昭襄王
1 진(秦)나라의 왕
역대 진나라 왕 | ||||
26대 진 무왕(秦 武王) | → | 27대 진 소양왕(秦 莊襄王) | → | 28대 진 효문왕(秦 孝文王) |
생몰 BC 325~BC 251(재위 BC 306~BC 251)
이름은 영직(嬴稷). 효공과 혜문왕에 이어 진시황의 전국시대 통일의 기틀을 다진 왕 중 하나다. 전국칠웅 중에서 초, 진의 양강 체제를 확립한 왕으로 이 당시를 서술한 사마천의 사기에 여기저기서 많이 등장한다. 소양왕이 50년 동안 재위했지만 그의 아들인 효문왕은 즉위한 지 3일만에 죽어버렸다.
1.1 일생
영직은 혜문왕의 서자로 태어났다. 영직은 서자에 위에 적자인 이복형 무왕도 있어서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였지만, 이복형 무왕이 주나라에가서 힘 자랑을하다가 그만 어이없게 재위 4년 만에 후사 없이 사망하고, 이 때문에 진나라 왕위를 놓고 혜문왕의 자녀중 위나라 공주가 낳은 영장과 초나라 공주가 낳은 영직 사이에서 왕위쟁탈전이 벌어지게 된다. 당시 소양왕은 연나라의 볼모로 있어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나라 무령왕의 도움과, 당시 진나라의 병권을 장악했던 소양왕의 외삼촌 양후 '위염'[1]의 후원 덕분에 영직은 진의 새로운 왕이 될 수 있었다.
왕위 초창기에는 위염 등 외척들의 힘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외척들의 견제로 권력을 잡지못했고 누리지 못했다. 양후 위염이 정권을 잡고 있었을 때, 양후는 제나라를 공격해서 자기 영토를 확장하려는 계획을 잡았는데. 이 사실을 안 범수는 소양왕에게
한나라와 위나라, 이 두나라를 거쳐 막강한 제나라를 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왕께서는 진나라의 병력을 아끼고, 한, 위 두 나라의 병력을 최대한 동원하시려는 것 같은데, 동맹국을 믿지 못하면서 그 너머에 있는 제나라를 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지난 날 제나라 민왕이 연나라의 악의에게 패한 것도 멀리 떨어진 초나라를 치다가 과중한 부담으로 동맹국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나라와 위나라만이 덕을 보게 되었으니, 이는 적에게 병력을 빌려주고 도둑에게 식량을 대준 셈입니다. 현 정세하에서는 먼 나라와는 친선을 맺고 가까운 나라부터 공략하는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을 써야 합니다.
소양왕은 범수의 책략을 받아들여 동쪽 끝의 제나라를 공격하는 계획을 포기했다. 이후 범수를 통해서 외삼촌 위염을 축출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범수를 응땅의 후로 삼고 진나라의 재상직위를 부여하여 그의 원교근공책을 펼치게 하였다. 소양왕은 원교근공정책에 따라 우선 백기, 몽오, 왕흘 등에게 명하여 인접한 한나라부터 쳤고, 한의 국토가 말 그대로 반동강이 나자 이에 조나라는 고립된 한의 상당 땅을 먹어버렸다. 진은 바로 창끝을 조나라로 돌렸고, 이는 전국시대의 판도를 바꾼 장평대전으로 이어진다. 장평대전에서 승리한 백기는 조군 30만 명을 생매장하며 조나라를 영원한 2등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은혜를 원수로 [2]
여기에 진과 대등한 대국인 초나라를 집요하게 압박하여 소양왕 사후 시점에서는 이미 초나라의 상당한 영토를 진나라가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범수, 백기, 사마착 등의 명신과 명장들을 기용하여 진나라 주도의 통일을 바로 코앞까지 이루어 놓은 명군으로 남았다.
진나라 군주 중 가장 긴 56년의 재위 기록을 가지고 있고 직접 전쟁에도 출진했다고 전해질 만큼 그야말로 당시 다른 나라들에겐 악몽과도 마왕 같은 존재였다. 소양왕이 각국을 침략했기에 나머지 전국에서 조사, 염파, 악의, 맹상군, 평원군 등의 인물들이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지도만 봐도 알겠지만 소양왕 재위기간 동안 진은 당시 전국의 절반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제위 51년에는(BC.255년)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 천자의 상징이던 구정을 진나라로 가져온다. 진왕 영정이 즉위할 무렵에는 진의 천하통일은 이미 시간문제였던 셈. 증조부가 차린 밥상에 수저를 올린 진시황 다만 젊은시절에 조나라의 인상여에게만은 연거푸 당하기만 한 아픈 역사가 있다. 조나라에게 화씨지벽의 진상을 요구했으나 인상여의 기지에 휘말려 체면을 구겼고, 조나라 왕과의 민지 회담에서는 인상여의 협박에 압도당해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인상여 항목 참조.그래서 노년에는 백기를 보내 조나라를 개박살 냈다 카더라
그런데 소양왕의 재위 기간은 56년에 달하지만, 범수의 도움을 얻어서 외삼촌인 위염을 축출한 것은 소양왕 재위 42년의 일이다. 즉 실제로 소양왕이 권력을 휘두른 기간은 10여 년에 불과하다는 말. 그 때문에 사마천은 양후열전 마지막에 진나라가 땅을 넓히고 천하를 호령한 것은 모두 양후의 공적이다라고 평가했다.
1.2 사후
워낙 오래동안 살다가 사망한 탓에 그의 후계자인 효문왕은 재위 3일만에, 장양왕은 3년만에 사망했다. 그후 여불위가 상국이 되어 나라를 통치하고, 성인이 되어 권력을 되찾은 진시황은 적극적인 정복전쟁을 벌여 진나라를 통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