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타다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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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들고 카이젤 수염을 하고있는 좌측의 남성.

山本唯三郎(やまもと たださぶろう)
(1873.11.8~1927. 4.17)

전국시대의 무장은 진중의 사기를 드놉히기 위해 조선의 호랑이를 잡았지만, 다이쇼 시대의 우리는 특별히 나서서 일본의 영토에서 호랑이를 잡아왔습니다. 여기에도 깊고 긴 의미가 있겠습니다.

戦国の武将は陣中の士気を鼓舞せんが為めに朝鮮の虎を取りましたが、大正年代のわれわれは、わざわざ出掛けて行って申さば日本の版図内の虎を狩って戻りました。これにも深長な意味があると存じます
-야마모토 타다사부로. 다이쇼 6(1917)년 12월 20일 도쿄 제국호텔 대연회장에서 열린 호랑이 고기 시식회에서. 출처

1 개요

야마모토 타다사부로는 메이지 시대에서 다이쇼 시대에 걸쳐 활동한 일본제국사업가이며, 일제강점기한반도에 시행된 해수구제사업에서 1917년 11월 12일 부터 동년 12월 3일까지 '야마모토 정호군(山本征虎軍)' 을 조직해 한반도 내의 시베리아호랑이, 아무르표범 등의 사냥을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1873년 오카야마 현 구메(久米) 군 츠루타 번(鶴田, 현 오카야마 현 키타구)에서 츠루타 번의 인사인 사카사이 쇼세츠(坂斉正雪)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어렸을때 입양되어 두부장사를 하였으며, 10세의 나이에 일자리를 찾아 오사카로 가서 낮에는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밤에는 영어 학교에 다니는 등의 고학을 하였다. 16세 때에는 ​​형의 도움으로 시즈타니학교(閑谷学校)에 다닐 수 있었으나 형의 원조가 끊기어 도시샤대학을 중퇴하였고, 삿포로 농학교(札幌農学校)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삿포로 농학교를 졸업한 후, 지도 교사였던 니토 베이나 조(新渡戸稲造)의 후원을 받으며 홋카이도 이시카리 평야(石狩平野)에서 진행한 개척 사업이 성공하여 대지주가 되었다. 이후 약 10년간 홋카이도 개척 사업에 종사하던 중 중국석탄 판매 사업을 시작하고, 마츠마사 양행(松昌洋行)이라는 무역 상사를 설립해 석탄과 목재 무역에 종사하던 중 제 1차 세계대전의 개전에 선박 운송업을 강화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는데, 전성기의 자산이 약 4천만 엔이었다고한다

1916년, 타다사부로는 오카야마 현에서 열린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2.1 야마모토 정호군(山本征虎軍)

이 문단은 야마모토 정호군(으)로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1917년, 타다사부로는 "근래에 점점 퇴패하여 가는 우리 제국 청년의 사기를 드높히기 위하여 칠, 팔 만원의 큰돈을 들여 이 같이 장쾌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며 거금을 들여 원정대를 이끌고 한반도호랑이 사냥을 나섰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세간에는 그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선거에서 낙선한 것에 대한 분풀이를 하러가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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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이 타다사부로, 좌측은 조선인 포수인 최순원(崔順元).

하지만 그 목적이 어찌되었건, 타다사부로의 원정은 항일 의병의 결성을 막기위해 총기소지가 금지되어 맹수에 대처할 방법이 없던 조선인들의 환대를 받았다고 하며, 이들 정호군(征虎軍)을 이끈 이들도 최순원, 강용근, 이윤회등을 비롯한 이름난 조선인 포수들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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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정호군이 영흥역에서 사살한 아무르표범.

1917년 11월 12일에 부산항에 도착한 타다사부로는 당시 조선 총독하세가와 요시미치의 환대와 여러 조선인의 협조를 받으며 자신의 사냥대 150여명을 8개 반으로 나누어 함경도로 1~5반을, 전라도로 7,8반을, 6반을 금강산으로 보내 사냥을 하게 하여 한반도를 들쑤시는 사냥을 전개하였고, 동년 12월 3일, 알려진 것으로는 2마리의 시베리아호랑이를 포함한 여러마리의 아무르표범, , 멧돼지, 노루, 고라니등을 가지고 경성부로 돌아왔다.

12월 5일에는 정호군의 해산식을 겸하여 조선호텔에서 그들이 사냥한 호랑이를 비롯한 각종 동물의 시식회가 열렸다. 내빈으로는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 정무총감을 비롯한 고관들과 정호군 전원이 참석하였다고 하며, 호랑이는 대단히 특별한 식재로 취급되었는데, 그 냄새가 너무 심하여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더운 방에 하루를 두었다가 후추와 향료를 더하고 백포도주에 담근 뒤 버터로 삶는 과정을 거쳐 조리되었다고 한다.

이 시식회는 동년 12월 20일, 도쿄 제국호텔 대연회장에서 다시 열렸다. 여기에는 체신 대신, 농상무 대신, 육군 대장 등 정치계 요인 200여명이 참석하였다고 하며, 타다사부로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사냥에 대해 "전국시대의 무장은 진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조선의 호랑이를 잡았지만, 다이쇼 시대의 우리는 일본의 영토에서 호랑이를 잡았다."라 말하며 일제의 노골적인 야욕을 보였다 한다.

오늘날 이 행위에 대해 김영준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혜문 스님)는 “야마모토의 정호군의 호랑이 사냥은 악의적인 목적이 뚜렷하다”며 “단순히 강제로 호랑이를 잡아간 것을 넘어 조선을 무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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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도시샤 고등학교에 보관된 정호군이 사냥한 시베리아호랑이박제 중 하나.

타다사부로는 한반도에서 사냥한 동물의 박제와 골격등을 당시 황태자이던 히로히토와 도시샤 고등학교에 기증했다. 현재까지도 도시샤 고등학교에는 한마리의 성체와 새끼 시베리아호랑이, 한마리의 성체 아무르표범박제 및 여러 동물의 박제와 골격 표본이 있으며, 이들 표본을 국내로 반환받기위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이들 야마모토 정호군이 부산항에 도착한 1917년 11월 12일부터 동년 12월 10일, 도쿄역에 다시 도착하기까지의 활동은 타다사부로에 의해 정호기(征虎記)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간되었으며, 한국범보전기금이 한 권을 입수하는데 성공해 출판사 '에이도스'에 의해 출간된 한국어 번역본이 존재한다. 한국어 번역본 미리보기

2.2 최후

1916년 낙선한 이후 이전에 다녔던 도시샤대학에 8만엔, 오카야마 시립 도서관의 공사및 시설비로 1만 8000엔, 고향인 구메 군의 야마모토 실업학교 설립에 20만엔을 기부하는 등 사회 기부 사업에도 손을 댔으나 1920년 다시 나간 중의원 선거에서 낙선, 본업인 사업도 제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불황을 입어 순식간에 재산을 탕진하였으며, 1927년, 위경련으로 54세에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