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상위항목: 이탈리아

1 개요

이탈리아의 주
발레다오스타피에몬테리구리아
롬바르디아트렌티노알토아디제베네토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에밀리아로마냐토스카나
움브리아라치오마르케
브루초몰리세 캄파니아
풀리아바실리카타칼라브리아
시칠리아사르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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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문장

명칭한국어: 토스카나
이탈리아어: Toscana
영어: Tuscany (투스카니)
국가이탈리아
수도피렌체
인구약 380만명
면적22,990.18 km2[1]
명목 GDP1061억 유로(2008)
1인당 GDP28,500유로(2008)


피렌체

시에나

완만한 구릉지와 너른 들판, 길 따라 늘어선 사이프러스 나무...이것이 토스카나다!
어디서 본 것 같은가? 그렇다.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가장 많이 사랑 받는 풍경이 바로 토스카나의 풍경이다!!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주(州)로 인구는 380만명이다. 주도는 꽃의 도시, 르네상스의 도시 등 다양한 별칭을 가진 피렌체(이탈리아어: Firenze, 영어: Florence)이다.

토스카나는 르네상스의 탄생지로 고급 이탈리아 문화의 정수를 간직한 지방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여행에 있어 토스카나 만큼은 따로 빼놓고 이야기할 정도. 미국이나 다른 유럽국가에서는 토스카나만 2-3주씩 계획해서 여행오기도 한다. 그만큼 역사, 예술, 문화, 건축, 음식, 와인, 자연풍광 등 무엇 하나 빠지는게 없는 최고의 관광지!

이 지방에만 7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품고 있다. 피렌체 역사중심지구(1982), 시에나 역사중심지구(1995), 피사 대성당(1987), 산 지미냐노 역사중심지구(1990), 피엔차 역사중심지구(1996), 오르챠 계곡(Val d'Orcia: 발 도르챠)(2004), 메디치 가문의 빌라와 정원(2013) 등이 그것이다. 보다시피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 많다.

와인에 있어서도 매우 유명한 지역이다. 와인으로 유명한 키안티 지방이 이곳에 있으며, 몬테 풀치아노, 몬탈치노 등 유명 와인산지가 몰려있다.

현대의 표준 이탈리아어도 수도인 로마가 아닌 이 지역의 방언을 기초로 하고 있다.

"토스카나(Toscana)"라는 지명은 고대 로마 시대 이전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인들의 이름으로부터 왔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역사 항목 참조.

2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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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주는 9개의 현과 1개의 광역시로 구성되어 있다(피렌체 광역시와 아레초 현, 시에나 현, 그로세토 현, 리보르노 현, 피사 현, 프라토[2], 피스토야 현, 루카 현, 마사카라라 현).
피렌체에 약 100만 명, 피사와 루카에 각각 약 41만 명과 39 만명, 아레초와 리보르노에 각 약 34만 명, 피스토야에 약 29만 명, 시에나에 약 27만 명, 프라토에 약 25만 명, 그로세토와 마사카라라에 각각 22만 명과 2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인구 밀도는 프라토 현이 가장 높다.

3 지형 및 기후



4 역사

"토스카나"라는 지명은 고대 로마 시대 이전 이곳에 살았던 에트루리아Etruria에서 왔다. "에트루리아인"을 나타내는 라틴어Etruscus였는데, 이를 Truscus로 축약하여 많이들 이야기하다가 Tuscus가 되었다고 한다. 14세기 후반, 후기 라틴어에서는 "에트루리아인들의 것"이라는 의미인 Tuscanus라는 말로부터 이탈리아어 Toscano가 나왔고, 이것이 직접적인 어원이 되었다. 영어의 Tusacany(투스카니)도 위 라틴어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에트루리아 문명이 로마에게 복속당하고 나서 수세기 동안 토스카나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다. 중세에는 여러 세력의 점령지가 되다가 르네상스시기에 들어 다시 유럽 문명을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이후 토스카나 대공국이 성립하지만, 18세기 후반에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되고, 19세기에는 가리발디가 주도한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이탈리아 공화국의 일부가 된 후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4.1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 문명 이전의 청동기 및 철기 시대 토스카나의 역사는 초기 고대 그리스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대략 기원전 1350–1150년 사이에는 오늘날 아펜니노 문명[3]으로 명명된 공동체가 이 지역에 주거하면서 미노아 문명이나 미케네 문명에게해 지역 문명과 교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100–700년에는 빌라노바 문명이 이 지역에 나타났고, 이들이 토스카나를 포함한 훗날의 에트루리아의 지배권역을 장악한다. 초기에는 부족국가였으나 후기로 접어들면서 도시국가들이 성립되기 시작한다.

