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

1 白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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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깃발.

주로 자신을 해치지 말아달라는 표시로 사용되고, 전쟁에서 사용될 경우에는 주로 항복의 표시인데, 전쟁 중 적진에 교섭을 하러 가는 군사(軍使)도 이것을 표식으로 사용한다. 단, 전설거신 이데온의 외계종족인 버프 클랜에선 백기는 결사 항전의 의미다(버프 클랜에선 붉은 깃발이 항복의 의미).

경찰서에서 유치장에 구금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백기를 게양한다고 한다. 하지만 날마다 갖가지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판국이니 경찰서에 백기가 걸려 있는 걸 보는 것은 뒷산에서 산삼을 발견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현실. 그래서 경찰서 유치장에 백기가 걸리면 이렇게, 지역 신문에 기사가 날 정도이다.헌병대 영창에서도 수용자가 한명도 없을 때 백기를 게양한다.

전쟁을 다룬 창작물에서 가끔 등장하는 클리셰로 백기가 없어서 곤란해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가령 적에게 항복하려 하거나, 임시 교섭을 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백기가 없어서 손수건이나 속옷을 찢어 임시로 백기를 만드는 것. 그런데 깃발의 천이 하도 더러워서(...) 적군이 그걸 보고 "저거 백기라고 봐야 하냐?"라며 황당해 하는 내용이다. 전투 장면 이후의 분위기 전환을 위한 개그씬으로 가끔 등장하는 클리셰이다.

2 전국시대의 인물

白起(? - BC 257).

2.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의 무장으로 전국시대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며, 진말한초의 전설적인 무장인 한신 등과 더불어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장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수없이 많은 적과 포로를 죽여 학살자로 불리기도 하는 인물이다.[1][2]

백기는 상앙의 변법 이후 장의의 연횡책과 범수의 원교근공책을 받아들인 진이 삼진[3]을 지속적으로 압박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장군이다. 그전까지 중국에 없었던 본격 섬멸전 개념을 도입해 전쟁의 패러다임을 혁신적으로 바꾸어놓았다.

크고 작은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어 불패의 상징이었으며, 역사적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 판단할 길이 없지만 어쨌든 기록상 종군한 30여년 동안 대략 165만명을 죽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의 인구가 2~3000만 남짓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싸울 수 있는 장정의 20% 가량을 몰살시켰다는 결론이 나오지만, 아직 국가제도가 제대로 완비되려면 한참 남았을 시기라 사실 정확한 기록이라고 볼 수는 없다.[4] 현실적으로 볼 때 학살되었다고 기록된 165만명은 탈주병, 필요에 의한 부풀림 등이 포함된 수치였을 수도 있다. 물론 백만명은 아니라도 수십만명을 죽인 것은 거의 사실로 인정되는 분위기.[5]

2.2 학살의 시작

그의 학살은 위치상 공격하기 어려운 제나라연나라을 제외한 4개의 국가에 이루어졌으며 좌경에 임명된 기원전 294년부터 시작하여 한나라신성을 빼앗고 다음 해에 이궐의 대전투에서 한나라와 위나라의 연합군을 개박살내서 24만명을 참살하고 적장 공손하를 사로잡았으며 5개의 성을 점령하면서 국위에 임명된다.

이어서 한나라의 안읍부터 건하 지방까지 점령하였으며 기원전 292년에는 대량조에 임명되자 위나라의 61개의 성을 점령하고 또한 사마착과 함께 위나라의 (原)을 빼앗지만 돌려주고 또한 초나라을 빼앗는다.

기원전 280년에는 조나라를 공격하여 광랑성을 점령하고 기원전 279년에 초나라의 언, 등을 포함한 5개의 성을 점령하면서 죄수를 사면하여 이 곳으로 이주시키고 다음 해에는 초나라의 수많은 성을 빼앗아서 35만여명을 참살하고 수도인 영을 함락하여 그 곳에 남군을 설치하며 무군, 검중군을 점령하고 경릉까지 진출한다.[6]

기원전 278년에는 공로를 인정받아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지고 기원전 276년에는 위나라의 성 2개를 빼앗으며 기원전 273년에는 위염, 호양과 함께 위나라의 화양을 함락하면서 위나라의 장수인 망묘를 패퇴시키고 한, 위, 조 삼진의 연합군의 장수들을 붙잡고 13만명을 참살한다.

또한 같은 해에 조나라의 장수인 가언과의 교전에서 2만명을 황하에 수장시켰으며 위나라로부터 남양을 할양받는다.

기원전 264년에는 한나라의 형성을 공격하여 5개의 성을 함락하고 5만 명을 참수하며 다음 해에는 한나라의 야왕을 공격하여 상당으로 가는 길을 차단한다.

