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본 정보
출생 1926년 10월 18일[1], 함경북도 청진시
사망 2006년 4월 11일, 서울특별시
본관 평산 신씨
가족 최은희(부인), 슬하 2남 2녀[2]
데뷔 1948년 영화 '희망의 마을'
종교 무종교 → 천주교(세례명 : 시몬)
2 소개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1926년 10월 18일, 함경북도 청진시 출생, 한때 함경북도 회령시과 경성군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함경북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1945년 도쿄 예술대학교를 결국 중퇴(...).
본관은 평산 신씨. 여담이지만 살아있는 평산 신씨 중에서는 항렬이 꽤 높은 편이다. 지금 살아 있는 장남 신정균(1963년생)이 균(均)자돌림이니까말이다.
3 활동
해방 후 1946년 서양화가로 화단에 등단한 적이 있었고, 1948년 영화 '희망의 마을'를 통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 이듬해 1949년 영화 '여성일기'의 미술감독을 맡았고 이어 같은 해 1949년 영화 '파시'로 영화 조감독으로 데뷔하였으며 1952년에 16mm 영화인 '악야'라는 작품으로써 본격적인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배우였던 부인 최은희와 1953년에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으며,[3] 장남 신정균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하지만 인지도는.....
중간에 배우 오수미와 사귀게 되면서 아내인 최은희와는 이혼했으나 최은희가 1978년 1월 14일에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되자 그녀의 행방을 찾다가, 그 역시 같은 해 7월 19일에 홍콩에서 납북되었다.[4]
다행히 북한에서도 영화 활동을 이어 나갔다. 신필름영화촬영소 총장을 맡으면서 '소금', '불가사리' 등의 영화를 제작했다. 1986년 3월 13일 최은희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도중,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여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했다!
그리고 1987년 11월 29일에 김현희가 일으켰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다룬 반공 영화인 '마유미'를 대한민국 복귀작으로 제작하여 1990년에 내놓았다. 이 때 김현희와 도플갱어급으로 닮아서 캐스팅한 배우가 당시 무명이었던 김서라. 1994년에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을 지냈다. 2000년에 미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간 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2006년 4월 11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가현리 소재의 천주교 공원 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