그 후 드디어 이 지역의 최초의 주요문명으로서 에트루리아 문명이 부상하게 된다.[4] 에트루리아 문명을 이 지역 최초의 문명으로 부르는 이유는 교통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컸고, 농업과 광업이 자리 잡았으며, 예술작품까지 남기는 등 총체적인 문명을 건설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선사시대의 에트루리아 문명은 매우 강력하게 성장했다. 기원전 8세기부터는 오늘날 피렌체를 지나는 아르노 강로마를 지나는 티베레 강 사이의 영토를 모두 지배하였다. 기원전 7-6세기에 국력은 정점을 찍는다. 그러나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계 국가들과 카트타고, 갈리아족 등에 의해 점차 영토를 뺏기며 쇠퇴하다가 기원전 1세기 파죽지세로 성장하는 도시국가 로마에 의해 결국 패배 당해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로마는 다른 패자들에게도 그랬듯이 에트루리아의 지배층을 자신들의 귀족으로 흡수하여 동화시키게 된다. 이로써 에트루리아 문명은 로마 문명에 흡수되어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다.

에트루리아 문명은 건축양식과 채광 및 제련기술로 특히 유명했다. 에트루리아의 채광 및 제련 기술은 에트루리아를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고대 국가로 군림하게 한 핵심기술이었으며, 에트루리아의 건축 양식은 그리스 양식을 자신들의 환경에 맞추어 적용함으로써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나간 양식이었는데[5] 이후 에트루리아의 아치, 볼트(Vault) 공법 등은 고대 로마의 건축 양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4.2 고대 로마 시대

에트루리아 점령 이후 로마는 피렌체, 루카, 피사, 시에나 등의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오늘날 토스카나 지도의 밑그림을 그리게 된다. 토스카나는 로마의 본토지역으로서 완전히 동화되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5세기까지 그 역사를 함께하게 된다. 고대 로마 항목 참조.

4.3 중세시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난 후에는 고트족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고, 569년 롬바르드족이 점령하면서 루카를 수도로 하는 투스키아 공국을 세운다. 롬바르드 왕국샤를마뉴 대제에 의해 무너지고 이 지역은 먼저 백작령(county)이 되었다가 후작령(march)으로 승격된다. 11세기에 토스카나 후작 작위는 토스카나주 북쪽에 인접한 카노사, 만토바, 모데나, 레지오 에밀리아를 영지로 삼고 있는 카노사의 아토니 가문에 가게 된다.[6]

이 시기에 토스카나에는 많은 성과 수도원들이 들어서게 되고, 이 지역 도시들은 인구가 증가하면서 점차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코무네commune[7]를 형성하게 된다. 루카가 최초의 코무네였고, 피렌체, 루카, 아레초, 시에나도 코무네로 발전하여 서로 다투며 발전해 나갔다. 반면 토스카나 남부(그로세토 현)는 알도브란데스키 가문의 영지로 봉건질서 하에 있었다.

중세에 이 지역은 로마와 프랑스를 오가는 순례자들 덕분에 음식과 숙박 사업 등을 통해 교회와 여관을 중심으로 부를 쌓게 된다.

