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

(귀양에서 넘어옴)

1 '성질에 따라 분류'하는 유형

이쪽은 類型. 성질이나 특징 따위가 공통적인 것끼리 묶은 하나의 틀. 또는 그 틀에 속하는 것.

학생이라면 특히 수학에서 친근한 단어일 것이다. 문제집에선 뭐만 하면 유형만점, 유형잡기 등의 말을 쓰니...

다만 고작 이거 하나 적자고 만든 항목은 아니다.

2 '유배형'으로도 알려진 유형

이쪽은 流刑. 죄를 지은 자를 변방이나 외딴 섬으로 보내는 형벌오형 중 두번째로 무거운 형벌. 귀양 또는 유배라고 불리기도 한다.

고려시대에 중죄인은 섬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뚜렷한 벌 없이 그냥 버리는 경우도 많아서 생존왕 사실상 죽음의 형벌, 고려 연간부터 섬 사람들을 천시한 것이 이런 귀양 와서 버려진 사람의 후손으로 보는 경향 때문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죽지 않은게 어디냐 싶어지지만 조선 시대에 유형에 처해져 고생 없이 귀양살이한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유배라고 해도 중죄인 유배와 정치적 추방의 차이는 있어서 후자는 지방 연금에 가까웠다.

물론 고생스럽지만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기에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이 스스로 청하기도 하는 형벌이었다.[1]

2.1 한국의 유배형

2.1.1 일단 맞고 시작하자

일단 조선 시대 형법의 기본으로 삼는 명나라 법전 대명률에 따르면 거리에 관계없이 100대를 친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생사의 문을 넘어든다. 장형 문서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데, 신체가 강건한 사람도 이렇게 장형을 당하고 나면 초죽음이 된다.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이를 이용해서 공식적 처벌은 유배로 해놓고, 실제로는 장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단적으로 정도전이숭인 등의 정적을 이렇게 죽였다. 뭐 애초에 이색 등이 정도전을 같은 방식으로 제거하려고 했던 것을 정도전이 되돌려준 성향도 있지만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색도 유배가는 도중에 죽었는데, 그 사인으로 유력한 것이 독살과 더불어서 장독으로 인한 사망이다.

단 정치적 숙청이 목적이면 장형은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정확하게는 사대부인 경우는 속전이라고 해서, 돈을 내서 장형을 면제 받은 것이다. 원나라 시기까지는 원래 장형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을 관료에게 뇌물을 줘서 면제받는 식으로 했는데[2], 명나라 시기가 되면 대명률에 대놓고 속전을 명시해놨다. 그래서 이놈은 무조건 때리고야 말겠다라고 합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돈 많은 놈들은 돈 내고 장형을 면제 받았다. 대명률을 가져온 조선 역시 속전이 가능했기 때문에, 명색이 관료 정도 되면 장형을 받고 유배 가는 일은 거의 없어진다.

2.1.2 험난한 길

그리고 장형이 집행된 다음에는 죄의 경중에 따라서 2000리 (800km), 2500리 (1000km), 3000리 (1200km)로 나누어서 유배를 보내는 것이 원칙이다. 이런 정신이 아득해지는 거리는 역시 대명률을 가져왔기 때문인데, 조선에서는 영토의 면적 상 도성에서부터 2천 리 밖으로 유배를 보내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3] 거리를 채우기 위해서 일부러 유배길을 여러 지역을 거치는 식으로 뺑뺑이 돌아서 간다. 만약에 지역이 A-B-C 이렇게 있고 출발지가 B이며 유배지가 C라고 했을 때 B→A→C 이렇게 간다는 얘기다.[4] 의금부노정기에는 경기도, 충청도로도 유배를 보낼 수 있었다.

흔히 사극에 나오듯이 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서 편하게 가는 일은 없고 대부분 걸어서 가게 된다.[5] 소달구지로 죄수를 호송하는건 사형수를 사형장으로 호송할 때 뿐이라고 한다. 나름 돈 있는 대감들은 나귀를 대절해서 가기도 했는데 도주를 방지하고자 며칠부터 며칠까지 중간 기착지 어느 관아에 신고를 해야하는 터라 상당히 빡세게 움직여야 했고, 험준한 곳으로의 귀양은 이런 이유로 가다가 장독 등으로 죽는 경우도 많았다. 안그래도 장형을 맞아서 성치못한 몸으로 천리행군을 하는 셈이니 귀양지까지 도착하기 힘든 것은 당연지사다. 다만 꽤 이름 있는 양반이 역적혐의가 아닌 높으신 분의 심기를 거슬려서 가는 경우는 제자들이나 알고 지내는 관리들의 인사를 받고 기일을 늦추는 경우도 있었다. 이항복의 경우는 북청으로 가던 중에 알고 지내던 사또가 생까는 것에 분노를 표한적도 있었을 정도지만 이런 사례는 그야말로 드문 사례다.

