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밴 플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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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장군님 간지!

1 개요

James Alward Van Fleet (제임스 앨워드 밴 플리트)

1892년 3월 19일 ~ 1992년 9월 23일 (향년 100세)

미국군인으로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최종 계급은 미합중국 육군 대장.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전쟁 당시에 미8군 사령관직을 맡아 싸웠던 사례와 전후의 '코리아 소사이어티' 활동으로 유명하다.

2 생애

2.1 2차대전까지의 행적

뉴저지 주 코이테스빌 출신으로 1915년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나중에 미 육군 원수 계급을 달게 되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오마 브래들리와 동기였다. 미 육군 보병 장교로 임관하였으며, 당시 미군은 1차대전에 참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밴 플리트는 미국 유럽원정군의 장교로 해외파병되어 보병대대 대대장을 역임하였다.[1] 이후 전간기[2] 동안에는 특별한 행적이 남아있지 않다. 비록 이 시기에 두드러진 활약은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부임했던 모든 부대에서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훈련부대에 배치받았을 당시에는 1차 세계대전 이전에 기관총 소대를 지휘한 경험 덕분에 최신 화기와 장비로 무장하고 이동할 수 있는 병력의 가능성을 예견하였다.

2차대전을 맞아 미 육군이 본격적으로 유럽전선에 투입되면서 그는 제4보병사단의 8보병연대장으로 참전하여 1944년 6월 노르망디의 유타 해안에 상륙했다. 그런데 그는 유럽전선에서 나름대로 전공을 세웠는데도 동기에 비하면 진급이 늦었다. 밴 플리트가 보병 연대장에 임명된 것은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기 몇 달 전이었던 1941년 중반이었는데, 연대장 직책(+ 대령 계급)을 1944년 7월까지 지낸다. 이유는 하필 그가 미군 내에서 알코올 중독으로 악명이 자자했던 사람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종종 그 알코올 중독자로 오인당해 진급대상자 명단에서 누락되거나 명단에 올라도 진급이 거부되거나 심사에서 탈락하기 일쑤였다. 굉장히 억울했지만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었고 그저 안습.

동기였던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가 이미 1941년 시점에서 준장 계급을 달았던 것을 감안할 때 이러한 오해의 해프닝이 밴 플리트 장군의 군 경력에 치명적 타격을 준 것은 확실했다.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그는 연대장 보직을 조금 하다가 예편을 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한 후 아이젠하워나 브래들리와 같은 일부 동기들은 3성, 4성장군으로 진급했으며, 심지어 그의 몇 년 후배였던 인물들[3]이 먼저 장성으로 진급한 사례가 수두룩했다. 심지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사단의 동료 연대장 중 한 명은 그가 임관하고 10년 후에 임관한 후배였다.[4] 선배님이랑 같은 계급장 다니 좋지 말입니다?

나중에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조지 마셜 장군이 이 실수를 알게 되었고 이후 밴 플리트는 정상적으로 진급하기 시작한다. 44년 8월 1일 준장으로 진급하여 제2보병사단의 부사단장을 맡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90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한다. 벌지 전투 후반부에 그는 후방부대인 제23군단[5] 군단장으로 잠시 있었으며, 전쟁 말기에는 조지 S. 패튼 장군의 미 제3군에 소속된 군단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국내에 발간된 어느 전쟁사 서적을 보면 패튼과 버나드 로 몽고메리 영국군 원수가 마주보며 웃음짓고 있는데, 소장 계급장을 단 밴 플리트가 그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얼마나 불편했을까?

2.2 냉전 중의 활약

2.2.1 그리스에서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간의 이념 대립이 시작되고 유럽 각지에서 공산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자,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많은 유럽 우방국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였는데, 밴 플리트는 국무부 장관 마셜의 추천으로 1946년에 중장 승진과 함께 그리스의 미국 군사고문단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원래 그는 참모를 역임한 경험도 없고 정치 경험이 전무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리스 왕실과 국무부 장관 마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자신의 경험을 모두 쏟아부어 효과적으로 그리스 내전을 종식시키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다만 당시 그리스군의 상태가 막장이어서 초반에 고생을 좀 했다. 게다가 여러 가지 변수로 실패한 작전에 관해 그가 그리스군의 무능함을 탓한 경우가 종종 있어서 나중에 안 좋은 평을 듣기도 하였다.