11세기 피사는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해안에 면한 입지조건을 살려 지중해 곳곳에 교역도시를 세우고 식민도시로 삼는 등 지중해 교역으로 부를 축적했고 십자군전쟁에서도 주된 역할을 하게 된다. 피렌체와 시에나, 루카는 은행업으로 부를 축적하하는데, 플랑드르 지방(오늘날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과 프랑스, 영국에까지 지점을 세우는 등 국제적인 사업으로 영위했다. 루카는 또한 주요 비단 생산지로도 유명했다.

피사는 멜로리아 전투에서 제노바에 패배한 뒤 13-14세기에 걸쳐 쇠퇴하게 되고, 반면 피렌체는 아레초와 피사를 점령하여 15세기부터 토스카나 지역의 가장 중요한 도시이자 문화적 중심지로 군림하게 된다. 피렌체의 남은 상대는 시에나 뿐이었다.

4.4 르네상스 시대

15세기까지 "토스카나"는 이 지역의 이름으로만 인식될 뿐, 정치적 단위로 인식되지는 않았지만, 피렌체는 꾸준히 토스카나 내에서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1384년 아레초를 병합하고, 1405년 쇠퇴하는 피사를 지역민들의 반발을 제압하면서 사들였으며, 1421년에는 리보르노까지 사들여 피렌체의 항구로 만들었다. 코무네에서 시작한 피렌체는 어느덧 강대한 세력을 가진 공화국이 되어 있었다.

1434년부터는 메디치가문이 공화국을 지배하면서 사실상의 지도자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코지모부터 피에로1세, 로렌초, 피에로2세 등 4대를 거치면서 실질적으로는 점점 왕정에 가깝게 변화하고 있었으나 메디치 가문은 아무런 칭호나 작위 없이 이 지역을 다스리면서 공화국의 형태를 유지했다. 메디치 가문은 이 시기 피렌체 르네상스의 부흥을 주도했다.

그러나 1494년부터 1512년까지 메디치 가문은 한동안 피렌체를 떠나게 된다. 이 시기 공화국은 사보나롤라가 지배하게 되었고, 사보나롤라가 화형당한 이후에는 소데리니가 지도자로 통치했다. 1512년 조반니 데 메디치(레오 10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 로마로 가는 길에 스페인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로 가 다시 토스카나에 대한 지배권을 메디치 가문에게로 가져왔다. 1527년 주민들이 다시 공화국 출범을 선포하기 전까지 토스카나는 교황의 대리인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1530년 신성로마제국스페인 군대가 공화국이 된 토스카나를 점령한 뒤 교황 클레멘트 7세(줄리오 데 메디치)와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최초로 공식 세습군주인 피렌체 공작으로 임명한다.

한편 시에나는 15세기에 보다 보수적인 형태의 시에나 르네상스를 향유하는 등 독립적으로 존속해오다가 1555년 피렌체 공국에 병합되었다.[8] 한편 루카 공화국은 1847년 주민들의 자의로 토스카나 대공국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약소국이었던 피옴비노 공화국은 스페인왕국과 토스카나의 영향력 아래 독립국으로 존속했다.

4.5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공작 알레산드로의 아들 코지모 1세는 1569년 토스카나 대공 작위를 받는다. 그후 1737년까지 토스카나 대공국은 메디치 가문이 다스리게 된다. 메디치 가문은 시에나를 종속시키는 등 16세기 동안 성공적으로 토스카나 대공국을 통치했다. 메디치 가문은 그들의 통치 기간 동안 꽃 피운 과학과 예술의 후원자였으며, 피렌체 공국은 피렌체라는 도시의 군림이라기 보다는 점차 한 나라로서의 정체성과 결속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 토스카나는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된다. 특히 토스카나의 산업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모직 생산이 쇠퇴하였고, 비단 생산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또한 중세부터 토스카나 지역을 지탱해온 산업들이 17세기 들어 전반적으로 퇴조를 보이게 된다. 산업에 대한 투자의 수익성이 떨어지자 귀족들은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이를 기반으로 재봉건화가 이루어졌다. 18세기 초까지도 토스카나는 쇠퇴일로의 길을 걷는다.

