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烈王
(? ~ 기원전 238년)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제40대 군주. 재위 기간은 기원전 262년 ~ 기원전 238년.
이름은 완(完) 또는 원(元). 진(秦)나라와의 전쟁에서 백기가 초나라의 여러 성을 함락하는 등 여러 차례 패하자 기원전 272년에 진나라와 화해하기 위해 인질로 진나라에 갔으며, 기원전 263년에 경양왕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황헐이 범수를 설득해 태자 완을 초나라로 돌려보내도록 설득했는데, 소양왕이 황헐을 먼저 보내 경양왕의 병세를 살핀 후에 돌아오면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경양왕이 죽으면 양문군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할 것으로 여겨 황헐의 계책으로 완은 옷을 갈아입고 초나라 사신의 마부로 변장해 함곡관을 빠져나가 초나라로 돌아갔으며, 황헐은 완의 숙소로 남아 병이 났다는 핑계로 손님을 만나지 않았다.
소양왕은 분노했지만 초나라와의 친선을 보내 황헐을 돌려보냈고 경양왕이 죽자 완은 즉위했으며, 고열왕은 황헐을 영윤에 임명하고 춘신군에 봉해 회수 이북 지역의 12개 현을 봉토로 줬다.
기원전 262년에 주(州) 땅을 진나라에 주고 강화를 맺었으며, 기원전 251년에 진나라에서 소양왕이 죽자 춘신군을 조문 사절로 보냈다. 기원전 247년에 춘신군이 회수 이북 지역은 초나라 변경에서 제나라와 맞닿아 직접 관할하는 것이 편하다고 해 회수 이북 지역의 12개 현을 바치고 강동을 봉지로 요청하자 이를 허락했다.
기원전 241년에는 수도를 수춘성으로 천도해 이름을 영이라고 했으며, 각 제후국들이 진나라의 계속되는 공격을 걱정해서 서로 연합해 진나라를 공격했다가 함곡관에서 패했다. 고열왕은 그 책임을 물어 춘신군에게 책망했으며, 이 일로 인해 고열왕은 춘신군과 사이가 벌어졌다.
고열왕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춘신군이 이 일을 걱정해 왕에게 여러 차례 여자를 바쳤지만, 끝내 자식을 낳지 못했다. 결국 이로 인해 이원이 춘신군에게 자신의 누이를 바쳐 임신한 후에 그 누이가 고열왕의 왕후가 되었으며, 그 왕후가 낳은 아들은 춘신군의 아들로 태자가 되었으므로 이원이 비밀이 누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춘신군을 죽였다.
그런데 전국책에는 춘신군이 기원전 238년에 죽은 것으로 나오면서도 기원전 214년에 어떤 세객으로부터 적은 것을 꺼리지 않고 이를 토대로 해서 더욱 많은 것을 바꾸라는 조언을 들은 이야기가 나오는 등 재위 기간과는 맞지 않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