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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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1]
날짜1937년 7월 7일 ~ 1945년 9월 3일[2]
장소중국 전역
이유일본 제국의 중국 대륙 침략 야욕
교전국 중화민국
중국 공산당[3]

지원국
대영제국[4](1939-)
미국[5](1941-)
소련(1937-1941[6], 1945[7])
나치 독일(?!)[8](1933-1938)
일본 제국

지원국
만주국
몽강자치연합정부
지휘관 장제스
허잉친
옌시산
리쭝런
바이충시
천청
마오쩌둥
조지프 스틸웰
앨버트 웨드마이어
히로히토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오카무라 야스지
무다구치 렌야 아이고
하타 슌로쿠
마쓰이 이와네
우메즈 요시지로
아이신기오로 푸이
데므치그돈로브
결과중화민국의 승리
영향만주, 타이완 일대가 중화민국으로 귀속됨
세력을 확장한 중국 공산당이 중화민국과의 내전에 돌입함
병력약 1400만 명[9]410만 명
피해규모사상 : 380~1060만명[10]
사망: 100만 명 이상[11][12]
부상 : 1.172,200명
민간인 사망17,000,000-35,000,000[13]

1 개요

전쟁이 끝나고도 두나라는 계속 싸우고있다

"평화가 절망적이지 않을때 결코 평화를 포기하지 않으며 최후 운명의 갈림길이 아니라면 가벼이 희생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진실로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에 이른다면 우리 전 민족에게는 당연히 희생과 항전만이 있을 뿐이다." - 장제스[14]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중화민국(이하 중국)[15][16]일본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만주사변)의 연장선상에 있는 전쟁이며,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역 중 하나이다.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전쟁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어로는 Sino-Japanese War.[17] 중국에서는 중국항일전쟁(中國抗日戰爭) 혹은 간단히 항일전쟁이라고 부른다.[18]

이 전쟁은 흔히 무능했던 중국군일본군이 일방적으로 털고 또 중국군은 그냥 자신들의 역량 부족으로 인해 더 이상 전진 못하는 것을 미국이 원자폭탄 떨어뜨려 일본을 제대로 폐허로 만들어 끝난 전쟁 정도로 인식되어 왔으나 실증적, 수정주의적 재평가로 인하여 점차 개선되고 있다. 이러한 저평가는 독소전쟁에서 소련군이 저평가받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인데 중일전쟁은 그보다도 더 심하다. 러시아야 전후 서방 진영과 냉전을 벌였던 게 원인이었고 냉전 종식 후 재평가가 이뤄졌지만, 중화민국은 전후 국공내전에서 패해 본토에서 밀려나 버리고 중국 공산당의 사관이 주류가 되어 중국 국민당을 저평가하며 이것이 외국까지 퍼지면서 재평가가 굉장히 늦었다. 더군다나 일본마저 중일전쟁을 자국이 이겼다고 정신승리를 시전한 것은 덤.[19]

그러나 중국은 소련과 달리 공업화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기대여법의 이득조차 거의 보지 못한 채 자력으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야만 했다. 심지어 인구가 4억 8천만에 달했음에도 이 인구 중에서 2% 정도밖에 사용하지 못했고 대영제국이 300억 달러, 소련이 100억 달러 정도의 차관을 받았음에도 중국이 받은 차관은 겨우 10억 달러에 불과했다. 남아 있던 대여분도 대부분이 영국령 버마 전선과 주중 미국 육군 항공대를 위해 소모되었다. 미국 측 일부 인사는 장제스 부부의 특성[20]에 중국에 대한 관심을 주긴 했으나 대부분 중국 전선에 대해서 큰 관심을 주지 않았고 유럽 전선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에 우호적이었던 루즈벨트조차 대중국 전선에 큰 관심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중국군을 동남아 전선에서 소모하고 공산당과의 무리한 합작을 강요하였으며 전후 개입에서는 아무런 조사도 없이 연합정부를 구성하라 해 놓고 국공내전의 패배 이후에 그 책임을 국민당에게 전가하는 행동을 하였다. 물론 비공식적으론 필리핀을 통해 중국을 돕고 있었고, 영국도 홍콩. 프랑스베트남을 통해 중국을 몰래 도왔다. 이에 뚜껑 열린 일본이 1941년 동시다발 공격으로 홍콩과 필리핀을 점령하려 하고, 극소수의 영국 해군캐나다군, 미합중국 해병대가 지키던 두 섬은 간단히 나가 떨어지고 더글라스 맥아더호주로 도망가게 된다.