1737년 지안 가스토네가 후사 없이 죽음으로써 메디치 가문의 지배는 끝이 나고 대공 작위는 합스부르크 왕가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개혁군주였던 레오폴도 1세는 토스카나에서 농노제도의 마지막 흔적을 완전히 폐지하고, 교역과 산업을 지원하며, 관료제도를 개혁했다. 레오폴드 1세의 통치기간 동안 토스카나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나라가 된다. 레오폴도 1세는 1786년 형벌개혁을 단행해 토스카나를 사형제도를 폐지한 최초의 국가로 만들기도 했다. 이 시기 토스카나는 상공업의 발달로 길드가 활발히 활동하기도 했다.

1801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패배하자 토스카나는 영지를 잃은 파르마의 부르봉 공작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에 토스카나 대공국은 "에트루리아 왕국"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토스카나는 1807년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에 병합된다. 그리고 토스카나 대공 작위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이 차지하게 된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시 대공 작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파르마의 부르봉 공작에게 영지를 주기 위해 루카 공작 작위를 토스카나 대공으로부터 분리하여 수여하게 된다. 루카는 1847년에야 다시 토스카나의 일부가 된다.

4.6 이탈리아 공화국

토스카나는 1860년 이탈리아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1865년부터는 토리노를 대신하여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어 최초의 의회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6년이 지난 1871년 로마에 수도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5 문화

5.1 예술

르네상스의 심장부와도 같았던 곳이다. 더 설명이 필요한가?

페트라르카 등 르네상스 시대를 연 초기 인문주의자들을 포함하여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도나텔로 등 4대 르네상스인들은 물론 그야말로 예술이 찬란하게 꽃피었던 곳인 만큼 엄청난 대작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을 꼽자면, 미켈란젤로다비드상보티첼리비너스의 탄생이 있다. 미술관 중에서는 우피치 미술관, 피티 미술관(원래는 피티 궁이었다), 바르젤로 미술관이 유명하고 그 외에도 숱한 미술관들이 산재해있다.

또한 이 지역에 수없이 많은 교회와 수도원 내부에 프레스코화, 벽화 등도 유명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이 많다. 피렌체 대성당, 시에나 대성당, 피사 대성당, 산 지미냐노 교회가 특히 중요한 곳들이다.

5.2 건축

브루넬레스키의 걸작, 피렌체 대성당을 필두로 피사, 시에나 등 주요 도시들이 다투듯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대성당을 지었다. 피렌체 대성당에 자극받은 시에나는 이를 모티브로 대성당을 짓기 시작하는데 다 짓기 전에 망해버린다(...). 지어놓은 외벽의 일부를 이용해서 원래 계획보다 훨씬 작게 대성당을 완공했고, 남은 외벽은 그냥 남겨두었다... 비록 원래 계획대로 짓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충분히 크고, 엄청나게 화려하며, 내무 모자이크와 그림, 조각상들이 하나하나 모두 걸작이다. 특히 금을 도배한듯한 모자이크 작품은 압권.

토스카나 지역에는 수도원도 많다. 그 중에서도 성 프란치스코의 활동 근거지였던 아시시는 도시 자체가 수도원을 중심으로 건설되어 있다. 그야말로 중세에 온듯한 느낌.

토스카나 지역의 관공서들은 대체로 육중하고 높은 탑이 있으며 주로 그 탑의 상부는 망루로 되어 있다. 도시국가였던만큼 유사시 관공서가 방어목적으로도 쓰였던 것이다. 그런데 중세 귀족들 사이에서는 탑을 짓는 것이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하는데, 그래서 서로 경쟁적으로 탑을 지어댔다. 그 모습을 잘 모여주고 있는 곳이 산 지미냐노이다. 한창 때는 70m가 넘는 탑이 72개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달랑(?) 12개가 남아있다.

현대에 토스카나 건축양식은 이탈리아 건축양식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듯하다. 이탈리아 양식이라는 말보다 보통 토스카나 양식이라며 건축물이나 인테리어 스타일을 소개한다.

