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승균

한국프로농구 현재 감독
추일승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이상민
(서울 삼성 썬더스)
조동현
(부산 kt 소닉붐)
문경은
(서울 SK 나이츠)
유재학
(울산 모비스 피버스)
김승기
(안양 KGC인삼공사)
김영만
(원주 동부 프로미)
유도훈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김 진
(창원 LG 세이커스)
추승균
(전주 KCC 이지스)
270px
영광의 현역 시절.이제는 KCC의 감독!
전주 KCC 이지스 감독
추승균(秋承均)
생년월일1974년 12월 6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부산광역시
출신학교부산중앙고 - 한양대학교
포지션스몰 포워드
신체사이즈190cm, 90kg
프로입단1997년 현대전자 농구단 입단
소속팀대전 현대 다이넷/걸리버스/전주 KCC 이지스 (1997~2012)
국가대표팀1998 그리스 세계선수권 / 방콕 아시안게임
1999 후쿠오카 ABC
2001 상하이 ABC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2003 하얼빈 ABC
2005 도하 ABC
수상내역KBL 파이널 MVP 1회 (09)
KBL 최우수 수비상 2회 (99, 05)
KBL 베스트 5 2회 (04,09)
KBL 수비 5걸 7회 (99~00, 02~06)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은메달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지도자전주 KCC 이지스 코치 (2012~2015)
전주 KCC 이지스 감독 (2015~)[1]
1998~1999 한국프로농구 우수 수비상
김영만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추승균
(대전 현대 다이넷)
양경민
(원주 삼보 엑서스)
2004~2005 한국프로농구 최우수 수비상
김주성
(원주 TG삼보 엑서스)
추승균
(전주 KCC 이지스)
김주성
(원주 동부 프로미)[2]
2000~2001 한국프로농구 모범 선수상
강주작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추승균
(대전 현대 걸리버스)
임재현
(서울 SK 나이츠)
2008~2009 한국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
김주성
(원주 동부 프로미)
추승균
(전주 KCC 이지스)
함지훈
(울산 모비스 피버스)
2015~2016 한국프로농구 감독상
유재학
(울산 모비스 피버스)
추승균
(전주 KCC 이지스)
2016-17
전주 KCC 이지스 영구결번
No. 4

1 개요

전주 KCC 이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실업 현대전자부터 대전 현대, 전주 KCC까지 모두 지킨 선수. 별명은 소리 없이 강한 남자.

10,000득점 이상을 달성하고도 1위가 되지 못한 선수.

한국프로농구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몰 포워드 중 한 명이다. 등번호 4번 역시 영구결번.

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의 권유로 농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별세하면서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일을 했다. 홀어머니가 장사를 하면서 뒷바라지 해주면서 다행히 농구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원래는 가드였지만, 중학교 2학년 때, 키가 12cm가 크면서 포워드 포지션으로 옮겼다.

부산중앙고 시절 활약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원래 그를 스카웃하기로 한 고려대학교가 갑자기 동기인 박훈근박규현을 잡았다는 이유로 그를 포기하면서 붕 뜨게 되었다. 다행히 한양대학교가 그를 잡으면서 대학 진학에는 성공. 한양대 진학은 결과적으로 추승균에게 도움이 되었는데, 추승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면서 1학년부터 4년간 주전으로 뛰면서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수비력에서도 팀 사정상 더 많이 뛰어야 했기 때문에 성장 속도가 빨랐다. 그 결과 졸업 무렵에는 자타공인 포워드 랭킹 1위 선수로 급부상했다. 프로에 온 이후 스몰포워드로 정착해 성공하기는 했지만, 사실 대학 때 주 포지션은 파워포워드였다.인사이드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팀 사정으로 인해 센터도 자주 보았을 만큼, 대학까지의 그는 사실상 인사이더였다.

그를 두고 치열한 스카웃전, 특히 신생 팀 진로와 기존 현대전자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진로는 신생팀의 특권을 내세워 추승균 영입을 희망했지만, 서장훈을 가져간다는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추승균을 영입하는 데 성공한 것은 계약금 5억 원을 제시한 현대전자였다.

2.2 소리 없이 강한 남자의 전설

1996-97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아마 무대를 떠나 1997-98 시즌부터 프로에 데뷔했다. 군에서 돌아온 이상민, 조성원과 전설적인 외국인 선수 조니 맥도웰이 가세하면서 전년도 최하위였던 현대는 단숨에 우승 후보로 치고 나갔고, 결국 정규 리그 3연패와 챔피언결정전 2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른바 이-조-추 라인의 결성.

