도 상당수.

  1. 설기현은 당시 아직 1급 지도자 자격증을 따지 못했다. 그래서 자격이 안되어서 정식감독에 못올라가고 대행으로 2015년을 보내야했다.
  2. 대한축구협회 공식 프로필
  3. 광부였던 아버지는 1987년 광산사고로 작고하셨다.
  4. 사실 K리그에 통수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며 조금만 검색해도 얼마든지 통수 사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설기현처럼 3연속으로 통수 친 선수는 거의 없다. 그나마 염기훈이 전북과 울산을 상대로 2연속 통수를 친 경력이 있으나 울산에서 수원 이적 후에는 그 염기훈이 지금 염기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상당히 멘탈이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나마 염기훈은 그럭저럭 어그로 짓을 많이 하지 않고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5. 15년 6월 전국체전 1위, 7월 추계연맹대항전 4강, 15년 11월 U리그 준우승, 16년 U리그 서울~경기권 1위, 16년 FA컵 16강
  6. 당시는 지금과는 달리 유럽에서 뛰는 한국선수가 정말 거의 없었다. 설기현 이외에는 안정환 정도인데 안정환도 이적초기에는 팀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시기다. 한국인의 유럽진출이 수월해진건 02월드컵 4강신화와 박지성, 이영표 등의 해외진출 성공 등의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7. 참고로 이 때 이상일이 KSK 베베런에 입단했으며, 설기현과 이상일은 한국 선수 중 최초로 벨기에 1부 리그에서 활약한 선수가 되었다.
  8. 이후 박주영과 손흥민, 석현준이 유럽 리그에서 한 시즌 10골 이상을 기록했다. 그런데 스포츠서울은 설기현을 빼고 석현준을 4번째 유럽 진출 선수 시즌 10골 달성이라고 기사를 냈다가 비난을 받았다.
  9. 로얄 앤트워프는 설기현을 이적시킨 뒤, 03-04시즌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동팡저우를 임대하면서 그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보기좋게 2부리그 강등당하고 만다. 그리고 2015년까지도 줄곧 2부리그인 Belgian Second Division 신세이다.
  10. 발롱도르 후보자에 들어간 한국인은 2005년 PSV 박지성, 2015 레버쿠젠-토트넘 손흥민이 있다.
  11. 챔스 본선무대 한국인 첫골은 PSV 시절 박지성이 04-05시즌 4강전에서 넣었다.
  12. 이 골은 BBC에서 선정한 '06-07 EPL Goal of this season'에서 18위에 올랐다.
  13. 포항의 1년 연봉 12억을 낼름! 아주 그냥 먹고 튄 것까진 아닌데 중요한 부분에서 말아먹는 바람에...하지만 이후 행적들은 이미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먹튀.
  14. 황진성이 킬패스를 찔러줬고 일대일 찬스에서 골키퍼까지 제쳐진 완벽한 빈 골문을 두고 허공에 공을 찼다. 저게 들어갔으면 2:0으로 앞서가는 경기였고 후반 막판 골을 먹어도 2:1로 연장까지 갈 수 있었다.
  15. 그래도 리그 스탯만 놓고보면 정말 잘 했다. 후반기부터만 나와서 16경기동안 7골 3어시스트를 했다. 그 연봉에 시즌을 반 날려먹은것과 한가위 대보름 폭발슛의 임팩트가 너무 컸다. 그리고 그 후엔...
  16. 설기현의 집에선 생일을 음력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포항 선수진들이 열어준 파티는 양력이 기준이었다. 즉 본의 아니게 생일파티를 두 번 연 셈. 그래서 황선홍 감독은 음력 생일에 이미 선물을 주었기 때문에 선물을 주지 않았다고.
  17. 그러나 포항팬들은 배신자이긴 하지만 팀에 필요없는 배신자였기에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18. 다만 설기현이 해외에서 활동하던 시절 이상하게 실력에 비해 주전자리를 못 꿰찼었고, 울산에 간 후에도 주전 자리를 원하여 연봉을 절반으로 줄이기까지 하면서 인천으로 간 것을 생각하면 해외에서의 기억때문에 자신을 좀 더 존중해줄 수 있는 팀을 찾으러 다닌다는 의견도 있다.