이처럼 한나라에 대한 지속적인 침공으로 황하를 기준으로 영토를 남북으로 양분되고 나뉜 영토의 북단이 상당 지역인데, 이를 조나라가 낼름 먹어버리면서 장평대전의 원인이 된다.

2.3 학살의 꽃

기원전 260년, 드디어 유명한 장평대전이 벌어진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면서 조군 40만명과 진나라의 병력 수 만명이 전투를 벌이게 된다. 사실 이 전투는 처음부터 백기가 지휘하지는 않았고, 도중에 진의 재상 범수가 승리를 위해 앉힌 것이었다. 그 전까지 왕흘이 범수의 명을 받아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를 공략했는데, 왕흘도 진나라에서 손꼽히는 명장이었으나 조의 명장 염파의 지구전에 말려들어 불리한 상황이었다.[7]

범수는 계략을 써 염파를 실각시키고 젊고 경솔한 조괄을 대장으로 세우게 만들었고, 왕흘 대신 백기를 조나라 모르게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내심 백기를 정적 취급했으나, 범수로서는 필승 카드를 꺼낸 셈이다.[8]

백기는 불리한 전황과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나라 군을 도발하여 진지에서 끌어내었고, 도망치는 척 하다가 측면에 매복시킨 군사를 통해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군은 병력을 다수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 자리에서 요새를 만들었는데, 백기는 이를 포위하고 사마착 부자의 기병을 이용해 조군의 후방 보급도 끊어버린 채 말려죽이려고 했다. 결국 조군 30만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나와서 싸우다가 패하고 항복한다. 조괄은 이 과정에서 전사한다. 백기는 조나라 포로들을 곱게 돌려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포로로 잡아 먹여살릴 만큼 진의 생산력이 좋지도 않다고 판단하여 30만명을 생매장시켰다. 조나라로 돌아간 것은 소년병인 240명만이었다고 한다. 열국지에 따르면, 이때 베어낸 목으로 누각 3개를 지어 백기대(白起臺)라 이름 붙였다고도 한다. 어쨌건 이 사건으로 인해 40만이나 되는 성인 남자들을 일시에 상실한 조나라는 이후 멸망할 때까지 다시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진과 맞붙지 못할 국력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실제로 현대에 장평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상당한 수의 유골이 발굴되기도 했다. 다만 진짜 30만이나 묻었는지는 알 수 없다..참고

2.4 몰락

그러나 장평대전의 죄 때문이었을까, 이후로 백기는 몰락하게 된다. 조나라의 사신은 진의 재상 범수에게 조나라를 멸망시켜봐야 진을 싫어하는 조나라 백성은 모두 떠나고 텅텅 빌테니 진나라에 이득이 없을 것지만 백기는 범수보다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설득하여 화친을 맺어 진나라의 병력을 돌리고, 범수는 진왕에게 백기를 모함하여 좌천당하게 한다.

이후 기원전 259년에 진은 다시 조나라의 한단을 쳤으나 백기가 없는 진나라 병력은 조나라의 수비를 뚫지 못했고, 초나라의 춘신군과 위나라의 신릉군이 조나라를 돕자 진군은 패배하게 된다. 진왕은 다시 백기에게 지휘를 맡길려고 하였으나 백기는 두문불출을 하게 되고, 결국 진왕은 백기에게 자결을 명한다.

기원전 257년 11월에 백기는 자결하면서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 아아, 그렇구나.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에서 수십만이나 되는 조나라 젊은이들을 죽였으니 나는 죽어 마땅하다!!!"라며 후회했으나 이미 중국 역사를 넘어 세계사에 길이 남을 학살자로 남았다.

그래도 이 진솔함이 담겨있는 반성의 유언은 훗날 조고에게 살해되는 몽염의 "내가 이렇게 비명횡사 하는건 만리장성 공사를 하면서 지맥을 많이 끊어서 그렇다." 는 내용의 유언과 대비된다. 몽염의 이 유언은 죽는 마당까지 정신못차렸다는 뉘앙스로 사마천에게 마꾸 까였다. 물론 몽염의 경우도 항우에 비하면 양반으로 이 남자는 마지막에 망하면서도 자기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자기를 멸망시키려고 해서 그랬다는 개드립을 날렸다.

2.5 기타

백기가 죽은 뒤 50여 년 후에 진나라는 백기가 벌였던 일과 비슷한 것을 당하는데, 진나라 병사 20만이 항복한 뒤 결국 신안(新安)에서 초나라의 무장인 항우에 의해 불시에 습격을 받아 태반이 죽고 살아 남은 자들도 모조리 생매장을 당한 신안대학살이 그것.