게다가 귀양지 자체도 사람이 살기 힘들고 험준한 지역을 고르게 된다. 당장 경기도나 충청도의 내륙에 귀양가는 것은 유형을 빙자한 요식행위므로 논외로 할 수 있으며, 제대로 유형을 받으면 함경도의 삼수갑산 같은 깊은 오지나[6], 제주도흑산도 같은 외딴 섬[7]으로 결정되는 일이 많았다. 당연하게도 가는 길 자체가 험한지라 중죄인만 유배를 보냈고 사실상 거기서 죽으라는 이야기였다.

2.1.3 유배생활

유배지에 도착한 후에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가택 연금이나 다름없어서 주막이나 정해진 집과 주변지역 이외에는 관리의 허가를 맡지 않으면 바깥으론 못나갔고, 유배지는 대부분 보낸 지역에 계속 보내는 경향이 있었고, 국가는 유배된 자들을 위한 지원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배당한 죄인의 생활비는 본인이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없으면 유배지에서 본인이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한다. 또한 유배인을 감시하기 위해 지방민 중 형편이 조금 되는 사람을 보수주인으로 지정해서 돌봐주도록 하지만, 당연하게도 험준한 곳에서 물자가 많이 생산될 리가 없으며, 당장 먹고 사는 것과 조정으로 보낼 세금까지 생각하면 유배당하는 자까지 챙길 여유가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래서 유배온 사람은 험악한 환경에서 동네 사람들에 구걸로 연명하거나 제대로 된 의식주를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압도적이었다.

가끔 가족들이 물건을 보내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워낙 멀고 험악한 지역인지라 제대로 전달되기 힘들었다. 당장 제주도에 귀양온 추사 김정희의 경우는 집에서 보내온 음식물의 태반이 썩어서 버렸고 젓갈류만 그나마 먹을수 있었다고 한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젓갈을 더 보내달라고 했을 정도다.

이것도 역적으로 몰리는 경우에는 가족, 친지, 친구 등이 대부분 사분오열되고 엄중한 처벌을 받기 때문에 제대로 지원해주기 힘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영양가 떨어지는 음식을 먹여 죽게 만드는 사례도 있었다고 하며 쌀가루와 소금만을 개어 먹여 영양실조 상태로 죽게 한 사례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장 연산군에게 충언을 계속 하다가 미움을 받아 유배당한 이자건(1455~1524)같은 경우, 유배지 사또가 워낙 탐관오리인데다가 멋대로 이자건을 괴롭혀왔다. 먹을 것이나 지급할 생필품도 줄였으며 하루는 금부도사가 온다는 말에 그냥 들이닥쳐서 군졸들을 시켜 어차피 죽을 놈 괴롭히자 구타까지 해버렸다. 그러나 금부도사는 다른 곳으로 가면서 이자건은 무사했다. 그래도 대인배인 이자건은 뒤에 중종반정 이후 한양으로 돌아가 더 높게 승진되었을 때 이 사또를 꾸짖곤 이전처럼 사또 직을 하게 놔두었다고, 그래서일까 이 사또는 감명받아서인지 꽤 좋은 사또로 달라졌다.

하지만 어느 정도 덕망이 있는 자가 귀양을 가거나 높으신 분이 권력다툼에 밀려서 낙향하다시피한 경우는 아무래도 정권이 바뀔 때를 대비해서 지방관의 배려를 받아 외출이나 식사도 제공받을 수 있다. 사실 이 경우는 중죄인 처벌보다는 그냥 정적 추방이 목적이니 가능. 또 이런 사람들은 귀양온 마을의 훈장을 맡는 경우도 있었다.[8] 맹꽁이 서당의 훈장도 설정상 귀양온 정승이었고 누명이 풀려서 병조판서로 복귀한다는 설정. 허나 그 주제에 금강산을 유람가거나 못해먹겠다고 떠나겠다는 에피소드도 있는데 이는 작가의 잦은 휴재로 인한 돌려막기라는 점은 감안하자. 물론 유형을 빙자한 요식행위였다면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일단 유배도 종류별로 고생하는 급수가 달랐다. 가장 심한건 대역죄인들이 받는 위리안치형이고, 가장 가벼운 유배형으로는 본인이 원하는 곳을 스스로 고르게 하는 자원부처를 들 수 있다. 이 경우면 자기나 처가의 농장이 있는 곳으로 가면 되니(왠만한 중앙 관리라면 지방에 농장 정도는 있는 경우가 많았다), 편하게 지낼수 있다. 또한 서울에 들어오는 것만 금하고 아무데나 다닐수 있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면 중앙 정계에서 잠깐 빠져서 머리 좀 식히거나 반성 좀 하고 오라는 것이니, 곧 복귀하는게 기정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는 지방민이나 지방관들이 잘 대해주었다. 그러나 역모에 연류되어 복귀 가능성이 없는 중죄인들은 극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오사화로 유배온 김굉필은 그 동네에 부임온 관리의 아들인 조광조의 스승이 되었고, 정약용의 경우에도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목민심서까지 쓴 것이 대표적인 사례. 또한 정약전의 자산어보도 유배생활 중에 쓰여젔다.