  19. 인천에서는 최전방자리에서 뛰고 있다. 골 삽입보단 포스트플레이와 사이드로 빠진 후 자신의 장기인 크로스를 올려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20. 여러모로 볼거리가 많은 경기였는데 그 중 하나가 경기 시작 전 포항팬들이 철조망에 붙인 "설기현 선수에 대한 피해보상비 청구서(아래 짤방에 나온)"와 홈 경기 서산 개최에 따른 울산 팬들의 울산 구단 디스 현수막(...) 등등...("북패 남패에 이은 또하나의 패륜" 문구)
  21. 설기현이 1월생이라 팬들이 차려준 생일파티 직후에 곧바로 울산으로 튀어서 더욱 안습(...).
  22. 단순히 연봉 감소만이 불만의 원인이 아니었다. 전지 훈련에도 참가하고, 재계약할 것처럼 이야기 하더니 갑자기 인천으로 이적했기에 울산 팬들에게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 했다. 특히 포항 시절과 달리 울산에서는 스탯조차 좋지 못 했으니...이로 인해 포항과 울산에서 동시에 뛰고 두 팀에서 동시에 욕 먹는 선수가 되었다.
  23. 지도자 1급 자격증이 없어서 올해 내로 딴다고 했지만 감독 모집 공고에 지원도 하지 않았으면 지원 조건에도 맞지 않다.#
  24. 인천에는 통역이 없다. 그래서 영어를 잘 할 줄 아는 설기현이 통역을 맡았다고...
  25. 3월 7일 있었던 2015 시즌 K리그 클래식 개막전, 광주 FC와의 경기 중에 걸려있던 걸개들이다.
  26. 인천에서 설기현의 등번호가 9번이었다.
  27. 그나마 지난 시즌에 포텐을 터뜨린 진성욱이 있긴 하나, 아직은 한참 어린 선수이고, 여러 가지를 잘 하는 선수이긴 하나 체력적인 면에서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무작정 주전으로 쓰기도 애매하다. 실제로 지난 시즌엔 디오고와 계속해서 주전 경쟁을 해야 했다. 또한 부상으로 초반에 어쩔수없는 결장을 하는데 이럴경우 사실상 주전급 공격수는 케빈밖에 없다.
  28. 게다가 그 와중에 해외 연수까지 다녀왔다.
  29. 물론, 홍명보는 국가대표 코치를 자격에 맞지 않는 라이센스를 가지고 코치를 맡았기에 논란이 있었다.
  30. 물론 이 당시 지도자 자격증이 없어서 말썽이 있기는 했다. 1년 만에 따내기는 했지만.
  31. 이 당시 사우스게이트 감독이 코치들 커피 심부름하는 장면도 자주 보였다(...). 감독이 코치들 커피셔틀
  32. 결정적으로 미들스브로는 사우스게이트가 감독이 된 뒤, 유리몸 조나단 우드게이트를 임대하고 로베르트 후트를 영입해 사우스게이트의 포지션인 중앙 수비 보강에 성공했다. 후트야 말할 것도 없고, 우드게이트는 명불허전 레알 마드리드에서 부상을 달고 와 초반에 경기를 뛰지 못 했으나, 매우 좋은 활약을 보이며 결국 완전 영입 협상에도 성공했다. 이게 다 사우스게이트가 갑자기 은퇴한 것이 아니라 미리 은퇴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33. 김봉길 해임, 이임생 감독 임명 실패, 이석현을 매우 싼 값으로 FC 서울로 이적시킨 것 등등.
  34. 축구 해설가 서형욱이 대표로 있는 축구 언론으로 한 쪽에 치우친 논지의 칼럼을 자주 작성해 비난을 받았다.
  35. 공교롭게도 용인대 에이스 이현성은 인천에서 프로 데뷔를 하게 되었다.
  36. 사실 2002년 월드컵에서도 이탈리아전에서 동점골을 넣기 전까지 설기현은 이 때문에 엄청 까이고 있었다...미국전에서 완벽한 찬스를 세 번이나 날려먹고 포르투갈 전에서는 후반 막판에 1대1 찬스도 말아먹었다. 전체적으로 호평이 많았던 이 당시 한국팀에선 미국전에서 결정적인 찬스를 날린 최용수와 더불어 심하게 까임을 당했던 몇 안되던 선수. 물론 이탈리아전 골로 모든 게 용서됐지만.
  37. 이을용과 같은 강릉 상고(현 강릉 제일고)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