이-조-추 라인이 조성원의 트레이드로 해체되고, 신선우 감독이 '토털 바스켓볼'이라는 라인업의 장신화를 구상할 때, 추승균은 여전히 그 구상의 핵심이었다. 이 구상은 어느 정도 실현이 될 듯하다가 결국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이 구상이 한창 가동되던 2001-02, 2002-03 시즌 각각 평균 16.3, 17.5득점으로 팀의 주포로서 역할을 다했다.
그 뒤로도 추승균의 활약은 변함없었다. 매년 두 자릿수 평균 득점은 꾸준히 찍어주었기 때문에, 팀에서는 그를 절대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실제로 KCC가 이상민은 보상 선수로 풀었지만, 추승균만은 절대 보상 선수로 풀지 않았다. 멤버는 자주 바뀌어도 팀의 주전 스몰 포워드는 오로지 추승균이었다.

2003-04 시즌에는 돌아온 이-조-추 라인과 찰스 민렌드와 함께 다시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상민이 FA 보상 선수로 이적하고, 조성원이 은퇴한 뒤에도 팀의 주전 3번 자리를 이어갔다.

다만, 이 기간 동안 추승균은 지지리도 상 복이 없었다. 주전이니까 식스맨 상은 받을 수 없고, 기량 발전 운운하기에는 성적이 너무 좋았다. 그렇다면 받을 수 있는 상은 MVP인데, 현대가 왕조를 구축하던 시절에는 스포트라이트가 이상민에게 맞춰졌고, 토털 바스켓볼하에서 그가 활약하던 시절에는 팀 KCC가 프로농구의 중심이 아니라 조연이었다. 결국 추승균은 그렇게 상 복 없이 은퇴하는가 싶었고, 이 때문에 그가 얻은 별명은 소리 없이 강한 남자라는 참으로 역설적인 말이었다.

2.3 쇠퇴하지 않는 남자

나이가 들면서 기량이 쇠퇴할 만도 했지만, 추승균의 자기 관리는 무서울 정도였다.[3] 여전히 두 자릿수 평균 득점을 기록하면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줬다. 2008-09 시즌 정규 리그 3위로 챔프전에 올라간 KCC는 챔피언 결정전에서 서울 삼성 썬더스와 맞서며 접전을 벌였는데, 7차전까지 가는 접전에서 웃은 것은 추승균과 KCC였다. 추승균은 이 챔프전에서 평균 14.6득점을 집어넣으면서 맹활약했고, 마침내 생애 첫 챔피언결정전 MVP를 수상했다. 이 수상이 KBL에서 10년 넘게 뛰면서 받은 추승균의 생애 첫 개인 타이틀이라는 점은 뭔가 아이러니했지만.

추승균은 그 다음 시즌인 2009-10 시즌에는 다소 부진하며, 생애 처음으로 두 자릿수 평균 득점에 실패했다. 하지만 챔프전에서는 12.0득점을 기록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그리고 2010-11 시즌에 다시 정규 시즌 평균 10.1득점을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했다. 팀의 주축은 이제 하승진, 강병현 등에게 넘어갔고 본인은 조연에 더 가까워졌지만, 팀의 기둥으로서 추승균이 가진 위상은 이 둘이 감히 넘보기 어려웠다. 불행히도 챔프전 3차전에서 무릎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되면서 이렇다 할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KCC의 우승으로 추승균은 생애 다섯 번째 우승 반지를 차지했다.

2011-12 시즌에는 전성기만큼의 활약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확실히 나이가 든 모습이기는 했다. 하지만 꾸준하게 득점을 쌓아가더니 마침내 2012년 2월 26일, 전주에서 열린 SK전 2쿼터에 KBL 두 번째로 1만 득점을 기록했다.[4]
2011-12 시즌 PO에서 분투했지만, 전태풍의 부상 공백을 막을 수 없었던 KCC는 모비스에게 0:3 완패를 당했고, 추승균은 3차전 종료 때 가진 인터뷰에서 은퇴에 대해서는 구단과 상의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결국 3월 15일 은퇴 기자 회견을 가지기로 하면서 코트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15시즌 동안 남긴 기록은 통산 738경기 10,019득점(역대 2위) 1,715리바운드(역대 15위) 2,066어시스트(역대 8위) 552스틸(역대 13위).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KCC의 코치로 활동하다 2015년 2월 허재 감독이 자진 사퇴하자 감독 대행을 맡았고, 시즌 후 정식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그리고 5월 29일 KCC와 3년 계약을 맺고 감독에 취임했다.