2.1.4 기약없는 해방일

유형은 기본적으로 무기징역이나 마찬가지 이기 때문에, 언제 풀려날지가 아득하다. 그러니 유배를 시작한 이들 가운데 일부는 나름대로 자신이 풀려 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배운 것이 글쓰기라고 풀어주세요라고 요약할 수 있는 글 쓰기가 많았다. 이를 유배문학이라고 부른다. 단적으로 정철이 지은 사미인곡속미인곡이 바로 이 유배문학이다. 수험생: 저언하 저자를 죽여주시옵소서 사실 요즘에도 아직 최종 판결이 나지 않은 수감자들은 판사에게 일종의 반성문같은 것을 제출한다. 게다가 유배된 사람들은 다 글 꽤나 읽은 사람들이었으니 상당히 잘 써진 반성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많지 않고 대부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편히 산다고 해도 상실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거기다 언제 풀려날 지도 알 수 없고 언제 사형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태이기에 심적 부담도 컸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경우에는 세상돌아가는 사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금부도사를 만나게 되니 심적 충격이 엄청났다.

게다가 사람에 따라 언제까지 유배를 당할지 몰랐는데 정약용은 무려 18년을 유배당하기도 하고, 윤선도처럼 4번에 걸쳐 무려 25년을 유배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야사에 따르면 벽파 집권기에 정약용이 귀양간 후 시파인 김조순이 집권하게 되었는데, 가지고 있던 부채에 정약용의 시가 적혀 있었으나 그 지은이를 모르고 있어서 궁금해 하다 주변에서 "그거 귀양가 있는 다산이 지은 시임"이라고 가르쳐주고 나서야 "아니, 귀양가 있는지 18년이나 됐단 말임?"이라고 놀라 귀양에서 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경우는 보통 귀양을 가면 얼마 안가서 죽기 때문에 귀양을 보낸 쪽도 얼마간 세월이 흐르면 당연히 죽었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실제 그 사람이 어떤 상황인지 확인하는 것을 까먹는 경우가 진짜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다만 이런 케이스는 그냥 숙청이 목적이니까 가능.[9]

2.2 종류

그 외에도 유배자가 지방관의 감시를 받는 부처(付處)와, 죄인의 유배지에 가시나무를 심어 도주를 미연에 방지케 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와 천극(栫棘), 죄인의 일가 모두를 북쪽 변방으로 보내는 전가사변(全家徙邊)이 있다.

보통 귀양살이라면 그래도 동네 주변까진 나다니기라도 하는데 위리안치나 천극을 받으면 정말 집 마당 밖으로 한발짝도 못나가게 되는 사실상의 감옥살이가 된다.

모두 일반 귀양보다 강도가 센 것으로 이런 부가옵션을 받으면 그냥 죽는 것이 나을 수준이 돼버린다.

2.3 해외의 유배형

2.3.1 중국

중국에서 역시 유형이 존재했는데 후한 시대에는 일남(日南)[10]으로 유배되는 것이 유형 중에서는 최고로 무거운 형벌이었다. 낙양에서 13,400리나 덜어져 있는 데다가 당시의 일남은 고온다습에 기후가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3.2 일본

일본 역시 한국처럼 외딴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사도 섬으로 유배된 고다이고 덴노, 이즈 제도 하치조시마에 유배된 우키타 히데이에 등이 유명하다.

2.3.3 러시아

드넓은 나라인만큼 시베리아로 유배형을 보냈다. 끔찍한 것으로 악명이 높지만 사실 러시아 제국 시대까지는 매우 느슨한 형태여서 몰래 탈출해 돌아오는 게 매우 쉬웠다. 이게 힘들고 혹독해진 건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 이후.[11] 시베리아에 수많은 굴라그가 운영되었다.

