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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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민주자유당
민주당
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무소속
149석97석31석1석21석

1 개요

1992년 3월 24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71.9%를 기록했다. 의원 정수는 299명으로 13대 총선과 같았지만 지역구 의원이 13명 늘어났고 반대로 전국구 의원수는 13명이 줄어들었다. 이 선거에 민주자유당, 민주당, 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민중당, 공명민주당이 참여했으며 지금과는 달리 1인 1표제로 전국구 의석은 지역구에서 각 정당의 의석율을 기준으로 배분했다.

2 과정

1991년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은 물가상승과 부정부패, 당내갈등으로 지지율이 저조했음에도 3당합당으로 이뤄낸 탄탄한 지역기반, 야권분열과 투표율 저조 등의 이유로 과반을 훨씬 넘는 압승을 거두었다(564/868). 덕분에 당초에는 14대 총선에서도 여당이 압승을 거둘걸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민주자유당은 공천과정에서 잡음이 불거지고 계파간 갈등이 심해지면서 탈락한 후보들이 통일국민당무소속으로 출마하는 등의 혼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국가안전기획부가 무소속 후보들에게 압력을 가해 출마를 포기시킬려고했다는 의혹이 나돌기도 했다.

반면 광역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신민주연합당꼬마민주당은 광역의원 선거 참패의 원인이 분열 때문이었다고 진단하고 민주당으로 합당을 하여 통합야당을 구성하였다. 그 외에도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이 노태우 정권 타도, 반값 아파트, 전향적인 통일 정책을 내세우며 바람몰이를 했고, 박찬종이 창당한 신정치개혁당과 혁신(진보)정당인 민중당도 후보를 내며 선거전에 끼어들었다. 어쨌든 여느선거와 다름없이 치열하게 선거전이 펼쳐졌으나...

선거를 얼마 남기지 않고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대놓고 흑색 선전 유인물을 날린 사건이 일어났고 선거 이틀전 날에 이지문 중위에 의해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이 폭로되면서 선거판세는 민자당에게 상당히 불리해졌다. 그리고 이 사건의 여파인지 총선은 당일 70%를 넘는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 투표율은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보다 낮았지만 광역의원 선거에서의 투표율보다는 크게 높아진 수치였다.

다만 민자당 내부에서는 그래도 과반은 확보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1] 물론 대외적으로는 과반을 못넘을 것이라고 엄살작전을 펼쳤지만...그런데 그 엄살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3 결과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자유당민주당통일국민당신정치개혁당무소속합계
서울162521044
인천510017
경기18850031
강원8040214
대전120025
충남7140214
충북612009
광주060006
전남01900019
전북21200014
부산15000116
경남16030423
대구8020111
경북14020521
제주000033
지역구1167524121237
전국구33(38.5%)22(29.2%)7(17.3%)0(1.8%)0(13.1%)62
총합1499731121299

3.1 분석

개표 초반에는 민주자유당이 충분히 과반을 확보할 것 같았고, 반대로 민주당과 통일국민당은 별 힘을 못쓰고 참패할 듯 보였으나...개표 중반을 넘으면서 판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민주자유당은 과반수에 한석 모자라는 149석을 확보해 참패하고 말았다. 숫자로만 보면 참패까진 아닌 것 같지만 이전 3당 합당으로 무려 200석을 훌쩍 넘기는 의석을 확보했던 민자당으로선 수십석을 잃은 그야말로 대참패인 셈. 특히 국가안전기획부의 흑색 선전에 중산층이 등을 돌리면서 강남3구 6개 선거구 중 5곳을 야권이 가져가는 완승을 거두게 된다.

한편 민주당은 97석을 확보하여 사실상의 개헌저지선을 확보하는 등 그런대로 선전했고, 통일국민당은 31석을 확보하며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 반면 신정치개혁당민중당은 청년층에게 상당한 인기몰이를 했으나 신정치개혁당은 1석 확보에 그쳤고, 민중당은 의석(득표율은 1.5%)을 확보하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이는 지금과는 달리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원을 따로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200석도 훌쩍 넘기던 초거대여당 민자당이 야당에게 129석, 무소속에게 21석이나 내줬다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 선거의 영향으로 안그래도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던 노태우 정권은 더 레임덕 현상이 가속화되었고, 사실상 선거판을 주도한 김영삼은 민정계 등 민자당내 타 계파로부터 책임론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김대중은 체면치레를 하며 대권주자 자리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정주영은 일약 유력 제3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김영삼은 위기가 기회다 오히려 선거의 책임을 자신에게 비협조적이었던 노태우 정권과 민정계에 물려 당권을 장악했고, 그해 겨울 치러진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선거에서 승리하며 기어코 대통령에 당선된다.

한편 신정당은 박찬종의 깨끗한 이미지를 내세워 1992년 14대 대선에서 6%의 득표율을 확보하며 선전했으나, 해산된 민중당 출신으로써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한 백기완은 저조한 득표력을 보이면서 나중에 일부 민중당 당직자들이 보수정당으로 입당하는 계기를 마련했다.[2] 결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1997년 국민승리21(민주노동당의 전신)이 구성될 때까지 5년간 진보정당은 재건되지 못했다.

참고로 개표방송을 보고 싶다면 국립중앙도서관에 가보자

3.2 박빙의 투표

3.24 총선 당시 서울특별시 노원구을은 개표 결과 민주자유당 김용채 후보가 민주당 임채정 후보에 36표차로 승리하며 당선되었다. 그런데 재검표 요청이 이뤄졌고, 재검표 결과 당락이 뒤집히는 사태가 발생한다. 같은 해 7월 20일에 서울지법 북부지원에서 실시된 재검표에서 임채정 후보의 표 98표가 김용채 후보의 표로 잘못 계산된 것이 확인되면서, 선거 결과가 뒤집어진 것. 그에 따라 김용채 의원은 임기 시작 50일 만에 의원직을 상실하는 동시에, 당시 맡고 있던 정무1장관직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안습

경상남도 울산시(광역시 승격 이전) 중구에서는 통일국민당 차화준 후보가 50,138(39.296%)표를 득표하며 민주자유당 김태호 후보의 50,127(39.287%)표를 불과 0.01%인 11표(정확히는 0.0086%) 차로 이겼다. 차화준 후보는 이후 대선 패배에 따라 무소속 탈당했다가 다시 민자당으로 입당했는데, 이분이 정작 유명해진 건 틀니 동영상(...) 때문이다.# 한편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4차례 콩라인을 기록한 송철호 후보는 이번엔 민주당 소속으로 울산에 출마했지만 선거 결과 2만표가 채 안되는 15.42%를 득표하며 낙선하고 만다. 참고로 당시 경남 울산은 중구, 남구, 동구 3개 선거구 모두 통일국민당이 승리했다(차화준/차수명/정몽준 당선자).
  1. 당시 민자당은 자체 조사에 의거해 우세지역 112곳, 백중지역 60곳 정도로 판세를 예측했다고 한다(1992.3.24 동아일보). 그렇기에 개표 초반까지는 과반은 거뜬히 넘지 않겠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고. 하지만 개표 중후반에 접어들며 백중세로 예측했던 지역구 대부분이 패하는걸로 나오며 망했어요.
  2. 이 때 입당한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이재오, 김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