덧으로 추승균이 은퇴한 뒤 전주 KCC 이지스는 추승균의 공백을 잘 메워내지 못하였다. 당장 2012-13 시즌 초반에는 김태홍이 주전을 보는데 영 좋지 못했고, 결국 이한권을 영입했지만 이한권마저 부상을 당하며 정희재, 최지훈 등의 선수가 스몰 포워드로 출장했고, 심지어는 수비가 영 좋지 못한 김효범마저도 뛸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2013-14 시즌에는 장민국이라는 루키의 발견으로 조금 나아지나 싶었는데, 장민국도 아쉽긴 했지만 발전의 여지를 보여주려는 찰나에 김태술과의 트레이드로 팀을 떠나갔고, 이후 2014-15 시즌부터는 김태홍과 정민수가 주로 출장했는데 김태홍의 플레이는 가히 OME급이었다.

2015-16 시즌,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빚은 김민구를 '이번 시즌 1군 복귀는 힘드니 KBL D리그에서 뛰게 할 것[5]'이라는 당초 발언과는 달리 바로 1군 경기, 그것도 시즌 개막전에 투입시키면서 팬들로부터 바가지로 욕을 먹었다. 심지어 솜방망이 징계로 받은 봉사 활동도 나중에 차차 하겠다고 하는 등[6] 정식 감독으로 맞이하는 첫 시즌부터 굉장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팀을 5연승으로 이끌며 감독 역량 면에서는 인정을 받는 분위기이다. 특히 답이 없었던 김태홍을 준수한 3번으로 살려놓으며 찬양받고 있다. 하지만 김민구 건은 여전히 까이고 있다. 다만 공격의 제1옵션인 안드레 에밋에게 너무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있고, 국내 선수들이 미미한 활약을 보여 패배하는 모습을 보고 장판도 에밋빨이었냐면서 거품론을 보여주거나, 모 감독의 별명이었던 추무능 타이틀이 붙여지기도 한다.

또한 전태풍김태술을 비롯한 가드진의 활용도 역시도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2경기가 남은 2016년 2월 17일 팀이 모비스와 공동 1위에까지 올리며 4년만에 화려하게 부활하게 되자 지도력을 평가받는 중이다.

그리고 마침내, 2016년 2월 21일 안양 KGC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승리하면서 모비스의 경기결과와 상관없이 자력으로 2015-2016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 짓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22일 열린 2015-16시즌 KCC프로농구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 하였다!

그러나 챔피언결정전,1차전 승리 이후 2~4차전을(특히 2,3차전은 20점차 이상으로) 원사이드로 털리고 6차전은 120점을 내주는 등 다시 추무능,무능균이라고 까이고 있다.

에밋과의 재계약에 성공하고, 리오 라이온스를 영입하여 과연 에밋 원맨팀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들게 만들었다. 아니나다를까 농구팬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추에밋이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016 프로아마최강전에서 에밋이 빠지고 하승진, 전태풍이 부상으로 결장을 하자 송교창을 빼고 눈이 썩는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1라운드에서 상무에게 졸전끝에 51-71로 참패를 당했다.

3개국이 참가한 2016 아시아 농구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두 경기 모두 외국인 선수 둘의 득점 점유율이 70%대에 육박하는 심각한 외국인 의존도를 보여줘 까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모비스전은 진심 김지후 아니었으면 졌다[7]

4 플레이 스타일

추승균이 팀에서 맡은 일은 스몰 포워드 포지션에서 슈팅과 상대의 주축 선수들을 봉쇄하는 수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추승균은 성실하고 꾸준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데뷔 이후 40경기 미만을 뛴 시즌은 1998-99 시즌 단 한 번이다. 그나마도 45경기 체제에서 34경기를 뛴 것이니까 결코 적게 뛴 것은 아니었다. 부상 없이 꾸준하게 뛰면서 현대부터 KCC까지 3번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그야말로 KBL 역대 최강의 금강불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꾸준한 득점력. 팀의 주공격원은 슈터 조성원이나 외국인선수였고, 추승균은 조력자 포지션이었던지라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결국 말년에 이르러 통산 1만 득점이라는 넘사벽 마일드스톤을 기록했다. 역시 소리없이 강한 남자. 정규시즌에서 추승균이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넘지 못한 것은 단 한 시즌, 2009-10 시즌뿐이다. 그 외에는 모두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했다. 한 마디로 팀 입장에서는 공수에서 이보다 더 꾸준하게 활약해 줄 수 있는 선수가 없기 때문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선수이다.

