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인

李壽仁(1941~2000)

대한민국의 전 교수, 정치인이다.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으로[1]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후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임하던 도중 1980년 해직되었다. 이후 해직교수협의회 회장을 역임하고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2] 창설을 주도했다.

1990년 11월 전라남도 함평군-영광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한다. 당시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는 호남에 아무 연고도 없는 영남 출신 이수인 교수를 공천한 것은 지역감정 해소, 동서화합을 위한 조치라고 이야기하였다.[3]

그러나 강남갑 지역구에 도전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중재에게 밀려 공천을 받지 못했다. 이후 정계를 은퇴한 김대중이 1995년 돌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민주당에 잔류,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3번을 배정받아 당선된다.

1년 반 뒤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으나, 성향 자체가 개혁적이다보니 한나라당 지도부의 지시를 어기고 김대중 정권이 추진하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합법화, 노사정위원회 법제화 등에 번번이 협조한 끝에[4] 1999년 10월 제명되었다.[5] 제명 당시의 발언이 상당히 주목할만하다. "나는 한나라당이 내린 결정을 영광의 훈장으로 생각한다. 당원 자격보다는 국회의원의 자격이 앞서고, 당과 국회의원의 이익보다는 국민의 이익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후 무소속으로 잔여 임기를 수행했다.

15대 국회 임기가 끝난지 열흘 남짓만인 2000년 6월 10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정계에서는 이미경처럼 새천년민주당 창당 때 당연히 참여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채 무소속 전국구 의원으로 남았던 것으로 보면 아마 병세가 생각보다 심각했던 듯.

형은 이수성국무총리이다. 그래서 이수성 국무총리 재임 시절인 1996년 국회 본회의 때 "어머님께서 며칠 전 형님을 곤란하게 할만한 질의를 하지 말라고 정치적 압력을 가해오신 것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웃픈 유머를 시전하기도.
  1. 인터뷰를 들어보면 사투리가 안 느껴지고 오히려 서울 토박이처럼 느껴진다. 아마 어릴 적에 고향을 떠난 듯.
  2. 약칭 민교협. 전국적인 개혁,진보 성향 교수들의 모임으로 2015년 현재까지도 활동이 이어져 오고 있다.
  3. 다만 이 부분은 당 안팎에서 잡음이 많았다. 일단 지역구 국회의원 자체가 해당 지역을 대표하는 자리인만큼 해당 지역을 어느 정도 잘 아는 사람이 공천되는게 바람직함에도 김대중 총재의 직권으로 쌩뚱맞게 영남 출신 후보가 공천되자 당내에서 이에 반발해 안평수 등이 무소속으로 출마하려는 움직임이 많았다.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비롯한 정계에서도 지나치게 작위적인 정치쇼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유세 과정에서는 그 동안 함평.영광 지역에서 투표할 권리도 없었던 사람이 출마하는건 말이 안된다는 비난도 받았고, 심지어 민주자유당 조기상 후보는 경상도 사람이 이 땅의 국회의원이 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라는 지역감정 유발 발언을 대놓고 했다.
  4. 당시 한나라당은 상임위 회의에서 전원 퇴장하여 의결 정족수 미달을 노렸지만 이수인, 이미경 의원 두 명이 자리를 지키면서 정상적으로 법안이 상정되었다. 참고로 이미경 의원 역시 민주당 출신으로, 이수인 의원보다 1순위가 빠른 2번에 공천되어 당선되었다.
  5. 앞서 언급한 이미경 의원도 이 때 함께 제명되었는데 애초 이수인 의원만 제명 예정이었으나 이미경 의원이 한나라당의 당론을 어기고 동티모르 파병안에 찬성하면서 함께 징계를 받았다. 당시 뉴스를 보면 전원 퇴장으로 텅 빈 한나라당 의석에 이미경 의원 혼자 앉아있고 동티모르 파병안에 찬성하는 의사진행 발언을 하자 여당 의원들이 박수를 치는 모습이 압권. 이미경 의원은 제명 이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여 비례대표 의원을 한 번더 지내고 17대 총선부터 열린우리당 등을 거쳐 현재는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으로 서울 은평갑에서 3선을 기록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