2.3.4 영국과 영미권

영국은 범죄자를 호주, 미국신대륙에 보냈다(...)

2.3.5 몰디브

섬이 많은 몰디브에는 21세기까지도 유배형이 있다. 민주화 시위 때 인기가 있던 총리를 외딴 섬으로 보낸 게 몰디브 유형의 대표적 사례.

2.3.6 독일

독일에는 21세기 들어 유배형이 부활하였다. 세계 각국과 협정을 맺어 2000명의 청소년 범죄자를 해외에서 일정 기간 생활하게 하는 식으로 부활하였다. 다만 이건 처벌보다는 개화 목적에 더 가깝다.

2.4 기타

귀양살이의 처참한 실상과 그에 대한 심경을 담은 고전문학으로는 만언사, 만분가가 있다. 양반들이 써낸 글임에도 불구하고 구질구질한 신세타령이 일품.

tvN에서 방영하는 렛츠고 시간탐험대에서 유배생활의 체험편이 방송되었다.

고려시대의 형벌이라고 할까 정치적 처벌 중에서 귀향형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유배와는 다른 전혀 다른 형벌이다. 이 처벌을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면 고향 앞으로라고 할 수 있다. 단 이것도 범털과 개털이 갈린다. 범털이라고 할 수 있는 문벌귀족이나 그에 준하는 고위 관료의 경우는 '관직과 특권, 과전 등을 박탈하고 본관이 있는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형벌'이다. 현대로 치자면 파면+강제적 자숙의 의미가 붙어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것도 개털이 되면 이야기가 좀 달라져서, 정전 같은 것이 있다면 몰수한 다음에 향 또는 부곡이나 섬 등으로 거주지역으로 강제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향이나 부곡 등이 이후에 소멸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유배와 별도로 존재했던 귀향형은 조선시대에 가면 소멸한다. 문벌귀족을 대상으로 했던 범털식 처벌법은 말할 것도 없이 소멸.

2.5 현대 대한민국의 유배

보통 공무원이나 하사급 이상 군인에게 적용되는 비징계 문책 인사다. 공식 징계나 처벌이 아니라서 비징계성 문책 인사라고 표현한 것이다. 감봉 등 공식적 징계와 같이 껴서 행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기존에 연고가 없는 곳으로 이동 시간을 최소로 주면서 보내버린다. 참고로 정상적 인사이동의 경우 휴가를 붙여서 쓰거나 처음부터 인사이동 날짜를 넉넉하게 주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문책성 인사에는 불가능하다. 보통 음주운전 걸려서 그 다음 후속대책으로 징계하고 인사이동시키는 경우를 말한다. 강원도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전라도 토박이가 경상도로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유배를 가면 강원도로 가고, 그런 식이다. 물론 유배지는 대도시 꿈은 꾸지 말아야 한다. 말이 유배일 뿐, 즉 그냥 나가라는 의미다. 비유적으로는 한직으로 발령내는 것도 유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서울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지방대로 진학하는 것을 유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 손침, 김경징
  2. 이건 수호전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3. 북쪽 끝 경원부가 1700리, 남쪽 끝 동래가 1000리 정도였으며, 2000리가 넘는 곳은 대정현 하나뿐이었다.
  4. 환빠들 중에서도 진짜 악질 환빠들은 이걸 가지고 좁은 한반도에서 3천리형이 말이 되냐능! 조선은 대륙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능! 하는 식으로 우긴다(...)
  5. 조선시대에 잘 알려진 유배길은 삼남대로, 영남대로, 관동대로가 있었다.
  6. 삼수갑산이라는 말이 바로 이 삼수와 갑산에서 나왔다. 현대 군대 용어로 보면 양구/원통에 비할 정도로 춥고 길 험한 곳. 참고로 삼수군과 갑산군은 양구 인제보다도 1월 평균기온이 10도는 더 낮은 곳이다!!!
  7. 지금은 비교적 간단하게 갈 수 있는 강화 교동도(이쪽은 주로 왕실 인사들이 주로 가는 곳이었다), 전라남도 완도, 보길도, 부산 가덕도, 경상남도 남해도, 거제도 같은 곳도 당시로서는 절해고도였다.
  8. 덕분에 현지 사람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는 순기능도 있었다. 제주도의 경우가 대표적.
  9. 조선 태종이 이런 식으로 많이 숙청을 벌였다.
  10. 오늘날의 베트남 중부 지역.
  11. 참고로 스탈린 본인도 제국 시대에 시베리아로 유배형을 당한 적이 있다.