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길

孔吉

생몰년도 미상

조선 연산군 때의 광대. 조선왕조실록에서 딱 한 번 언급된다.

공길은 궁궐에서 늙은 선비를 흉내내는 놀이를 하다가 '전하는 요, 순과 같은 임금이시고 저는 고요와 같은 신하인데, 요순은 항상 나오시는 성군이 아니지만 고요는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신하입니다.'라고 연산군을 띄워주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에 논어 구절 중 하나인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지,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란 말을 했다. 이를 자신이 임금답지 못하다고 놀리는 것으로 간주한 연산군은 공길에게 불경한 죄를 물어 곤장을 때린 후 귀양을 보냈다. 실록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고 그는 더 이상 역사의 무대에 다시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왕의 남자 홍보 팜플렛에서는 이 기록을 한 줄로 요약해 적으면서 "배우 공길이 '왕이 왕 같지 않으니 쌀이 쌀 같지 않다'고 말했다가 참수되었다'라고 써 놓았다(...)

하지만 말 한마디 잘못하고 신세 망친 대표적인 예로, 아니 이런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 인물을 다룬 이 짧은 기록에 상상력을 부풀리고 부풀려서 결국 연극 <이>가 만들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이준익 감독은 영화 왕의 남자를 만들었다. 대장금과 비슷한 사례다.

KBS 스페셜에서는 그를 무용가 공옥진 여사의 조상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설을 보여주고 있는데 정작 족보 연구가들은 공갈치지마글쎄올시다란 반응을 보이거나 거의 무관심하다. 조선시대 기준으로 천민이었던 광대 공길의 이름이 버젓이 조상이라고 족보에 올라 있을 리도 없거니와 천민 중에는 성씨가 없는 사람이 많았음을 감안하면 공길의 "공"도 성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