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문 납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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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9년 노르웨이에서 해외연수 중이던 수도여고 고상문 교사(1948년 12월13일생)가 납북된 사건.

2 사건 발생 및 전개

1979년 4월 16일, 노르웨이 오슬로의 한 시내버스에서 고상문 씨의 여행가방이 발견된다.

그리고 6월 30일, 북한은 고상문 씨가 자진입북했다면서 본인의 기자회견 내용을 방송을 통해 공개했다.

외무부는 고씨가 여행 중 여권이 든 가방을 잃어버리고 당황해 택시를 타고 대사관을 찾았지만 공교롭게도 북측 대사관에 잘못 들어가게 되면서 현장에서 억류돼 제3국을 거쳐 강제 북송됐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고씨 송환을 추진했다.

8월22일 노르웨이 경찰이 오슬로 한 호텔에서 고씨가 작성한 숙박계를 찾아냈다. 문제는 숙박계에 적힌 출생지와 국적이 평양과 북한으로 기재되어 있었다는 것링크. 결국 노르웨이 측은 고씨가 강제 납치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수사를 종결했다.

그러나 임신중인 아내가 있는 등 월북할 동기를 전혀 찾을 수 없고, 숙박계 작성 당시 자유로운 상태에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으므로, 납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 그 후

신상옥 감독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중앙텔레비죤 방송에 출연하여 남한을 비판하는 고상문의 침울한 표정을 보고 북한이 써준대로 대본을 읽고 있는 것임을 직감하고 자신과 같은 신세라 고상문을 내심 불쌍하게 여겼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탈북 시도를 하다 붙잡혀 끌려간 정치범수용소에서 다른 죄수로부터 고상문이 간첩 혐의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 되어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북한은 지들이 고상문을 납북해온 주제에 고상문이 미국 간첩으로 의거입북 했다는 황당한 죄를 만들어 그를 정치범 수용소에 가둬놓은 것이다. 이후 1994년 7월 국제사면위원회는 그가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다고 확인하였으니, 1979년 부터 장장 15년 이상을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수감 사실이 알려져 국제적으로 시끄러워지자 북한은 그를 석방했다.

가족으로는 아내와, 사건 후 태어난 딸이 있었는데, 아내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1996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