그러나 중국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일본군 사망자 200만 명 중 절반을 담당했으며 일본 정부의 군 예산 소모 역시 43년 중반 이전까지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21] 이러한 소모가 무기대여법의 이득을 거의 보지 못한 상황에서 순수한 자력으로 만들어 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파멸시킨 직접적 원인은 미국에 있지만 그 이면에는 수천만명의 죽음과 (간접적 피해까지 합쳐) 6천억 달러의 피해를 감당하면서 8년 간의 장기 항전을 수행한 중국의 공로가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전개

중일전쟁/전개 문서 참조.

3 전후 처리

8년간의 항전은 양국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우리 양국 형제들은 머리를 싸받고 비통하게 울어야한다. 오늘 우리는 무기를 버리고 여러분을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언젠가는 우리는 양손에 옥과 수놓은 비단을 들고 당신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할 것이다.

탕언보

8월 27일 난징에 국민정부군 병사 1백명과 탕언보 장군이 탄 비행기가 착륙했다. 이어 국민정부군 부대들이 속속 도착했다. 9월 8일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총참모장 허잉친이 난징에 도착, 난징의 중앙군관학교 강당에서 오카무라 야스지의 항복을 받아냈다. 중국, 타이완, 북베트남에 주둔한 전 일본군과 일본인은 이제 국민당에게 접수되었는데 그 수가 군인 105만을 합쳐 311만에 달했다. 미군의 협조를 얻어 이들을 일본에 송환하기 시작했지만 1946년 12월 일본 정부의 송환 완료 발표에도 불구하고 그 중 돌아온 사람은 100만에 지나지 않았고 향후 1980년대까지 송환 문제가 거론되었으며 귀환한 일본인들은 본토에서 차별을 당했다. 이들을 히키아게샤라 한다.

8년간의 전쟁에서 중국은 공식적으로 321만명의 군인 사상자와 913만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내었다. 이후 학계의 추가연구 결과 최소 2천만명을 상회하는 민간인이 사망한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2015년 종전 70주년 행사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시진핑은 3500만명이 사망했다고 언급했으며 중화민국 총통 마잉주는 2300만명이 사망했다고 언급했다. 또한 전쟁손실 및 비용만 559억 달러가 들었고. 일본 역시 공식적으로 47만이 넘는 병사들이 전사했다고 발표했는데 실제 숫자는 이를 훨씬 상회할 것으로 보인다. 허잉친은 일본군 사상자가 241만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11만명의 미군이 중국에 상륙했으며 국민정부군은 서둘러 점령지를 탈환했으나 너무도 갑작스러운 승리는 웨드마이어의 경고대로 대혼란을 초래했다. 이는 미국이 중국에 정보 공유를 하지 않아 중국이 자신들의 승리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컸지만 전근대적인 중국의 행정력과 부패 자체도 문제였다. 국민당은 점령지의 질서 유지를 위해 한동안 한간들을 일시 등용했는데 이후 장제스가 고위 한간들의 대부분을 총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국민당이 한간들과 결탁했다는 악의적 선전이 곳곳에서 나돌게 된다. 일본인의 재산, 즉 적산가옥 등은 국고가 아닌 개인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일이 많았고 전쟁 종료 이후 다시 촉발된 초인플레이션은 중국의 경제와 민심을 크게 동요시켜 향후 국민당이 국공내전에서 패배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특히 타이완에서 국민당이 현지 주민들과 충돌한 2.28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낳았으며 오늘날까지 장제스와 국민당의 암적인 역사로 남게 된다.