미국 군사고문단장 재직 당시 그는 그리스군 총사령관이었던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원수와 상당히 돈독한 사이였는데, 신기하게도 파파고스 원수는 영어를 할 줄 몰랐고, 밴 플리트 장군은 그리스어를 할 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눈빛과 몸짓, 짧은 단어만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리스 사람들은 밴 플리트 장군이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했다고 한다.

2.2.2 한국에서

이후 미 제2군 사령관을 역임하다가, 1951년 4월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미8군을 지휘하게 되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그가 부임한 직후 대한민국 국군 최악의 흑역사 현리 전투가 발생했고 국군 제3군단은 밴 플리트 장군의 손에 해체당했다.

한국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밴 플리트 장군은 나름의 골칫거리를 안고 있었는데, 바로 공산군에게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있었다는 점이다. 유엔군은 확전을 피하기 위해서 중국과 소련의 영토는 공격하지 않았는데, 정작 공산군의 모든 전투력은 여기서 나오고 있었으므로 유엔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는 그리스 군사고문단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당시에는 그리스군만 이 문제로 머리를 쥐어뜯었을 뿐, 그리스 내전만 종식시키는 것이 임무였던 밴 플리트 장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무지막지한 물량공세에 맞서기 위해 밴 플리트 탄약량(Van Fleet Day of Fire)이라는 전술을 창안하기도 했다. 이것은 밴 플리트 포격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둘 다 종군기자들이 이 전술을 목격하고 붙인 명칭이었다.

1951년 5월에 벌어진 중국 인민지원군의 5차 공세 때 전선사수 명령과 함께 그가 택한 방식은 화력제압이었다. 바로 포병의 탄약통제보급율을 5배로 늘려 이른바 무제한 사격이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105mm 포는 300발, 155mm 포는 250발, 8인치 포는 200발, 175mm 포는 250발을 쏘며 중공군의 침공에 저항했는데, 이 강력한 화력으로 인하여 중공군의 5차 공세는 빠른 시일 내에 좌절되었고 중공군이 자랑하는 '보병을 이용한 산악 기동전' 역시 격퇴당했다. 이 '밴 플리트 탄약량'에 힘입어 미군은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모든 지역을 선점해 초토화했는데, 미군 조종사들이 공중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는 "더 이상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들 할 정도였다.

그런데 밴 플리트가 미군이 작전 시 규정한 탄약의 사용 한도를 5배나 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의회의 일부 의원이 그의 전적을 칭찬하기는커녕 그를 조사해서 의회에 출석시켜 질의를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밴 플리트가 탄약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해서 미국 납세자들의 세금을 낭비했다는 이유였는데, 밴 플리트는 이 소식을 듣고 빡쳐서 "의원들 보고 여기 와서 적군 시체랑 포로들 좀 보라고 해. 오지 않을 거라면 '밴 플리트 탄약량' 같은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해!"라고 일갈했다. 물론 그가 의회에 출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6]

아무튼 중공군의 5차 공세 이후 중공군이 자랑하는 보병을 이용한 기동전은 '밴 플리트 탄약량' 앞에서 그 빛을 잃어버렸으며, 한국전쟁 후반부에 치열하게 벌어졌던 고지전의 양상 자체가 쌍방이 서로를 향해 엄청난 포격을 가하는 대규모 포격전으로 바뀐 것도 이때 밴 플리트 장군이 펼친 화력공세의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밴 플리트 장군은 당시의 다른 미군 장교들처럼 공산군의 공세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한국군을 불신했으며, 한국군의 무기를 더 지원해달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도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대신에 그는 한국전쟁에서 연패를 거듭했던 한국군의 문제점을 "우수한 장교 인력 및 사단급 이상의 대규모 군사훈련의 부족"으로 보고 1951년 10월에 경상남도 진해육군사관학교 건물을 신축하여 한국군의 정예화를 꾀했다.

