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시/역사

진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진주군
(晋州郡, 1896)
진주부(晋州府, 1939)
진양군(晋陽郡)
진주시(晋州市, 1949)
진양군(晋陽郡)
진주시
(1995)

1 고대

남강 유역을 따라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들어선 나라는 삼한변한의 12국 중의 고순시국(古淳是國)으로 추정되며, 경상북도 상주시와 같이 고령가야(古寧伽倻)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백제 치하에서 거열성(居烈城)으로 불리어졌다. 신라 문무왕 3년(663)에 통일신라에 병합된 뒤 거열주(居烈州)라 불리게 되었다. 신문왕 5년(685)에 청주(菁州)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경덕왕 16년(757) 강주(慷州)로 불리게 되었다.

2 고려

태조 23년(940) 진주(晉州)로 개명되었다. 성종 2년(983) 전국 12목중 하나인 진주목으로 승격되었다.

3 조선

태조 1년(1319) 진양대도호부로 정해지다가 태종 2년(1402) 전국 20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경상도 4대 도시(경주, 상주, 안동, 진주)[1] 가운데 하나로 급성장했다.

남강을 따라 형성된 충적평야가 있고 바다와 인접해 있어서 각종 물자가 풍부한데다가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의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입지조건 때문에 한때는 경상도 최고의 대도시라는 위엄을 자랑했던 시절도 있다. 동래(부산)고 대구고 안동이고 경주고 간에 전부 진주의 위엄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기생문화로 대표되는 유흥문화는 풍요롭고 인구가 많은 대도시가 아니면 발달할 수가 없는데, 조선시대 3대 기생하면 평양 기생개성 기생, 그리고 진주 기생이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으며 당시 내성과 외성, 절벽과 해자, 남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으며 전라도로 가는 길목을 잡는 중요 거점 지역이었다. 그래서 1862년 임술농민봉기(진주민란)가 벌어졌다는건 당시 조선이 자정작용이 거의 불가능한 막장상태에 빠졌다는 의미가 된다. 진주같은 대도시에 민란까지 벌어질 지경이면 당시 안동 김씨 정권은 손도 못 쓸 정도니까.

하동군 평사리 최참판댁에 살던 소설 토지의 주인공 서희간도 용정에 갔다가 귀국한 후에는 하동이 아닌 진주에서 살게 되는 것도 이런 맥락. 이후 소설의 상당 부분이 진주를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2부 이후부터) 이 시기 백정들의 권리 찾기 운동인 형평사 운동(1923년)이 일어난 곳도 이 곳이다.

고종 32년(1895)에 고종이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나누어 관찰사를 두었는데 이때 진주에는 23부 중의 하나인 진주부(지금의 도격)가 설치되고, 진주목은 진주군으로 개칭되어 군수(참서관)를 두었다.

1896년 경상도가 남북으로 분할될 때 경남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4 일제강점기

무역항으로서 부산광역시, 마산의 입지가 급상승하고, 1925년 경상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하면서[2] 서서히 성장 동력을 잃어갔다.[3]

1938년 진주읍에 도동면, 평거면이 흡수되고, 1년 후 진주읍이 진주부로 승격되고 진주군의 잔여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다.

5 대한민국

1949년 진주부가 진주시로 개칭되었다. 1973년 진양군 정촌면과 내동면의 일부가 진주시에 편입되었으며, 이후 1995년 진주시와 진양군이 다시 통합되었고 그 해 3월 2일 문산면이 문산읍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른다. 남강댐 건설로 생겨난 호수인 '진양호'의 이름은 옛 진양군에서 따온 이름이다.

지금은 진주대첩이 있었던 지역이라는 것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적절한 지방 중소도시 정도의 위치까지 전락했다. 그래도 경상남도 서부권의 중심도시 위치는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인구도 34만여 명에[4] 빠르게 공업화가 진행된 경남 지역에서 뚜렷한 문화적 색깔을 가진 도시이다.
  1. 대구임진왜란 당시 경상 감영이 상주에서 이전한 이후부터 성장했고, 동래(부산)는 일본과의 교역으로 나름 흥하던 도시이긴 했지만 중심도시로서의 역할은 아니었다.
  2. 경남도청이 재이전하기 전 마산과 진주가 유치를 놓고 대립했으나 결국 누구도 얻지 못하고 1983년 계획도시인 창원으로 가버렸다.
  3. 이는 비단 진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조선시대까지 찬란한 문화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내륙의 중심도시들이 근대에 들어 몰락한 경우는 상주, 공주, 안동 등 아주 많다. 나주, 충주 등도 진주와 같이 중심지로 활약하다 근대화 시기 도청을 빼앗겨 몰락한 사례.
  4. 전라남북도강원도에서 전주시를 제외하고 진주보다 인구가 많은 도시는 없다! 그나마 익산시, 원주시 정도가 30~32만여 명으로 근접하긴 하지만. 게다가 원주시는 혁신도시 버프와 수도권과 가깝다는 점, 그리고 교통이 편리하다는 점을 발판으로 진주시의 인구를 무서운 속도로 따라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