한편 세력을 백만으로 키운 공산당은 국민당에 복종하겠다는 맹세를 걷어차고 황하 이북의 영토를 통제하려 시도했다. 곳곳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충돌하기 시작했고 장제스는 중국 중공업의 90%를 차지하는 공업지역인 만주를 확보할 것을 명령했지만 중국의 부실한 병참능력으로 인하여 애로사항이 꽃피었다. 웨드마이어는 만리장성 이남의 교통망과 통신망을 먼저 회복하고 만주는 미영소 3국 신탁통치를 맡긴 다음에 나중에 찾으라고 제안했지만 장제스는 이를 또 다시 만주를 외세에 넘기는 행위라고 거부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충칭에 있던 반면 공산당은 진작부터 화북, 만주에 지하조직을 침투시켜 민심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중심지가 옌안인터라 훨씬 만주에 접근하기 용이했다. 결국 공산당은 만주의 90%를 장악했다. 장제스는 쑨리런 산하의 신1군을 만주에 파견했으나 병참능력의 부족과 소련의 비협조로 일부 대도시만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소련은 여기서 막대한 일본군 무기를 노획하여 이것으로 린뱌오의 동북인민자치군을 무장시켰는데 실제로 린뱌오는 국공내전 발발 이후 만주의 요양-심양 회전에서 국민당군을 크게 격파한다.

결국 전쟁이 끝난지 불과 1년도 지나지않아 국공내전이 발발했고 중일전쟁에서 크게 타격을 입은 국민당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할 겨를도 없이 다시 전국구 규모의 내전에 돌입했다가 허망하게 패배하여 대만으로 밀려나게 된다.

4 중일전쟁 관련 편견에 대한 고찰과 반박

5 역사에서의 비중

중국의 대일 전쟁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항전을 계속해낸 인민, 정부의 업적이며, 이 전쟁에서 중국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던 세계 각국의 외교관과 언론인들이 틀렸음을 증명해냈다.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 중국은 4년 동안 사실상 홀로 일본과 맞서 싸웠고, 가난한 개발도상국의 군대는 세계적인 고도 산업국가의 80만 대병력을 저지했다. 연합군이 유럽과 아시아의 두 전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후 4년 동안에도 중국이 계속 전선을 유지해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 라나 미터(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 중국연구센터 주임)의 2013년도 저서 <중국, 잊혀진 동맹>(Forgotten Ally: China’s World War II, 1937-1945) 중에서

비슷한 시기에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져 유럽에서도 전쟁이 일어나고 태평양에서도 전쟁이 크게 일어난 탓, 그리고 전쟁기간의 거의 대부분을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탱커 샌드백 신세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중일전쟁은 상대적으로 역사에서 큰 비중을 갖지 못했다. 심지어 전쟁역사를 연구할 때도 잊혀질 수준인데, 1980년대에 나온 타임라이프사의 제2차 세계대전사의 경우는 아예 중일전쟁을 2차 대전의 배경중 하나로 간주해 중국 - 버마 - 인도 전역만을 다루고 있고 충칭 대공습과 대륙타통 작전을 제외하고는 버마 전선만 다루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기본적인 사료가 그렇게 빈약하지는 않으나 객관성의 문제가 있어서 검증이 어려운 탓이 크다. 일단 일본군의 1차 자료는 부정확한데다가 자화자찬이 많고, 중국군의 경우에는 중화민국측 자료는 양은 많으나 대만 밖을 나가질 못했는데다가 국공내전의 승자인 중화인민공화국의 목소리에 묻혀버렸고[22]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중일전쟁 극초기와 백단대전을 빼면 거의 싸우지 않았는데도 집권 정당성을 위해 이를 숨기고 전쟁의 주역 국민당 정권을 깔아뭉갰다는 근본적 문제가 있으며 공산주의 국가 특유의 과장성으로 인해 사료에 기재된 전황의 정확성에 문제가 많으며 상당 부분 난징학살이나 기타 일본군의 만행 고발에 치중한다. 90년대 이후론 유격전과 전면전을 분리해 국민당의 역할도 조명했으나 장제스 비하 등이 사라지는덴 시간이 걸렸다.