이후 밴 플리트 장군은 1953년 1월 말 미국 육군 제8군 사령관의 직위를 맥스웰 테일러 중장[7]에게 이임하고[8] 미국 본토로 돌아왔으며 2달 후인 3월에 38년간의 군생활을 끝으로 전역했다.

3 퇴역 이후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3월 31일에 군에서 퇴역했다. 밴 플리트는 1957년에 미국 최초의 한국 관련 비영리단체인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를 설립하였으며, 이후 미국과 한국 사이의 우호증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창설자 밴 플리트 장군을 기리는 의미에서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한미관계의 우호증진에 기여한 사람에게 '제임스 A. 밴 플리트 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는 1992년 플로리다 주 포크 시티에서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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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Alward “Jimmy” Van Fleet, Jr(1925 ~ 1952)

밴 플리트 장군의 외동아들인 제임스 A. 밴 플리트 주니어는 신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돕기 위해 미 공군 대위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가 1952년 4월에 전사했다.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B-26기를 조종하여 북한군의 야간 철도 보급을 공격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추락하여 유해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사례는 전선의 최고사령관인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편애하지 않고 전선에 내보내는 솔선수범의 사례로 자주 언급되곤 한다.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현이고, 미군이 어째서 세계 최고, 최강의 군대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런데 당시 공산군의 총수라고 할 수 있는 마오쩌둥 주석의 아들 마오안잉도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러시아어 통역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으며, 마오안잉도 당시 신혼이었음에도 참전했기 때문에 양군 사이에 묘한 공통점이 생긴 셈이다.

2016년 6월 25일 KBS1에서 방영하는 KBS 스페셜에서 6.25전쟁 특집으로 '장군과 아들'이란 주제를 다루는데 이들 부자의 이야기이다.
  1. 비록 전시진급이었지만 중령까지 승진한다. 종전후 대위로 원복.
  2. 戰間期. 제1차 세계대전 종결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의 기간을 이르는 말.
  3. 예를 들면 그 유명한 마크 클라크, 매듀 리지웨이, 조세프 로턴 콜린스(1949-1953 미육군 참모총장)는 1917년 웨스트포인트 졸업생들이다. 이들 모두는 1941-1942년에 장성으로 진급했고 한국전쟁 시점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밴플리트의 상관들(+ 상위직위: 전구사령관, 참모총장)이었다.
  4. 출처는 밴 플리트 장군의 자서전.
  5. 당시 영국에 주둔했던 군단급 지원부대로 전투부대가 아닌 다수의 전투지원(대공포,훈련부대)과 병참부대가 편제되었다. 최전선의 환경에 익숙했던 밴 플리트 장군은 잠시 동안의 이 생활에서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군단의 많은 기간장병들이 전상으로 인해 최전선 복무의 불가능함(?)을 이해한다.
  6. 출처는 왕수쩡의 <한국전쟁>.
  7.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나오는 101 공수사단의 사단장으로 1953년 시점에선 중장계급, 휴전협정이 조인될때 대장으로 진급했다.
  8. 자서전의 내용으로는 근속정년이 완료됨에 따라 본래 53년 1월에 전역할 것으로 예정되서 52년 후반기에 이임할 것이라 예고되었지만 마무리 준비를 위해 2개월 연기된 것이라 했다. 하지만 현재와 과거의 여러가지 사례로 볼 때 미군/한국군의 중장급 이상 장성들은 복합적인 이유로 군인 인사관련법에 규정된 정년복무에 크게 제한받지는 않으며, 조건이 맞으면 40년 이상도 근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단적인 예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 육군 제6군을 지휘했던 월터 크루거 대장은 독일계 이민자 출신 사병출신 장성으로 미서전쟁 때인 1898년을 시작으로 1900년대에 장교로 임관했고 1차대전과 2차대전을 모두 해외파병으로 겪었으며 2차대전 전후인 1946년 초에 전역했다(48년 근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