전설에 따르면 당나라 때 어느 가 벼락에 맞아 죽었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소에 '백기'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기가 사람을 많이 죽인 죄로 소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벼락을 맞아 죽은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처럼 후세까지도 전해내려오는 평가는 최고의 명장중 하나로 손색이 없지만, 민심을 헤아리지 않고 많은 학살을 자행해서 위인 반열에는 오르지 못하고 대학살자, 전쟁병기 정도의 인식되고 있다.

진나라가 당대 중국의 국가들중 최강이었으니 진나라의 통일은 시간문제였고, 백기가 거기에 묻어간 것일 거란 평도 있으나 설득력이 낮다. 당시 상앙의 변법으로 인하여 진나라의 국력이 전국칠웅중 최강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기열전에서 채택범저에게 언급하기를 백기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국가인 초나라는 땅이 사방 수천리나 되며 백만의 군사가 있었다라고 칭해진다.

하지만 고작 백기는 단 몇 만의 군사만을 이끌고 초나라를 침공해 초나라의 수도 영 땅을 집어삼키고, 이릉을 불태우며, 동쪽의 경릉까지 도달, 총합 35만명의 적군을 학살한다. 군을 치는것이 막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초나라의 전력이 과장이 섞여있다 할지라도 그야말로 엄청난 전공이라 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당대의 또 다른 강국인 조나라와 초나라가 진나라를 치지 못한것도 백기 때문이었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 또한 백기의 전투를 보면 물량공세가 없다. 단지 열세를 우세로 바꾸는데 능하고 학살을 너무 많이 하니 물량공세로 승리한것 처럼 보이는 것일 뿐.[9] 백기는 6국을 상대로 73번 이상의 공성전을 펼치며 종군기간동안 단 한 번도 패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 외에도 위나라, 한나라 연합군을 이궐의 대전투에서 섬멸시킴 (24만명 섬멸), 위나라 수도 함락 (13만명 섬멸), 단 몇 만명만 이끌고 기록상 백만대군이 도사리는 초나라 수도 함락 (35만명 섬멸), 조나라 군사 2만명 수공으로 수장, 한나라 군사 5만명 참수, 장평대전에서 조나라 군사 40만명 생매장등등 엄청난 업적을 새우고 무안군으로 책봉되는등 엄청난 업적을 가진 명장임은 분명한 것. 물론 천자문에서 백기와 버금가는 명장이라 평가된 염파, 이목[10], 왕전[11] [12]등 있으며 후대에도 항우[13]와 이를 격파한 한신[14] 등의 명장이 많기 때문에 단순히 백기를 최고라고 평하는 것은 어렵다. 그냥 중국사 최고의 명장 후보중 한명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의 상당 지역은 오늘날의 산서 성 고평(高平) 일대에 해당하는데, 이 지역에는 '바이치뤄'라는 두부요리가 있다고 한다. 두부를 물에 삶아 먹는 요리인데 이 바이치뤄를 한자로 쓰면 白起肉. 즉 백기의 고기라는 의미이다. 백기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장평의 학살에 복수하는 의미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백기는 옛 조나라 땅의 민중들에게 잔혹한 학살자이자 원수로 오랜 시간 동안 기억되어 온 듯하다.[15]

2.6 여담

하라 야스히사만화 킹덤에는 진 소양왕 시절 육대장군의 일원으로 등장하는데

파일:Attachment/킹덤백기.jpg

혐짤이 아닙니다 원래 이렇게 생겼슴다 육대장군 항목에서 나온 백기 얼굴은 여기보다 더 심하다

염파의 말에 따르면 그 중에서도 필두였다고 한다. 물론 그런 직함은 없었기에 허구이지만 당시 중국 전체를 통틀어 그를 막을 수 있었던 국가나 장수가 없던 것은 사실이다. 그나마 동급의 무장으로 평가받는 염파가 팽팽하게 맞섰고 육대장군을 소개할 때나 회상씬에 간간히 등장하는데 부리부리하고 빗발 선 눈과 무표정한 얼굴이 거의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모습으로 심히 인상적이다.[16] 왕전과 비슷하게 지는 싸움은 피하는 타입이었던 걸로 보이며 염파의 말에 따르면 육장 중 제일 상대하기 힘들었던 장군이고 항연은 명실상부한 괴물이라고 표현한다. 육대장군 중에서 유일하게 축성의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킹덤 가이드북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지력이 99다. 그 얼굴로 지장이라니, 아무리 봐도 개백정인데

삼국지 12,13

삼국지 10삼국지 11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 삼국지 11에서는 통솔 100, 무력 88, 지력 70, 정치 3, 매력 39에 특기가 투신인 전형적인 전투형 무장이다. 적성도 극병만 A고 창, 노, 기마는 S.[17]
삼국지 12에서는 일단 다른능력치는 동일에 정치력은 14로 많이올랐지만 여전히 능력치는 과소평가...또 수염이 생기고 말을 타고있는 일러스트으로 나오는데 병종은 궁병. 전법은 강습으로, 원맹사에서 사정거리, 시야 상승을 뺀 버전이다.
삼국지 13에서는 통솔 100, 무력 88, 지력 70, 정치 14의 능력치에 특기는 훈련 8, 순찰 5, 신속 9, 분전 8, 연전 8, 공성 9, 견수 7, 일기 3, 귀모 7에 전수특기는 위풍이다. 전법은 관우와 같은 군신. 병과적성은 기병, 궁병, 창병 모두 S로 고대무장까지 통틀어서 유일하다.