미국 등 기타 연합군의 자료는 애초에 버마 전선이나 대륙타통작전 정도만 빼면 관심도 없고[23] 스틸웰과 장제스의 불화에 집중했는데다가 당시 미국의 중국통이 패트릭 헐리나 앨버트 웨드마이어, 조지프 앨솝 정도만 빼면 마오빠가 되어서 국민당 정권 비난 일색에다가 역시 제3자라 자료가 적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의외로 일본에서 전후에 발간된 자료들이 어느 정도 신빙성 있을 정도이다.[24] 난징 부정론자들은 예외 게다가 전투가 크게 벌어지고 사상자도 많은데 실제 전쟁에 끼친 영향이 거의 없다는 인식 또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일본이 중국을 치지 않았으면 태평양 전쟁은 아예 발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중국을 이길 꿈에 가득 차 있었으나,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구와 크기를 자랑하는 중국은 끝까지 버티면서 일본에 맞섰고 일본은 결국 이 수렁에 빠져 피해가 커지자 더욱 군국주의를 밀어붙이고, 손해를 메꾸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치기로 결정, 본격적으로 미국과 마찰이 일어난다. 중일전쟁이 없었다면 이후 동아시아 역사는 매우 크게 달라졌을게 뻔하기에아시아권에서는 매우 중요한 전쟁 중 하나이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의 경과에도 아주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일본 육군이 개입된 전장의 경우 알게 모르게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일본군,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중일전쟁은 일본 육군이 주도하여 일으킨 전쟁이고, 태평양 전쟁은 일본 해군이 주도한 전쟁이다. 당연히 일본 육군의 주 관심은 중국, 만주 일대였지, 듣도 보도 못한 저~어기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태평양 전쟁 초, 중반에 지상군 병력을 필요로 하는 전장에 대해 일본 육군은 그다지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태평양 방면의 병력 파견 규모도 작전 구역의 면적을 생각해 보면 중국과 만주에 투입한 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당장 과달카날 전투의 진행 경과만 봐도 이러한 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때문에 태평양 전쟁 개전 직후를 제외하고 연합군 지상군과 맞붙은 전장에서 일본군의 지상병력이 연합군 지상병력을 능가한 적은 없었으며[25],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에서의 지상전 양상은 대부분 '밀어붙이는 연합군(사실상 미군) vs 밀리는 일본군'이라는 구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상전의 패배는 그 일대의 제해권, 제공권 영구 상실[26]로 이어지면서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지는데 한몫 하였다. 그리고 상술한 바와 같이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투들 중 일부는 중국 전역의 경과에 적게나마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을 폴란드 침공이 아닌 중일전쟁 발발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2000년대 들어서 나오고 있다. [27] 하지만 중일전쟁이 국제적으로 번져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2차대전과 중일전쟁은 별개의 전쟁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참고로 이 중일전쟁 덕분에 일본은 1940년 동계(삿포로) 올림픽/ 1944년 하계(도쿄) 올림픽 개최권을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자업자득이지만. 두 곳 모두 나중에 다시 개최(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32년 뒤), 1964 도쿄 올림픽(20년 뒤))하기는 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중화민국은 주요 승전국이 되어 UN 상임이사국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전후 국공내전이 발발하여 중화민국은 타이완으로 이동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며 극동 질서를 담당할 상임이사국, 즉 정통 중국이 누구냐에 대한 대립이 생기게 되었고 결국 1971년 중화민국이 자진 탈퇴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그 권리를 확보하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이 일본에게 승리하긴 했지만 일본이 저지른 마루타 생체실험, 난징대학살 등의 전쟁범죄로 인해 현재까지도 중국과 일본의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

6 여담

일본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침공해왔는데 이는 루거우차오 사건이 확대되어 교전이 발생했다는 일본측 시각에 의한 것으로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중사변' 또는 '지나사변'으로 낮추어 부르기도 했다.[28] 이렇게 명칭을 낮춘 이유는 꽤 여러가지 추론이 있다. 당시 1차대전 이후로 전쟁이 국제법상 금지되었기에 "나 전쟁 안했소" 하여 국제적 추궁과 국내의 국민의 신뢰추락을 피하고 싶었던 것 등이 있다. 결국엔 눈가리고 아웅하려고 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버릇은 계속 유지되어 할힌골 전투를 노몬한 사건으로 축소했다.