5.3 음식

6 경제

1인당 GDP 28,200유로(2014)로, 이탈리아 내에서는 중상위권에 드는 지역이다. 패션산업과 농업, 광업, 관광업이 주요 산업이다.

6.1 농업

해가 갈수록 그 비중이 줄어들고는 있으나 여전히 토스카나 주의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내륙에서는 귀리, 감자, 올리브, 포도(키안티 와인!!)가, 습지에서는 각종 채소류, 쌀, 담배, 비트, 해바라기 등이 생산된다.

6.2 패션

피렌체와 프라토 지역은 이탈리아의 섬유산업의 핵심지역이다. 이탈리아는 중국와 일본에 이어 세계 3위의 직물생산국이며, EU 섬유생산량의 25%를 차지하고 있다. 덕분에 토스카나는 밀라노와 함께 이탈리아 패션산업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피렌체에 자리를 잡고 있다.

6.3 관광

관광업은 토스카나 경제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토스카나는 자연미와 인공미를 모두 갖춘 곳으로,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토스카나에만 자연보전지역이 120개가 넘게 있다고 한다. 관광업이 잘 발달되어 있다보니 관광상품의 다양성 면에 있어서나 질에 있어서나 매우 뛰어나다.[9] 이 덕분에 생태관광을 표방하는 Agriturismo라는 이름의 농촌관광이 이 지역에서 처음 시작되어 이탈리아 전역으로 뻗어나갔고, 지금은 전 세계적인 운동이 된 슬로시티(Cittaslow) 운동이 1999년 처음 시작된 곳도 토스카나의 키안티 지역이었다.

6.4 산업

토스카나의 지질은 광물이 풍부하다. 철, 구리, 수은, 갈탄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대리석 역시 풍부하여 광업이 토스카나의 광공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섬유, 화학 및 제약, 제철, 유리, 도자기, 의류, 목재, 오토바이 제조, 출판 산업 등도 자리 잡고 있으며, 가구, 가죽수공업 등 경제에서의 비중은 작지만 장인의 장인이 한땀한땀 수놓은 고도화된 기술이 필요한 산업이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해안가의 제철산업과 화학산업은 의미 있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 대략 경상북도+울산광역시+대구광역시+부산광역시 면적 쯤 된다
  2. 중국 드라마 온주일가의 배경이 된 도시이기도 하다.
  3. 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으로부터 유래한 이름이다.
  4. 영어로 아펜니노 문명이나 빌라노바 문명은 "문명"인 Civilization이 아니라 그보다는 하위 개념인 culture로 쓰인다. 따라서 영어권에서는 에트루리아 문명을 이 지역 최초의 "문명civilization"으로 본다.
  5. 외관만 유사하고 나머지는 확연히 달랐다고 한다. 특히 로마양식의 상징이자, 오늘까지도 많이 쓰이는 아치볼트 공법이 에트루리아인들에 의해 처음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카노사의 굴육의 그 카노사가 맞다
  7. 중세에는 시민들이 귀족으로부터 독립되어 스스로 방위하고 통치하는 자치도시들이 많이 등장했다. 주로 중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프로방스 등)에 많이 형성되었고, 주로 로마시대 주요 도시들이 자치도시로 존속했다. 성벽으로 둘러싼 도심과 망루 등 요새도시의 특성을 주로 보여준다. 독일의 자유도시, 프랑스의 코뮌(근대의 코뮌과는 다르다!!), 이탈리아의 코무네 등 다양한 형태, 다양한 이름으로 존재하고 발전했다. 훗날 제노바, 베네치아, 피사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원형이기도 하다.
  8. 지금도 시에나에 가면 피렌체에 대한 라이벌 의식, 복수심 등이 드러난 흔적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9. 생태관광, 농촌관광, 체험관광 등 그 종류도 다양하고, 각종 투어 상품도 시간대별, 가격대별로 체계적으로 잘 짜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