3 백제의 장수

苩奇
생몰년 미상

백제 무왕 때의 장군으로 충청남도 공주지역에 지지기반을 가진 백씨 가문의 인물이다. 616년 10월, 달솔(達率)로 있으면서 8천의 군사를 이끌고 전북 운송에 위치한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했다.

4 남자 이름

  1. 농담이 아닌 것이, 사기 '백기왕전열전'에서 장평대전이 자세히 언급되기 부분 전까지 그에 관한 내용은 "사람 수만을 죽였네~, 성 수개를 공략했네~"로 간략히 도배되어 있다.
  2. 천자문에는 기전파목 용군최정(起翦頗牧 用軍最精)이라 하여 백기, 왕전, 염파, 이목을 전국시대 가장 뛰어난 네 명의 장수로 꼽은 바가 있다. 물론 재고의 여지는 있다.
  3. 진(춘추오패)(晉)의 영토였던 조, 위, 한.
  4. 수많은 문서가 남아있는 홀로코스트조차 학살의 규모에 대한 논의가 아직까지 이뤄지고 있으며, 그나마도 학자에 따라 크게 견해가 갈린다.
  5. 춘추시대에는 철제 무기가 발전하지 못해 명예전 성격이 강했지만, 철제 무기가 등장한 전국시대에서는 말 그대로 총력전과 학살이 일상적이였다. 하지만 열전에서 세세하게 적어낼 정도면 그때 사람들 시선에서도 학살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했을것이다.
  6. 조나라 이상으로 피해가 컸던 게 바로 초나라다. 백기의 공격으로 왕실의 능역인 이릉이 약탈 당하고, 도성이었던 영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으면서 초나라의 경양왕이 수도를 진으로 옮겼다. 그리고 모수는 이 전적을 이용해 일개 장수 따위한테 이렇게 당하고도 진 밑으로 기어들어가고 싶냐는 주제로 초왕을 설득해 합종을 이룬다.
  7. 처음에는 왕흘이 3번의 전초전에서 승리하면서 아싸조쿠나 했지만, 이는 장기전으로 끌고가려는 염파의 계책이었고 이후 우주방어 모드로 들어가 버린 것. 이후 조나라 왕이 나가 싸우라고 갈궈도 염파는 명령을 가볍게 씹는다.
  8. 이때 백기와 염파가 교체 된 것이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인지 아니면 한 쪽이 먼저 교체 된 후인지가 불분명하다. 대부분 우선 염파가 경질되고 백기가 부임하였다고 한다.
  9.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초나라를 침공할때 그의 병력은 초나라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으며, 장평대전 당시에도 왕흘에서 백기로 진나라의 총 사령관이 교체되었을 당시 조나라의 군세나 병력, 진형등 모든것이 진나라를 능가했다. 그러나 백기는 한번의 싸움으로 조군의 총사령관 조괄을 대패시키고 열세를 우세로 바꾸었다
  10. 별다른 손실없이 흉노 10만을 일방적으로 몰살시켰고 이후 진나라가 이목에게 연패를 거듭해서 전투를 통한 격파가 아닌 곽개를 통해 이간질로 이목을 경질시키고 나서야 조를 멸망시켰다
  11. 백기와 마찬가지로 패전기록이 전무, 진 다음 강대국 초나라 대군을 격파했다
  12. 다만 후세 사람들은 이 네 사람중 백기를 가장 높게 평가하는 듯 하다. 실제로 후대 명장을 논할때 '그 옛날 한신과 백기같다'라는 평은 수 없이 쓰인다.
  13. 서초패왕, 역발산기개세는 대표적인 항우의 강함을 나타내는 말
  14. 중국 최고의 장수로 언급되는 자, 항우를 격파
  15.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 2권 351페이지 참조.
  16. 만극이 장평대전 이후 조나라 병사들을 생매장 하던 때를 회상하는 장면에서는 눈이 멀쩡하게 나온다.
  17. 통솔과 적성 등을 보자면 나름 타당한 평가지만 나머지는...플레이어들은 고대무장들 중 공자를 필두로 과소평가 받은 무장들 중에 한 명이라며 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