여기서 일본이 나중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다. 일단 선전포고 문제는 의외로 나라 간의 이해타산이 엮여들어간 문제였다. 전쟁내 중국은 선전포고를 안했다는 것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초기에는 일본이 하더라도 선전포고로서 받아들이지 말아달라고 미국에 타진하기도 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었던게 미국의 중립법이었는데, 국내 기업이 전쟁을 벌이는 쌍방과 경제적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법률이었다. 따라서 선전포고가 공식으로 받아들여져 공식전쟁이 되면 중국은 미국에게 물자원조를 전혀 받을 수 없고, 오히려 몰래하려다가 일본에게 나포당할 수도 있으며 미국이 이 나포문제와 한창 노리고 있던 중국과의 경제교류를 통한 이득에 손해를 볼 것 같다는 이유 등으로 피해가 우려되어 껄끄러워 했고 일본도 당시 경제의 태반을 미국에 의지하던 상황에서 미국과의 경제교류가 전쟁기간 동안 정지되던 상황이었다. 전후는 어쨌든 전쟁시작시에는 공식적 전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일본의 침공군 중 고참급 인사들은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던 부류가 꽤 많아 비선전포고파와 아웅다웅했는데, 경제문제 따위가 뭔 상관이냐며 경시하는 시각과 함께 선전포고를 하는 편이 전후 패전국에게서 영토와 물자를 더 뜯어내고 점령시의 절차가 간단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비선전포고파의 경우는 손해없이 이득을 끌어내자, 즉 어떤 방식으로 중국을 침략하는가에 대한 방법론 문제였다.

그러나 이런 일본의 변명을 100% 인정해주더라도 엄연하게 선전포고를 하지도 않고 기습적으로 개전한 것은 변명할 수 없는 만행이다. 특히 이 변명에서 중국이 선전포고에 관련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랍시고 대는데, 범죄자들이 흔히 하는 변명중 하나다. 피해자가 이론을 제기하던 안하건 간에 범죄로 엄연하게 성립되는 내용을 가지고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이니 감안할 이유 따위는 전혀 없다. 덤으로 일본은 앞서 언급했듯이 선전포고 안하고 기습을 해서 개전하는 것을 당연시여기는 녀석들인데다가 그렇게까지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다면 나중에라도 하면 되는데 끝까지 안했으니... 당장 선전포고가 정당하게 전쟁하니 타국은 교전국의 뒤통수를 치지마시오에 가깝기 때문에 선전포고를 안하면 다른 국가들도 이를 본받아서 똑같이 교전국의 뒤통수를 때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기만 해도 일본의 변명이 말같지도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중일전쟁 초기인 1938년 5월에는 중국 공군이 일본 본토 공격감행한 적이 있다. 중국 공군의 소련제 SB-2 폭격기 2대가 일본 큐슈구마모토 상공까지 온 것. 이 때 중국군 폭격기가 투하한 것은 폭탄이 아니라 일본군의 만행을 비난하는 선전물(삐라)들이었다(...). 작전을 수행한 폭격기들은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고 무사히 귀환했다. 작전으로 인한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고 이후에도 중국 공군은 더 이상의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 작전을 시행하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의 대공 방어 체계가 엉망이었다는 것이다. 일본군 수뇌부는 이 사건을 단순 해프닝으로만 생각하고 대공 방어의 증강 등 대응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던 것. 그리고는 나중에 미국에게 신나게 얻어터졌지 나중에 중일 항공전에 관한 자세한 항목이 생길 예정.

6.1 70년 후

전승절(중국) 항목 참조.