추승균의 공격 옵션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위치를 가리지 않는 중거리슛이었다. 페인트존 바로 바깥에서 3점 슛 레인까지 어느 위치에서든 노 마크 찬스가 나면 여지없이 중거리 슛을 성공시켰고, 당시에 뛰던 용병들도 그의 시그니처 기술로 인정했다. 또한 독하게 마음만 먹으면 30~40점대도 넣어줄 수 있기도 했다. 사실 한양대 시절은 북치고 장구치는 에이스 노릇을 해왔으니...

그리고 잊어버릴 수 있는 사실 중에 하나는 자유투가 아주 정확하다는 것이다. 커리어 통산 85퍼센트 정도는 된다. 자유투 왕도 많이 했고. 요즘 젊은 선수들의 환장할 자유투 성공률을 본다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젊진 않지만 동팀의 하승진만 봐도...

또한 수비력도 KBL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비록 나이를 먹은 이후로는 다소 쇠퇴한 감이 없지 않지만, 전성기에는 우수 수비 선수에 2회 뽑히기도 했고, 수비 5걸에 7회 선정되었다. 공격력도 좋은데, 수비력까지 우수하기 때문에서 상대 입장에서는 정말 짜증나고 까다로운 선수.[8] 더군다나 동급최강의 체력[9][10]과 상위급의 스피드와 힘까지 있어서 상대방으로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PO에서도 뛰어난 선수라서 PO에서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지 못한 시즌은 2007-08 시즌이 전부. 챔프전만 따로 한정지으면, 1998-99, 2004-05 시즌과 부상으로 빠진 2010-11 시즌이 전부다. 그 외에는 모두 두자릿수 득점을 넘기면서 활약했다. 한 마디로 어떤 상황, 어떤 순간에도 꾸준한 능력을 보여주는 선수다. 다만, 너무 꾸준하니까 화려한 맛이 없어서 투표에서 매번 물을 먹었다는 것이 문제.

또한 문경은과 같이 대한민국 농구 선수 중에 득점 순위 2위를 다퉜다. 1위인 서장훈이 너무 넘사벽이라 그렇지... 추승균과 문경은 이 두 사람이 8~9000득점을 기록하는 가운데 서장훈 혼자 12000득점을 넘겼기 때문. 결국 문경은을 제치고 2위 자리를 굳힌 후에, 통산 10000득점도 돌파하면서 KBL에 한 획을 그었다.

다만 국제용으로는 아주 특출난 장점이 없는 탓에 국대에서는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3번으로서 190이라는 신장은 결코 큰 신장이 아니며, 운동 능력이 아주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문경은처럼 3점 슛이 특출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1. 대행 시절 포함.
  2. 우수 수비상은 2004-05 시즌 이후 폐지, 7년간 수상자가 없었는데 2011-12 시즌 최우수 수비상으로 부활했다. 김주성은 2011-12 시즌 수상자.
  3. 카더라 뉴스에 따르면, 늦여름 오프시즌이 되면 용인 KCC 훈련체육관 뒷편 산으로 KCC 선수들이 자주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추승균은 맨 선두에서 후배들을 끌고 올라가고 있었다고 한다.(...) 이상민은 중간에서 켁켁대며 쉬고 있었다 카더라.
  4. 하지만 여기서 KBL의 병크가 일어났다. 어떤 프로 종목이든지 간에 마일스톤이 달성되면 협회 측에서 큰 기념 행사를 벌여줄 만한데, KBL 측에서는 달랑 꽃다발과 기념 패를 전달한 게 전부였다. 보고 있나? 병맛스런 KBL 관계자들
  5. [1]
  6. [2]
  7. 이날 경기에서 국내 선수중 가장 많은 득점인 16득점을 기록했다.
  8. 자신은 꾸준히 15~20득점을 하면서 상대방을 0~7,8점으로 막아대니 마진이...
  9. 사실 주희정과 함께 체력으로는 리그 최강의 체력을 자랑하였으며, 상대방으로써 제일 미치는 일이 끊임없이 따라오는(...) 추승균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사실 선사시대의 인간들이나 아메리칸 원주민들이 동물을 사냥하는 방법이 다름아니고 끊임없이 뒤쫒아가기(...)였다고 한다
  10. 한 위키러의 증언에 의하면, 오프시즌에 KCC의 클럽하우스 현대인재개발원 뒷산을 오르는 선수들을 자주 목격할 수 있는데, 선수 말년이었던 추승균이 오히려 선두에서 후배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올 정도로 스태미너가 남달랐다고 한다. 그리고 이상민은 산 중턱에서 헉헉대고 있었다고 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