7 참고문헌

중일전쟁과 그 하위문서들은 다음과 같은 저서, 논문들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 중일전쟁(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권성욱, 미지북스(2015) - 사실상 이 항목 대부분의 출처를 이 책이 차지하고 있다. 그 중 일부는 거의 요약하다시피한 부분도 있는지라 차후에 출처 추가 및 일부 문맥 수정 작업이 있을 예정이다. 본 위키 내용보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일독을 추천한다(914쪽에 달하는 무겁고 두꺼운 양장본 책이라는 점만 빼면 현재까지 나온 중일전쟁과 관련된 국내 저서 중에서는 입문용으로 가장 적합한 책이다).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2014)
  • 역사는 누구 편에 서는가(난징의 강간), 아이리스 장, 미다스북스(2014)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2012)
  • 중국근현대사 3 (1925-1945, 혁명과 내셔널리즘), 이시카와 요시히로 저, 삼천리(2013)
  • 중국의 당과 국가(정치체제의 궤적), 니시마루 시게오, 고쿠분 료세이 저, 한울(2012)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저, 푸른역사(2009)
  • 웨드마이어 회고록과 논평, 이종학 저, 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2014)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기세찬, 경인문화사(2013)
  • 쇼와 육군, 호사카 마사야스, 글항아리(2016)
  • 쇼와사 1 전전편, 한도 가즈토시, 루비박스(2010)
  •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리처드 번스타인, 책과함께(2016)
  • 다큐멘터리 중국 근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2014)

8 중일전쟁 관련 문서

8.1 배경 관련

8.2 전투, 사건

8.3 인물

8.3.1 중화민국

8.3.2 중국 공산당

8.3.3 일본 제국

8.4 관련 단체

9 중일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매체

9.1 영화

  • 색계(미국, 홍콩 합작)
  • 존 라베(중국, 독일, 프랑스 합작)
  • 난징! 난징!(중국)
  • 흑태양 시리즈(중국) 4편
  • 황시(중국, 호주, 독일 합작)
  • 금릉십삼채(중국)
  • 백단대전(중국): 2015년 8월 23일에 개봉한 전승 70주년 기념 영화.
  • 첩혈고성(중국) 전투신 일부
  • 귀신이 온다(중국)
  • 플라잉 타이거즈(미국)
  • 진주만(미국): 막판에 중국 전선과 중국군이 일부 등장한다.
  • 붉은 수수밭

9.2 드라마

중국에서는 당연히 드라마로도 상당히 자주 다루지만... 문제는 같은 중일전쟁을 우려먹으면서 시청률을 잡으려다 보니 항일신극(抗日神剧)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을 정도의 초 막장 드라마양판소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거다(...). 내팽개친 고증+순국선열 고인드립+무협 판타지 전개+나라망신 콤보. 중국 드라마 참조.

9.3 게임

  1. 위키백과에선 태평양 전쟁의 일부로도 분류하기도 한다.
  2. 이날 난징에서 중국군은 만주를 제외한(이 지역은 소련이 담당했다.) 전 지나주둔군과 인도차이나 방면 남방총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3. 국공합작으로 국민정부 전복을 위한 무장투쟁을 중단하고 대일항전에 가세.
  4. 차관 제공과 태평양 전쟁 당시의 공동전선
  5. 차관 지원과 태평양 전쟁 당시의 공동전선
  6. 차관과 군수물자 지원 및 불가침조약 체결
  7. 만주작전으로 관동군과 만주국을 붕괴시킴.
  8. 공산당 파괴를 위한 군수물자, 고문관 및 군수산업 건설을 위한 대규모의 차관건설및 무기 제공
  9. 기존의 560만 명 가량이라는 수치는 출처에 따르면, 1945년 당시의 국민당 병력 규모만을 뜻한다. 이와 별개로 1945년 당시 공산당은 120만 상당의 병력을 보유했으며, 일본군은 1945년 당시의 관내의 병력만 따지면 100만여 명 정도 된다. 만주, 본토, 태평양 사정이 안 좋으니.
  10. 출처는 [1]
  11. 자세한 정보는 당시 일본군의 사병에 대한 관심 부족과 전후 문서 소각으로 알기가 힘들다. 특히 기존에는 40만 명 안팎이라는 일본군 후생성의 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했으나 관련 자료의 부족과 지나치게 많은 실종자 수로 인해서 재검토가 필요하다. 참고로 참모총장 허잉친은 일본군의 사상자가 실종자와 부상자를 합쳐서 241만 8천명이라고 주장했고, 현대 중국 학계는 105만 명 정도를 사망자로 추론하고 있다.
  12. 또한 이 통계에는 동남아 방면의 일본군과 일본 괴뢰정부군의 사상자 90만 명이 누락되어있다.
  13. 2015년 종전 70주년에 중화민국측은 2300만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한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은 3500만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14.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위 문장은 같은 시각에 말한 것이 아니다. 윗 문장은 1935년 11월 국민당 전당대회에서의 대일정책의 신조이며, 아랫문장은 1937년 7월 17일 루산에서의 연설의 일부다.
  15. 지금의 중국인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중화민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16. 참고로 단순히 정권만 바뀌었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완전히 별개의 국가다. 중화민국은 청조로부터 국가의 통치권을 이양받은 정통정부를 자처하는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의 통치 역사를 완전히 부정하고 1931년에 건설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후신과 1948년부터의 정치협상회의로 건국된 정통국가를 자처한다.
  17. 청일전쟁도 Sino-Japanese War라고 부르기 때문에 앞에 First, Second를 붙이거나 뒤에 연도를 달아서 구분한다.
  18. 참고로 중국에서는 2차대전을 세계반파시스트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일제가 파시즘 국가였음을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명칭이기도 하다.
  19. 얘넨 할힌골 전투도 지들이 이겼다며 되도 않는 정신승리를 일삼는다. 물론 실상은 소련에게 제대로 털렸다. 이겼다면서 "노몬한 사건"으로 축소해 부르는 것은 보너스.
  20. 둘다 감리교도였던 덕분에 중국에 대한 이미지 개선에 큰 도움이 되었다.
  21. 달랑 50%라고 하는 점에서 또 다시 오해가 생길까 첨언하자면 일본군의 편제는 상당히 경직되어 있어서 독소전쟁 개전 이후에도 관동군이 증강될 정도였다. 50%가 달랑인가(...)
  22. 이러한 경향은 국공내전이 재개되기 전인 중일전쟁 시절부터 심했다. 자기들이 민주적이고 혼자 싸우고 있다는 마오의 낚시질에 미국 언론인, 외교관, 군인까지 속았는데다가 중국의 학생과 지식인들도 낚여 국민당은 싸우지 않는단 인식이 파다했다.
  23. 미국 참전 전인 1937년에서 41년까지의 무관심과 편견이 당시부터 심각했다.
  24. 일본 우익들 중에서도 만주사변까진 찬양해도 중일전쟁까지 찬양하는건 많이 답없는 자들이라 수가 적은 것도 있고 중일전쟁의 당사자인 일본에선 중화인민공화국의 자화자찬 혁명사관을 진작부터 비판적으로 보아 중화민국 중심의 민국사관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나온게 산케이신문에서 연재되 출판된 장개석비록.
  25. 이는 지상병력의 신속한 기동이 불가능한 해상/섬 지역이라는 특성과, 요새화된 곳은 가급적 건너뛰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곳만 골라서 찔러대는 미군의 전략에 의한 영향도 크다.
  26. 물론 전쟁 후반에 가면 압도적인 질적, 양적 차이에 의해 지상 점령 전부터 제해/제공권이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지상에 안정된 기지를 확보한 상태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땅을 딛고 사는 존재이다.
  27. 다만 대부분이 중국에 관련된 학자나 중국 국적의 학자들이라는 특성이 있다
  28. 오늘날, 나이드신 어르신들 (2~30년대生) 상당수가 중일전쟁을 '지나사변'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